"미리님, 유빈님, 인쇄 20부 보내 놨거든요. 왼쪽 위에 일자로 철만 좀 해주세요."
'왔다, 복사질!' 최사원은 말로만 듣던 신입의 숙명, 복사질이라는 것을 해보게 된 것에 약간의 희열을 느끼는 중이다. 2년 간의 동굴 생활에서 벗어나 소임을 맡았다는 것이 행복하다. 듬직한 미리 누나를 따라 따끈한 회의 자료를 낮은 캐비닛 위로 옮겨 한 세트씩 지그재그로 겹친다. 두 신입은 각자의 손에 적당한 스테이플러를 쥐고 첫 과업에 임한다.
'티긱, 티긱, 티긱... .' 최사원은 스무스하게 진행하는 미리 누나를 보며 첫 과업의 소소함에 감사했다. '틱.' 실수다. 다시. '틱?!' 강사원이 빠른 템포로 다른 스테이플러를 건넨다.
"유빈님, 자료가 두꺼워서 굵은 심 써야 할 것 같아요."
캐비닛 위에 널브러진 스테이플러들을 살펴보니 크기가 제각각이다. 다이소에서 볼법한 미니 사이즈부터 미리 누나가 들고 있는 대왕 사이즈까지. 다시 보니 타공기도 여러 개다. 사이즈가 다 다르다. 그제야 잘못을 알아챈 최사원은 심혈을 기울여 세 번째 도전에 임한다.
'티긱, 티긱, 티긱... .' 이제 강사원과 같은 소리가 난다. 생각보다 디테일이 중요한 작업이었구나 생각하며 여섯 부쯤 찍고 있는데 강사원이 열 부를 다 찍고 회의 자료의 맨 앞장을 복사한다.
'뭐 하는 거지?'
"실패한 세 부는 장갈이 해야 돼요. 맨 앞장만 갈면 두 번째 장부터는 찍힌 자국이 안 보이니까 괜찮아요."
"와, 누나 장난 아니다."
최사원은 씨익 웃어 보이며 감사를 표한다. 공식적인 첫 과업에서 자신이 동굴 생활을 하는 동안 세상의 많은 부분을 놓쳤음을 실감한다. 같은 신입이지만 같은 신입이 아니다. 강사원이 동기라 다행이다. 약간의 부끄러움만 이겨내면 된다. 모르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알아가면 된다. 대리님도 동기도 정말 잘 만났다.
"두 분 혹시 열 제본할 줄 아세요? 스프링 제본이라도."
"제 책상에 있는 스프링 제본기는 써본 적 있습니다."
명확한 템포로 강사원이 맞받아친다.
"그럼 미리님, 스프링 제본 세 부만 부탁드려요. 캐비닛 제일 윗 칸에 커버랑 스프링 있어요. 인쇄 보낼게요."
"넵."
열 제본은 뭐고 스프링 제본은 무엇이란 말인가. 스테이플러도 구분 못하는 최사원에게 두 사람의 대화는 지나치게 고차원적이었다.
"대리님 까끌한 면을 앞으로 할까요?"
"네네, 스프링은 제일 작은 거 쓰시면 돼요."
"대리님, 스프링 까만 건 두 개밖에 안 남았는데 하얀 걸로 통일하는 게 좋을까요?"
"아, 까만 걸 다 써야 되는데... . 그럼 하얀 거 하나, 까만 걸 두 개 하죠. 사장님만 하얀 거 드려요 우리."
최사원은 강사원이 제본기에 스프링을 걸고 한 치의 오차 없이 정간격으로 타공 된 커버를 이리저리 맞추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보고 있는데도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유빈님 이거."
"네?"
기척도 없이 다가온 정대리가 회의 자료 스무 부를 양손에 나누어 들고 있다. 손가락으로 한 모퉁이를 가리키면서.
"지인짜 죄송해요, 앞장만 장갈이 해서 다시 찍어 주시겠어요? 여기에 한.자.한.일.자.로 반듯하게요."
"넵, 죄송합니다. 바로 다시 하겠습니다."
"아뇨, 너무 죄송해요. 수고했는데. 부탁드려요."
회의 자료 스무 부를 최사원에게 넘긴 정대리는 뭐가 그리 바쁜지 머리칼을 날리며 자리로 돌아간다. 사람은 가고 향기만 남는다. 최사원은 강사원의 완성품과 자신의 완성품을 허리춤에 걸리는 캐비닛 위에 나란히 놓았다.
'저 누나는 이걸 어떻게 한 거지?'
강사원의 회의 자료 왼편 상단에는 자로 잰 듯이 한일자로 반듯하게 심이 박혀있다. 언젠가 넋 놓고 보았던 힐링 영상에서나 봤던 균형미다. 반면에 최사원의 완성품에 있는 심은 모두 미묘하게 비스듬히 박혀 있다. 고민할 틈이 없다. 서두르자. 땀이 바짝 난다. 적어도 강사원의 고난도 스프링 제본 완성품이 나오기 전에는 이 소소한 임무를 완수하고 싶다. '틱.' 다시. '틱.' 다시. '틱.' 미치겠다. 장갈이 때문에 복사기 앞을 떠날 수가 없다.
"거, 같이 좀 씁시다."
"아, 네. 죄송합... . 쓰십... 쇼."
재무처의 누군가가 최사원을 흘깃 보며 앞을 가로막는다. 그리고는 복사기 앞에서 떠나지 않는다. 최사원은 뒤로 물러나 끊임없이 인쇄되고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며 속이 타들어간다. 이래서는 강사원의 스프링 제본 전에 임무 완수는 고사하고 회의 시간에도 못 맞추겠다 싶다.
"거, 왜 그러고 서있어? 신경 쓰이게."
"아, 회의 자료... ."
"나 이거 150장인데? ...양면."
'!'
망했다. 어떻게 하지? 갈 곳을 잃고 헤매는 최사원의 멘탈을 부여잡은 건 그의 강인한 미리 누나였다.
"미안해요, 스프링 제본하느라 못 봤어요. 아까 앞장 인쇄해둔 걸로 다 찍었어요."
"와 씨, 누나 사랑하는 거 알죠?"
"빨리요. 대리님 벌써 가셨어요."
"네!"
최사원은 의식의 흐름에 따라 당차게 대답하고 영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이는 재무처 동기 엄사원을 지나 내달리기 시작했다. 앞선 머리칼이 어깨에 두어번 걸리는 순간, 한참 전부터 품고있었던 원초적인 궁금증이 가쁜 숨 사이로 새어나온다.
"근데 누나, 회의실이 어딘데요?"
2019년 11월 4일 월요일 맑음
<전략처 정대리> 머릿수는 위대하다
사람 둘 늘었다는 게 이렇게 크다니. 새삼 노동력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농경이 시작된 이래 인류가 줄곧 노동력을 갈구해온 이유가 있었던 거다. 회의 자료 찍는 것만 넘겨도 이렇게나 여유로운 것을... 그동안의 나, 구질구질 고생했다. 잘했다. 칭찬해. 브라보다.
<전략처 강사원> 회의가 나한테 오진 않겠지
서둘러 회의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세팅이 끝나 있었다. 정말 놀랐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시야를 가리는 긴 앞머리를 옆으로 넘기며 마지막으로 PPT와 스크린을 확인하는 대리님이 우아해 보였다. 내가 회의 자료를 들고 굳이 뛰었던 이유는 회의실 세팅 때문이었다. 월요일 아침에는 항상 그랬었으니까. 대리님은 7시 반부터는 나와 함께 자리에 있었다. 그럼 회의실 세팅은 언제 한 거지? 새벽에? 무리다. 출근이 나와 비슷했다. 내 바로 앞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걸 봤으니까. 그럼 혹시 휴일일까? 그렇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선임이 높은 퀄리티로 일을 해놨다면 그 일은 받는 후임은 그만큼을 해야 본전이다. 회의가 나에게 넘어온다면 나도 매주 그 짓을 해야 한다. 난 못한다. 그러려고 다시 사회에 나온 게 아니다. 대리님이 불편하다. 불안하다. 가뜩이나 거추장스러운 놈이 동기라고 달라붙어있는데.
<전략처 최유빈> ...
진이 빠진다. 집에 와서 구두를 벗었는데 아니 무슨 발냄새가...... 출근 첫날은 지난 주가 아니라 오늘이었다. 나 앞으로 괜찮을까. 버틸 수 있을까.
<재무처 엄유미> 다 미쳤어
알코올은 발암물질이다. 그 미친놈들 때문에 내가 암에 걸린다면 맹세컨대 기필코 죽일 것이다. 아 생각할수록 열 받는다. 쓰레기들. 이런 회식을 2019년에 한다고? 아니 잔은 왜 돌려? 더러운 놈들 진짜. 어제 회식 여파로 오늘 하루 종일 몸이 안 좋아서 죽을 뻔했는데. 하루 만에 또 회식이라니. 감사실은 신입도 없다면서 왜 합류해서... 그나저나 그 여자는 대체 뭐지? 술을 어떻게 그렇게 마셔? 그 사람 때문에 빼지도 못하고 진짜. 내가 신입 중에 제일 먼저 직장 내 괴롭힘으로 감사 고발하는 거 아닌가? 고발한다해도 그 여자가 감산데...... 너무 괴롭다.
<영업처 최단> 다 미쳤어
'엄마, 살려주세요. 이 회사는 술로 숨 쉬는 사람들이 살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