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반차는 정말 쓸 게 못되네요."
오전 시간에 병원에 다녀온 정대리가 자리를 잡는다. 저스트 13시. 오전 반차는 아직 한 시간이 남았지만 오후에 있을 사심위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어 일찍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반차가 아닌 외출이다. 오전 7시에 회사에 들려 사심위 알림 메일을 돌리고 영업처에 전화까지 넣고 자리를 비운 정대리였다. 서른하나에 이명이라니. 두통에는 이골이 났다지만 불현듯 몸속 모든 공기가 귀를 타고 빠져나가는 듯한 이명에는 겁이 덜컥 났던 것이다.
"대리님 혹시 어디 아프세요?"
좀처럼 사생활을 묻지 않는 강사원이 옆자리 동료로서의 매너를 보인다. 정확히 말하면 매너를 가장한 떠보기다. 최유빈이라는 거대한 등짐을 짊어지고 있는 강사원은 옆자리 상사의 병원행이 두렵다. 곧 이번 주 회의 자료 취합이 시작될 텐데 혹시 사원 둘만 남게 되면 분명 사고가 난다. 대원각의 여파로 아침부터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있는 최사원이다. 저 미덥지 못한 담당자가 혼자서 회의를 쳐낼 수 있을 리 없다. 뒤집어쓰는 것은 결국 나다. 강사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정대리의 부재를 막고 싶다. 적어도 부재를 미리 알고는 싶다.
"원래 디스크가 있어서 약을 먹고 있는데 이번에는 이명이 오네요?"
"이명이요?"
"네, 원인이 다양해서 병원에서도 이유를 모르겠대요. 그러면서 아직 젊으니까 당분간 좀 버텨보라는 거 있죠? 버티다 버티다 미치겠어서 간 건데 어쩌라는 건지... 의사도 참 쉽네요."
강사원은 어린 나이에 디스크에 두통에 이명까지 껴안고 사는 정대리가 잠시 안쓰럽다. 하지만 일단은 나부터 살고 봐야 한다. 이번 주 정대리의 일정을 파악해야만 한다.
"그럼 여기저기 검사받아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다른 병원은요? 예약 미리 하셔야 되잖아요."
"오늘 사심위고 내일은 회의 자료 시작하는데 이제 다음 주에나 가봐야죠, 뭐."
'휴, 다행이다.'
안도의 날숨을 낮고 길게 뿜어낸 강사원은 이제서야 마음 깊은 곳의 동정심을 끄집어낸다. 병원에서 돌아오자마자 커다란 알이 박힌 청광 차단 안경을 장착하고 쭈욱 뺀 목 너머로 모니터를 쏘아보는 정대리에게 위로의 한 마디를 건넬 타이밍을 잡으려 애쓴다. 바로 지금이다.
"대리님, 그..."
'따르르릉!'
"행복한 미래와 함께합니다. 전략처 정.민.입니다."
한 번의 벨소리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낭랑한 정대리의 목소리에 덮여버린 강사원의 진심은 이내 사그라든다. 저 정도 반응 속도로 전화를 받으면 이명이 생길 수도 있겠다 싶다.
'야! 이씨*#($&@+...'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갖은 험한 말들이 언뜻언뜻 바람을 타고 들려온다. 적막 속에서 수화기를 든 정대리의 향기가 퍼져나간다. 한참을 듣고만 있던 정대리는 수화기를 타고 넘어오는 험한 말들이 사그라들자 간단하고 명료하게 사업 심의 담당자의 의견을 수화기에 담는다.
"지난주에 미비하다고 판단된 부분이 오늘까지도 보완이 안됐다면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또 한 번 건너편 수화기가 혼란스럽다.
"그럼 차장님께서 규정을 개정하시든지요. 저는 들어온 자료를 기반으로 사규에 근거해서 위원회를 열 뿐입니다. 결정은 제가 내리는 게 아니잖습니까. 정 그러시면 기조실장님, 미기연실장님이 보완 요청하신 사항이니까 직접 말씀드리시면 됩니다. 제가 뭘 하고 말 것도 없어요. 양식만 지켜서 자료 안 틀리게 제출해 주십쇼. 뭐 또 더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수화기를 통해 덜컥 끊기는 소리가 옆자리까지 들린다. 영 컨디션이 좋지 않은 맞은편의 최사원도 두 눈을 꿈뻑이며 힐끗거린다.
"아이씨, 낫살이나 처먹고 짧은 글 하나 제대로 못 써서 빠꾸 당하는 주제에 어디다 화풀이야."
심신이 지친 정대리가 끊어진 수화기를 들고 공중에 솔직한 여운을 흩뿌린다. 그 순간 정대리의 몸이 움찔하더니 10초 정도 미동도 없이 굳었다가 돌아온다. 두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집중하는 모양새다. 이명이다. 강사원은 저 정도면 상태가 심각한 거 아닌가 싶다.
"야! 아무것도 모르는 새*들이! 사업 부서가 사업을 하게 해줘야 할 거 아니야!"
화를 이기지 못해 친히 달려온 영업처 한차장 뒤에는 멋쩍어 정대리와 눈도 못 마주치는 이대리가 뻘쭘하게 서있다. 이대리는 아마도 한차장의 불같은 성격 뒤에 숨어있는 천재성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공자 붙은 곳이 으레 그렇듯 액세스공사에도 루팡이 천지다. 하지만 한차장만큼은 언제나 번뜩이는 지혜로 안을 내고 솔선수범해 처를 이끌어 가고 있다. 이대리는 이 사람이 있어 영업처가 무시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왜 항상 좋은 안을 내놓고는 이런 식으로 말아먹는 걸까. 제아무리 이대리여도 그 부분에서만큼은 한차장이 부끄럽다.
"야, 정민이, 너, 꼬맹이는 됐고, 송보강이 어딨어! "
"과장님 여의도 가셨습니다."
"웃기고 앉았네, 그 새*가 무슨 여의도를 가, 맨날 술이나 퍼마시고 티에프실에 죽치고 앉아서 우리 죽일 궁리나 하는 새*야, 그거. 노동자의 적! 알아? 송보강이! 시*, 니들 오륙급들 왜 기본급 떨어졌는 줄 알아? 그 미친 새*가 인건비 *#($&@+..."
정대리는 이 놈이 그렇지, 짖어라 하며 자신의 울리는 귀에 집중한다. 이거 심상치가 않다. 귀만 울리는 줄 알았는데 이명이 올 때마다 뇌도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안구도 따끔거린다. 상사를 말리려 애쓰는 작고 하찮은 이대리가 시야의 여백에 언뜻언뜻 든다.
"거 왜 남의 집에 와서 난린고, 응?"
강사원과 최사원이 벌떡 일어선다. 예기치 못한 송과장의 등장에 공기가 멈춘다. 3년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가. 그날과 다른 점은 송과장이 등장했음에도 한차장의 화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너 이 새*, 아랫것들 똑바로 안 시키지! 한 놈은 삐딱대고 한 놈은 인사도 안 하고 고개 쳐들고 다니고!"
태연히 한차장을 지나 정대리의 책상을 향해 팔을 뻗던 송과장은 저 혼자 슬로모션이라도 걸린 듯 느릿느릿 뒤를 돌아본다. 한차장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순대 같은 시커먼 입술을 오물오물 뗀다.
"어떤 새*가 인사를 안 해? 누가? 얘가? 얘가?"
날카로운 눈으로 강사원과 최사원을 차례대로 손가락질하더니 한차장 쪽으로 얼굴을 들이미는 송과장이다.
"누가? 여기서 누가 인사 안했냐고, 응?"
"...너. 너부터 안 하잖아, ...새*야."
송과장은 화를 누그러뜨리며 말을 돌리는 한차장의 틈새를 파고든다.
"우리 한차장님이, 응? 여기 와서 차장 다니까 세상이 달라 보인다이? 응? 그때, 응? 공사 동기들 다 잡아먹고 너 혼자 단 거자네. 차장. 거 뭐 별 거라고 김본한테 빌붙어서 너만 하나 낼름 따먹은 거자네. 니가 다섯 다 잡아먹고, 응? 하이고오 총명하신 우리 후배니임?"
정적이 흐른다. 이전 기관에서 얽히고설킨 윗 양반들의 히스토리는 마치 괴담처럼 남아 때때마다 치고 들어온다. 4년 전, 액세스공사가 출범하며 ㅇㅇ공사의 경력직들이 대거 이동했다. 누구는 대리였다가 과장으로, 누구는 과장 그대로. 그렇게 직급이 얽힌 것까지는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부족했다. 새 회사에서 잘해보자는 마음이 훨씬 컸다. 하지만 일 년 후 승진 인사에서 문제가 생겼다. 당시 대세였던 영업에서 대거 승진이 발생한 것이다. 대리에서 과장으로 한 직급을 높여 이직한 한차장 같은 사람들이 일 년 만에 차장이 된 것이다. 송과장은 이전 기관에서부터 과장이었다. 불과 1년 남짓한 시간에 부하가 상사가 됐다. 누군가가 직급이 두 개 오르는 동안 누구는 그대로. 이것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 ㅇㅇ공사와는 다른 유연한 회사를 만들겠다던 그들의 결심은 산산조각이 났고 이전 기관에서의 응어리에 새로운 앙금을 보태 서로 날을 세우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저쪽 공사는 말이야, 그래도 규칙은 있었거든.'
'저쪽 공사랑 달리 우리는 공정하잖아.'
이직과 동시에 찬밥 신세가 된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이전 기관을 찬양한다. 이직이 신의 한 수였던 사람들은 그 반대다. 두 파로 나뉜 상사들 밑에서 정대리나 이대리 같은 희생자들은 나오게 마련이다. 오륙급 사원들은 수시로 상사들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그들의 관계성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말뽄새 봐라. 송과장, 아니, 하늘 같으신 우리 선배님. 송보강씨! 새 사장 오면 봅시다. 전략이 그때도 전략일 것 같아?"
"됐고. 그러니까 누가 인사 안 했냐고? 응? 혼구녕 내줄테니까."
"됐어, 새*야. 위아래도 없는 새*가."
영업처 이대리는 칼을 품고 뒤돌아서는 한차장을 따라 가만히 돌아서서 멀어져 간다. 송과장은 싸움터를 정돈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전략처 꼬마들 쪽으로 돌아선다.
"아아, 일들허고. 응? 국회 들어가야 되는데 순댓국 튀어서 옷 갈아입으러 왔어. 유비니 저... 꼴 봐라. 응? 뭐 얼마나 마셨다고."
'치익'
'?!'
윗분들의 해묵은 원한 싸움에 휘말려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정대리의 새 향수가 송과장의 양복에 도포된다. 정대리는 바삐 이동하는 송과장의 뒷모습을 쏘아보며 또다시 10초간 눈을 감고 돌이 굳은 듯 멈췄다가 두 눈을 꿈뻑인다.
'얘도 버려야겠네.'
감사실 이주임이 지켜준 새 향수에 대한 애정은 둔감함이라는 대처 불가능한 무기를 가진 송과장 앞에서 재가 되어 으스러져버렸다. 사심위에 대한 의욕도 향수에 대한 의욕도 전소된 정대리는 그간 미뤄뒀던 신임 사장 업무보고를 잡는다. 업무로 힘들 때면 다른 업무를 잡는 정대리다. 서울대 합격자의 공부법에서 자주 나오는 바로 그것이다. '수학이 힘들면 영어를 잡아요.' 그 말대로다. 액세스공사의 모범생인 정대리는 사심위가 힘들면 업무 보고를 잡는다. 현 사장은 버티기에 들어갔고 새 사장은 후보자들만 잔뜩 거론되는 중이라 기존 보고를 갈아 쓸 수도 없다. 당장 첫 장의 통계치부터 문제다. 업무 보고의 시작은 언제나 부임 직전달의 최신 통계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정사원은 옆자리 강사원에게 말을 건다.
"사장님 버티기가 더 길어지려나 봐요."
"아, 네 어제 9시 뉴스 봤어요."
"아침에 액세스 뉴스 온 거 보니까 새 사장 후보자 전부 국토부 기조실 출신이더라고요. 빡빡해지겠네. "
"그러게요. 아직 확정은 아니죠?"
"네, 그래도 둘셋 정도로 추려진 것 같아요.'
"곧 결정되겠네요."
"5년 전인가... 저쪽 공사 사장하던 사람 있잖아요. 그 사람도 말 나오더라고요. 그 양반이 오면 전처럼 영업 중심으로 재편될 테니까. 전략이 이렇게 눈에 띄지도 않을 거고. 저는 차라리 그 사람이 왔으면 좋겠어요."
강사원이 잠시 말을 멈춘다. 정대리는 순간의 정적을 감지하고 강사원을 약간 의식하며 업무 보고를 훑어내린다. 화살표를 연타했다가 꾹 누르고를 반복한다. 전체를 훑고는 ctrl+스크롤로 보고서의 윤곽을 확인한 순간 정대리의 잠든 두뇌가 깨어난다.
"어? 잠깐만. 미리님 그때 그쪽 공사 있지 않았어요?"
"아, ...네."
강사원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사정없이 꼬인 전화선을 응시하며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가 거둔다. 맞은편 최사원도 위장을 부여잡은 채로 파티션 너머로 귀를 기울인다.
"어머, 잘됐다. 어떤 분이세요? 막가파라면서요. 영업 출신이라던데? 파격적이라던데?"
"저는 그때 2년차였어서 사장님이 어떤 분인지까지는 잘 몰라요."
"그래도 뭐 기본 성품이나 일하는 방식 같은 거라도. 지금 우리 양반처럼 막 숫자도 못 알아보고 그러진 않으시죠? 그래도 이 바닥에서 수십 년 구른 양반인데."
"숫자는 잘 보신다더라고요. 공단이랑 친분도 있으시고. 아, 행정고시 출신이세요."
"아... 하, 또 고시 출신이야? 아효, 기대를 말아야지 하면서도..."
정대리는 입사 후 거쳐간 모든 사장들이 고시 출신이었음을 떠올리고는 촛농에 잠식된 촛불이 꺼지듯 쉬이 기대를 접는다. 정대리는 맞은편 대각선에서 묘한 자세로 파티션 쪽에 귀를 붙이고는 이쪽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최사원을 감지했다.
"악, 유빈님 미안해요, 너무 우리끼리 말했죠. 거긴 자리가 옆이 아니라서... 자꾸 이러네. 거기 원래 재무가 쓰던 자리거든요."
"아뇨, 괜찮아요. 근데 우리 사장님 바뀐대요?"
"네. 퇴진 말 나온 건 두 달 전인데 잘 버티고 계시네요."
"새 사장님 금방 오신대요?"
"네네, 곧 오실 것 같아요. 요즘 뉴스에도 많이 나오잖아요."
'아, 뉴스를 봐야 하는구나.'
최사원은 씻고 자기에 바빴던 스스로를 원망한다. 이 사람들은 나보다 야근도 많았던 것 같은데 이런 정보들을 대체 어디서 얻는 건지 신기할 따름이다.
"저도 뉴스 꼬박꼬박 챙겨 봐야겠어요. 뉴스 길어서 싫어하는데... ."
"액세스 뉴스 보시면 되잖아요."
"액..세스 뉴스요?"
정대리는 최사원의 반응이 의아하다. 아무리 신입이라지만 출근해서 메일은 확인할 텐데. 매일 이른 새벽 홍보실 사원들이 감긴 눈으로 출근해 피와 땀을 담아 보내주는 액세스공사의 뉴스 소식지인 액세스 뉴스를 모를 수도 있나?
"유빈님. 혹시... 메일 안 봐요?"
2019년 11월 20일 수요일 맑음
<영업처 이대리> 전략뽕
하, 송과장. 직제 우위 어쩌고 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콤플렉스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이번 승진 인사에 차장 달면 가관이겠어... 육휴 가신 쏭과장님도 복직하신다는데 설마 쏭이 내 위로는 안 오겠지? 나도 이제 4급 달아야 되는데 또 육휴자한테 티오 잡아 먹히는 건가. 송이 승진하면 과장 티오 비니까 쏭이 저쪽으로 가면 되지 않나? 뭐, 차장님도 생각이 있으시겠지. 이번에도 누락이면 나 진짜 이직한다.
<전략처 정대리> ...
메니에르면 이비인후과, 뇌나 심장이면... 큰 병원. 헛, 공황도 같은 증상이라고? 일단 이비인후과부터 가보자. 연차 쓴다 그러면 또 지*하겠지? 토요 진료가 선릉에 하나, 삼성에 두 개.
<전략처 최사원> 하, 시* 돌겠다
대리님도 미리 누나도 어떻게 저렇게 멀쩡할 수가 있는 거지? 분명히 같이 마셨는데. 과장님 술 마시면 개 된다고 소문이 파다한 걸 나만 몰랐다. 그래도 아이스크림 사주시면서 나는 다르다고, 나는 끝까지 데려갈 거라고, 살다 보니 서울대생이 내 밑에 왔다며 뿌듯해하셨으니까. 인간적인 면모도 분명 있다. 흡연실 따라가는 건 좀 싫지만 거기서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얻으니 안 갈 수도 없다. 쏭과장이라는 사람이 복귀한다는데 소문에는 우리 쪽으로 온다고 한다. 과장님이 불편해하시는데 괜찮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