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 뭐 대단한 거라고 아직도 같이 하고 앉았어, 이번 주부터 혼자 하고. 응?"
회의 자료 취합에 정신없는 정대리와 최사원 사이에 송과장의 결단이 작두처럼 내리 꽂힌다. 송과장은 매주 목, 금이면 언제나 정대리 옆에 찰싹 붙어 진을 치는 최사원 때문에 덥다. 속이 답답하고 화가 솟구친다. 입사한 지 한 달이다. 이미 회의를 세 번이나 진행했는데 왜 아직도 때마다 정대리를 찾아오는 건지 도통 이해가 안 된다.
"거기, 자리로 가고. 정대리도 싹 다 넘겨. 너 꺼해 너 꺼. 사심위만 봐도 시간 없자네?"
주섬주섬 종이 몇 장을 챙겨 자리로 돌아가는 최사원의 뒤통수가 애처롭다. 정대리는 차라리 잘됐다 싶다. 너무 오래 도와줘도 일을 배우지 못한다. 첫 주는 거의 정대리 혼자 진행했고, 그다음 주에는 약간의 분담이 있었다. 자료와 회의실 준비를 동시에 진행해야 하는 일의 특성상 몸이 익숙해져야 시간 안배가 된다. 이번 주부터는 홀로 설 때도 된 것이다.
"그럼 유빈님 혼자 진행해보시고요. 모르는 건 물어봐주세요. 보니까 자료 수정은 잘하고 계세요."
"넵."
자료 수정을 잘하고 있다는 말해 용기를 얻은 최사원은 혼자 한 번 해보자고 각오를 다진다. 이제 영업처 자료만 들어오면 된다. 수요일부터 정대리를 물고 늘어져 꼼꼼히 작성해둔 전략처 자료는 진작에 톡으로 강처장의 컨펌을 받았다. 이제 남은 건 회의실 세팅 정도다. 퇴근이 가까워질수록 회의실 세팅을 항한 최사원의 열망이 들끓는다.
"난 간다이, 정대리 결과 보고 마무리 잘하고. 응? 유빈이 회의 잘해보고. 응?"
모처럼 술보다 퇴근을 선택한 송과장이다. 최사원은 송과장의 뒷모습이 사라지기 무섭게 회의실로 향한다. 송과장과 최사원의 등이 오버랩될 정도의 근소한 시간차였다. 회의실 문이 열린다. 또 하나의 새로운 배치가 최사원을 반긴다. 기술처와 시설처의 합동 회의는 이런 참신한 배치를 하는구나 생각하며 회의용 데스크를 정위치로 옮긴다. 회의실 뒤로 밀어붙인 잔여 데스크를 빼내고 나니 팔에 끈적이는 무언가가 붙어 딸려온다.
'뭐야 이거?'
먹다 남은 곡물바가 옷소매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넥타이가 언제 흘렸는지 모를 반쯤 굳은 라면 국물을 쓸었다. 배치를 시작하자마자 만신창이가 된 최사원은 더러워진 넥타이를 풀어 데스크 서랍에 넣고 심호흡을 한다. 양 팔을 걷어붙이고 디귿자 형태로 배치한다. 다과를 올리고, 펜접시와 독서대를 설치한다.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연결한다. 지난 3주 간의 경험이 생각보다 큰 것이었다. 눈과 몸이 기억하는 대로 움직이자 회의실이 완성되어간다. 걱정했던 마이크 연결도 쉽사리 해결했다. 첫날 멀티탭의 위치와 선의 순서를 봐 두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최사원이다. 이제 마이크 테스트만 하면 된다. 하단의 버튼을 누르면 동그랗게 빨간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응?'
'틱, 틱, 틱...' 마이크의 버튼을 연타하는 절실한 손놀림에도 야속한 불빛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식은땀이 흐른다. 이 땀은 아마도 단시간에 스무 개가 넘는 데스크를 배치한 탓일 것이다. 귀가 빨개진다. 이 홍조는 아마도 팔에 묻은 음식물의 흔적이 불쾌한 탓이다. 검지에 경련이 올 때까지 스무 개의 마이크를 돌아가며 테스트한다. 단 하나의 마이크도 작동하지 않는다. 휘황찬란하게 회의실을 비추는 조명이 무색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애꿎은 에어컨을 가동해본다. 뼛속까지 시원하다. 마이크 버튼을 눌러본다. 작동하지 않는다. 빔프로젝터를 켜본다. 사이키 조명 같은 형광 백색 불빛이 뿜어져 나온다. 마이크를 눌러본다. 작동하지 않는다. 슬라이드를 내려본다. 스르륵 스무스하게 내려오는 슬라이드의 사전 테스트를 얼떨결에 마친다. 마이크를 눌러본다. 작동하지 않는다.
'와, 씨, 미치겠네.'
분명 하나의 멀티탭에 스무 개의 마이크를 셋으로 나눠 곧게 연결했었다. 찍어둔 동영상을 빨리 돌려가며 회의실 세팅 과정을 살펴본다.
'뭘 이렇게 길게 찍었대?'
떨리는 엄지 손가락을 혹사시켜 멀티탭과 선을 연결하는 장면을 찾는다. 아, 여기다. 무선마이크 옆 멀티탭이 보인다. 저걸 꺼내 연결했었다. 최사원은 틀리지 않았다. 혹시 전기 공사를 하나? 그런 알림 메일은 없었는데. 잠깐, 지금 몇 시지? 붉은 전자시계는 20시를 향하고 있다. 최사원은 정대리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싹 다 혼자 하라던 송과장의 짜증 섞인 표정이 마음에 걸린다.
'일단 회의 자료 들어왔나 보고 월요일 아침에 시설처에 전화해서 전력 공급에 문제라도 있는지 확인하자.'
어떻게든 혼자 해결하고 싶은 늠름한 최사원은 당면한 문제를 잠시 미루어두고 자리로 돌아와 메일을 확인한다. 영업처의 자료가 웬일로 벌써 들어와 있다. 오늘 야근으로 회의 자료 인쇄와 제본을 마치면 이번 주에는 일요일에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전기 문제는 월요일 아침에 해결하면 된다. 일요 출근이 없다고 생각하니 묘하게 기분이 좋다.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는 최사원의 파티션을 타고 작고 상냥한 목소리가 넘어온다.
"뭐 도와드릴 거 없어요? 저 퇴근할 건데."
"아, 없습니다. 어서 들어가십쇼."
최사원은 모처럼 일찍 퇴근하는 정대리를 굳이 잡아 세우고 싶지 않다. 미리 누나 말대로 회의는 내 꺼다. 이제는 혼자 해내야만 한다. 아무도 없는 금요일 사무실에 혼자 남아 편안하다. 구두를 벗어 가부좌를 틀고는 한껏 흐트러진 자세로 모니터를 쏘아본다.
'9시 전에 마치자.'
입사 한 달만에 제법 사회인다운 각오가 나오기 시작한다. 영업처의 회의 자료를 끼워 넣고 줄간을 조정하는 사이 힐끗 시계를 쳐다본다. 검붉은 각진 글씨가 어느덧 21시를 가리킨다.
'9시는 무리고, 10시 전에 들어가자.'
새로운 각오를 다진 순간,
'파밧!'
사무실의 빛이 일순간 사라지며 암전 상태가 된다. 한 줄기 빛도 없는 밤의 사무실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두웠다. 아까는 마이크가 안되더니, 분명 전력 공급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제본은 월요일에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인쇄를 마친 회의 자료들을 한쪽에 모아둔 최사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노트북을 덮고 짐을 챙겨 아쉬운 발걸음을 옮긴다. 입사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사회인다운 퇴장에 약간 뿌듯하다. 다가올 바쁜 월요일 아침도 언젠가 한 번은 겪어야 할 터다. 마음 한구석에 남은 갑갑함 정도는 떨쳐버리자. 그렇게 생각한 최사원은 지치고 찌든 멋진 스스로에게 예기치 못한 퇴근을 선물하기로 한다.
그를 태운 엘리베이터가 1층에 다다를 무렵 야근 당번인 IT처 홍과장이 구석 소파에서 잠을 청하다 주섬주섬 일어선다. 어둠을 헤치고 미지의 짐승 한 마리가 어슬렁 일어서더니 전략처 쪽을 바라보며 구태여 잠긴 목소리를 내어 도움을 요청해 본다.
"저기요오? 정민씨이? 여기 사람 있어요오."
대답이 없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홍과장은 익숙지 않은 발놀림으로 한쪽 슬리퍼를 찾아 겨우 신고는 소파를 더듬어 핸드폰을 켠다. 손전등에 의지해 슬리퍼 신은 발과 맨발을 교차로 비추며 전략처쪽 스위치가 정렬한 기둥을 찾아 나선다.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다가갈수록 음산한 기운이 점점 더 강해진다.
'뭐지? 정대리도 퇴근했나?'
밤 9시부터 한 시간 단위로 불이 꺼지는 건물 사정을 잘 아는 홍과장이다. 그동안은 스위치와 가까운 곳에 앉은 정대리의 재빠른 움직임 덕분에 이런 재난 상황에 굳이 대처할 필요가 없었다. 격한 어둠을 한 발씩 극복해나가며 정대리의 공석을 아쉬워해본다. 용무가 있는 기둥이 눈에 들자 병이라도 옮는 듯 멀찌감치 서서 손가락 끝으로 타다닥 스위치를 누르고는 한 명도 없는 어색한 전략처를 한 번 스윽 둘러보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한 표정으로 몸을 돌린다. 역시 사무실 오른쪽으로는 오는 게 아니다. 서늘한 기운이 기분 나쁘다.
"에이씨, 이놈의 절전 캠페인은 언제쯤 그만하려나."
2019년 11월 22일 금요일 맑음
<전략처 정대리> 잘 가라 거대한 똥
과장님이 결단을 내린 덕에 오늘로써 회의 분장이 완전히 넘어갔다. 내심 불안했는데 유빈님이 회의 자료 수정도 잘하시고 인쇄도 척척 하신다. 타부서와 마찰이 좀 있어서 그렇지 일 자체의 허들은 확실히 낮은 편이다. 세 번 정도 옆에서 보면 다 할 수 있는 일. 쉬운데 과정이 힘들고, 티 안 나고. 이 더러운 일이 이렇게 넘어가는구나. 다른 똥을 안고 있긴 하지만 큰 똥 하나 넘어가니 시원하다.
<전략처 강사원> 휴일 루틴
0800-0900 아침, 택배정리
0900-1000 약처방
1000-1200 PT
1200-1400 점심, 인강
1400-1500 아로마테라피
1500-1700 낮잠
1700-1800 저녁, 베이킹
1800~ 휴식, 만화책읽기, 리보트릴1정, 취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