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빈의 4대 비극(전편)

2019년 11월 25일 오전

by 선량한해달

비극 하나 08:00

"이제 와서 뭘 물어봐, 넌 그냥 처장님하고 일하든지, 응? 별동대처럼 혼자 막, 응? 멋지다잉?"


최사원은 새로운 마음으로 출근한 월요일 아침부터 예상치 못한 분노를 마주한다. 시설처의 출근이 늦어 회의실 전력 공급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뜻밖의 송과장의 울화에 어안이 벙벙하다. 송과장은 자신이 본 적 없는 회의 자료가 버젓이 인쇄되어 데스크에 올라와 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지난주에 톡으로 처장님께 컨펌받았는데요?"


최사원의 악의 없는 한 마디가 송과장의 불난 마음에 고량주를 들이붓고야 말았다. 송과장의 기질을 일찌감치 알아차린 정대리는 3년 간 단 한 번도 송과장을 건너뛴 적이 없다. 옆자리 동료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그는 비록 강처장에게 깨질지라도 송과장의 컨펌을 받고 일을 진행해왔다. 하지만 최사원은 다르다. 효율을 중시하는 이 신입사원은 처장의 컨펌을 받은 회의 자료에 토를 다는 송과장을 이해할 수 없다. 두 손 모은 자세로 혼나고는 있지만 진심으로 혼날 마음은 추호도 없다.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괜한 성을 내는 눈앞의 중년이 나보다 어리니 봐주기로 한다. 더럽지만 내 상사이니 눈 감아주기로 한다. 최사원의 머릿속은 아직 설치가 완료되지 않은 이십여 개의 마이크로 가득 차있을 뿐이었다.



비극 둘 08:30

송과장 너머 저 멀리 시설처의 움직임에 시선를 고정하고 있었던 최사원은 5분 전부터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당장 전화를 걸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송과장이 제 분을 못 이겨 최사원의 한쪽 어깨를 툭 치고 담배를 피우러 나가자 곧장 몸을 틀어 시설처로 달려간다. 최사원은 지금 삐친 중년의 투정 따위 안중에 없다.


"저... 혹시 대강당 전기 안 들어와요?"

"네??"


시설처의 제일 끝에 앉아 있는 사원에게 달음질쳐 다가가 단도직입적으로 용건부터 따지고 묻는 최사원의 눈빛에 애탐이 서려있다. 긴박함이 엿보이긴 하나 무슨 일인지 당최 감을 잡을 수 없는 시설처 사원이 침착하게 되묻는다.


"무슨... 소리 신지?"

"아니, 그게, 오늘 회의해야 하는데 금요일부터 마이크 전원이 안 들어와서요."

"...그걸, 왜 저한테 물으시죠?"


최사원은 시설처에서 모르면 누가 아냐는 눈빛을 보내며 허리춤에 양손을 얻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깊은 한숨을 쉰다. 최사원의 태도에 감을 잡은 시설처 사원은 굴러다니는 옆 의자에 벗은 발을 올려 꼬고는 비스듬히 고개를 틀어 눈을 마주친다. 갑작스러운 신경전이다. 상대의 태도에 화가 치미는 건 최사원도 마찬가지였다.


"저기요, 너무 급해서 그런데 빨리 좀 봐주시면 안 될까요? 저희 30분 후에 회의 시작하거든요."

"그러니까. 왜. 나한테. 그걸. 묻냐고? 너 어디 누구야?"


시설처 사원은 삐딱한 자세로 서있는 최사원을 한심하다는 듯 곁눈질로 흘겨보며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어이, 강대리, 난데 여기 좀 와봐."


최사원은 강대리라는 사람이 회의실 전기를 볼 줄 아나 보다 싶다. 어차피 연결해 줄 거면서 상냥하게 좀 말해주지, 아니, 빨리 좀 연결해주지 굳이 이렇게 서로 기분 나쁠 필요가 있나 싶다. 그래도 아쉬운 내가 참아야지 생각하며 화를 억누른다. 한 손은 여전히 허리에 둔 채로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고개를 돌려 옆으로 큰 한숨을 내쉰다.


"차장님 무슨 일이세요?"

"아이고야, 미리 대리. 오랜만이네. 여기 이건 뭐냐? 이거 니 새끼냐?"


최사원은 헐레벌떡 달려온 미리 누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파악하려 애써본다. 저 멀리서 달려오는 정대리의 모습도 포착된다. 누가 차장이고 누가 대리란 말인가. 이윽고 전략처의 정대리 이하 3인이 이름 모를 사원의 부름에 한 자리에 모인다. 정대리와 강사원의 공손한 태도에 최사원도 슬그머니 손을 앞으로 모은다.


"얘가 나보고 강당에 전기 왜 안 들어오냐는데? 정민씨, 이게 무슨 일이야? 응?"

"죄송합니다, 차장님. 제 실숩니다."

"아니 무슨 실수가 이렇게 다각도로 기분이 더러워? 안 그래 강대리?"

"죄송합니다, 차장님."


정대리가 연신 허리를 숙여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동안 강사원이 최사원을 끌고 자리를 피한다. 기태림 차장은 저게 그 유명한 싹수없는 신입이구나 생각하며 끝까지 억울한 눈빛으로 끌려가는 뒷모습을 쫓는다. 끊임없이 사과하는 정대리가 안쓰러워진다.


"에효, 저런 게 들어와서 민이가 고생하겠다. 나 일부러 그랬어. 미안해, 알지?"

"차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저거 싸가지가 저래서 어쩌냐? 강대리도 저런 걸 달고 들어왔어 그래."

정대리는 기차장과의 대화 속에서 강사원이 이전 기관에서 대리였음을 알아차린다. 그보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사과하는 강사원의 모습을 보며 얼떨결에 같이 사과하긴 했지만 최사원이 무슨 짓을 한 건지 명확히 알지는 못한다. 혹시 최사원이 잘못한 게 없으면 어쩌지 싶기도 하지만 이 판에서 드물게 성품이 온화한 기차장님이 화내실 정도면 최사원이 잘못했을 게다.


"얼른 가봐요, 저거 혼자 회의하겠나? 마이크 안 들어온다는데."

"아, 네. 제가 나중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정대리는 오늘 회의가 순탄치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 왜 회의 시작 30분 전까지 나는 아무것도 보고받지 못했는가. 수많은 의문을 애써 지워내며 회의실에 당도한 정대리의 눈에 든 것은 두루마리 휴지를 손에 감고 데스크를 하염없이 닦고 있는 강사원과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 버튼을 두드려대는 최사원의 모습이었다.


"뭐야, 무슨 일이에요?"


최사원은 정대리의 질문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마이크에만 매달려 있다. 강사원이 대신 상황을 전달한다.


"대리님, 마이크가 안된답니다."


정대리는 한달음에 디귿자의 양끝에 놓인 마이크로 달려가 버튼을 눌러본다. 먹통이다. 분명 그럴싸한 모양새의 세팅이다. 정대리 본인이 배치하지 않았으니 무엇이 잘못된 건지 알 수가 없다.


"유빈님, 이게 무슨..."

"하아, 씨, 미치겠네!"


멘탈을 날려버린 지 오래인 최사원은 이번에도 정대리의 의문에 대꾸하지 않는다. 정대리 앞뒤를 휙휙 오가며 애꿎은 마이크를 툭툭 건드린다. 정대리는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아무 도움도 요청하지 않은 최사원을 이해할 수 없다. 회의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약 20분. 정대리는 머리를 고쳐 묶고는 한 손으로 데스크를 짚는다.


'질척'


"뭐야 이거?"


손에 묻어나는 끈적하고 투명한 영문모를 무언가가 정대리의 심기를 어지럽힌다.


"대리님, 데스크는 제가 다 닦겠습니다. 20분이면 충분해요."


그제야 두루마리 화장지를 손에 감고 연신 무언가를 훔쳐내던 강사원의 행동이 이해된다. 이 회의장은 겉보기만 그럴싸할 뿐 아무것도 안 되어 있다. 기본이 안 되어 있다. 정작 회의 담당인 최사원은 여전히 마이크에만 집착하고 있다. 화가 치민다.


"유빈님."


대꾸가 없다.


"유빈씨."

무시다. 분명히 들렸을 터다. 근거리에서 수차례 부르는 자기 이름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귀가. ...되게 안 좋으신가 봐."


최사원은 자신의 바로 뒤에 서서 포기한 듯 나지막이 속삭이는 정대리를 돌아볼 자신이 없다. 표정이 상상된다. 그보다 당장 회의를 진행해야 한다. 내가 담당자다. 이놈의 마이크는 왜 이리 말을 안 듣는지, 시설처는 왜 도와주지 않는지. 지금은 마이크에 집중하기로 한다. 귀는 닫는다. 어차피 한 번에 두 가지를 해낼 수는 없다. 우선은 눈앞의 업무인 회의에 집중하자. 아까는 과장이, 지금은 대리가 성화다. 이 지경이 된 것은 분명 내 잘못이지만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꼰대 짓을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생각한다. 그때였다. 정대리가 놀랄 만큼 가깝게 정면에서 얼굴을 들이민다. 하마터면 이마가 부딪칠 뻔했다.


'이 여자가 미쳤나?'


"설명하세요."

"하, 대리님 제가 나중에..."

"지금 설명하라고. 뭐. 마이크 뭐가 문젠데."

최사원의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너무 늦었다. 될 대로 되라지. 마이크를 향한 집착이 깨지자 주변이 보이기 시작한다. 땀을 뻘뻘 흘리며 데스크 하나하나를 닦아내고 있는 강사원이 눈에 들어온다. 부끄러워진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나 되려 침착해진 정대리가 눈에 들어온다. 어디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그게... 오늘 아침에 과장님이 회의 자료로 막, ...시설처에 전기 문제만 말하면, ....회의 자료는 이미 다 했으니까..."

"유빈씨, 마이크요. 마이크 뭐가 문제냐고요."


아, 이 사람도 마이크에 꽂혔구나. 하지만 회의실의 모든 콘센트를 바꿔가며 시도해봤다. 이 사람이라고 다를 건 없다. 최유빈, 정신 차리자. 우선은 보고다. 간단명료하게 사실만 전달하자. 부연 설명은 상대가 요구할 때 하자.


"회의실 전기가 먹통입니다."

"스크린은 잘 내려왔잖아요. 에어컨도 돌던데?"

"저도 그래서 아까 시설처에..."

"시설처가 무슨 전기 보는 덴 줄 알아요? 거기야 무슨 수리센터야? 그리고 아까 거긴 기술처고."

정대리는 대화가 안 통하는 최사원과 씨름하고 싶지 않다. 이건 전기 문제가 아니다. 최사원을 배제한다. 정대리의 시선이 마이크의 전선을 타고 이동한다. 십 수개의 전선이 정확히 세 다발로 나뉘어 있고 결과적으로는 하나의 멀티탭에서부터 갈라져 나와있다.


'저거다!'


멀뚱히 선 최사원을 등지고 쏜살같이 달려가 멀티탭에서 선을 분리한 정대리는 수납함을 열고 잠자고 있던 세 개의 멀티탭을 꺼낸다. 세 다발의 마이크 선을 분리하여 세 개의 멀티탭에 각각 나누어 꽂는다. 마이크를 테스트한다.


"아아, 마이크 테스틉니다."


정대리의 묵직한 중저음이 울려 퍼진다. 눈앞에서 벌어진 순식간의 변화에 큰 충격에 빠져 두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로 서지도 앉지도 못하고 있던 최사원은 갑자기 등장한 세 개의 멀티탭을 바라보며 그날의 기억을 되짚어본다.


'세 다발로 나눠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세 개의 멀티탭에..., 아, 세 개의 멀티탭!'


그때 갑자기 강한 명령조의 목소리가 최사원의 회상을 파고들어 으깨버린다.


"유빈씨! 뭐 하고 있어. 반대쪽부터!"


차례로 버튼이 눌린 마이크들이 빨간 불빛을 내뿜는다. 때마침 강사원의 화장지 걸레질도 끝이 난다.


"그럼 이제 된 거야? 다 한 거 맞아요?"

"...어, 어어..., 네."

"그럼 이제 PPT 체크하고 템포 맞춰서 잘 넘겨요. 오늘 과장님이 들어가시니까 실수하지 말고."


회의 시작 10분 전, 일찍 도착한 인사처장과 홍보실장이 입장하자 정대리와 강사원이 자연스럽게 퇴장한다. 최사원은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온 인사처장의 인기척도 느끼지 못한 채로 슬라이드 옆의 작은 책상에 앉아 떠난 영혼을 간신히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어이, 신입."

"아, 네?"

"그냥 앉던 데 앉으면 돼? 문에 배치도 없던데?"



비극 셋 09:30

"아니, 사업을 하게 해줘야 할 거 아닙니까!"


달아오르는 회의 분위기에 긴장감을 되찾은 최사원은 각 처의 발표 타이밍에 맞추어 슬라이드를 넘기는데 집중하고 있다. 영업처의 발의로 사업 심의에 대한 반발이 불거지자 장내가 술렁이며 각 처장들이 한 마디씩 거들기 시작한다. 사무실의 오른쪽과 왼쪽으로 갈라서서 대립하는 모양새가 새삼 어색하다. 최사원이 이 소요 사태를 눈앞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다. 정대리가 짊어진 사업심의위의 무게가 느껴진다.


"아무거나 다 합니까? 예산을 생각해야지!"

"아무거나? 아니 그쪽에서 하는 계약들은 중요하고 우리 쪽에서 하는 건 아무거나야?"

"그런 말이 아니잖습니까, 저기 막 들어온 막내한테 한 번 물어보십쇼. 누구 말이 맞나. 어이, 최유빈이!"


'!!'


수차례 위기의 순간을 맞는 최사원이다. 정대리였다면 이런 도발 정도는 또 시작이냐 하며 미동도 없이 넘겼을 테지만 이 애처로운 신입은 누군지도 모를 높으신 양반들께 돌아가며 지명을 받을 때마다 일일이 당혹스러운 기색을 드러내고 있다. 고개를 바짝 들고 버쩍 얼어 눈동자만 세차게 굴리는 최사원을 본 체 만 체 회의는 진행된다.


"그럼 어디 현장 의견 한 번 들어봅시다."


처장 대신 회의에 들어온 영업처 한차장이 능숙하게 현장으로 공을 넘긴다. 디귿자로 배치된 데스크 뒤, 의자만 나열된 2열로 발언권이 넘어간다. 각 처의 과장들과 현장 3본부 사업소의 장들이 앉아 있는 뒷열에서 어색한 웅성거림이 시작된다.


"마이크 누구한테 있어요? 돌려요."


두리번거리는 영업처 한차장의 한 마디에 등골이 오싹해진 최사원은 PPT를 조작하던 손을 멈춘다. 아침 난리통에 무언가 놓쳤음을 깨닫는다. 때마침 2열에 앉아있다 상황을 감지하고 최사원의 뒤로 쏜살같이 날아오른 송과장이 두 개의 무선 마이크를 급히 꺼내 현장 소장들에게 넘긴다. 현장의 발언이 이어지는 동안 최사원은 하얘진 머릿속에서 철학자가 되어 홀로 사색을 시작한다.


유선 마이크 연결이 유일한 실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무선 마이크는 아예 인지조차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모든 데스크를 닦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배치할 때 소매에 묻어났던 끈적임을 눈치챘음에도 말이다. 이제 혼자서 해야 한다는 송과장의 못된 주문에 걸려 선임에게 아무 보고도 없이 일을 진행한 것이 실수다. 오늘 아침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정대리에게 제 때 확인만 받았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최사원은 두렵다. 회의가 한창인 이제서야 두렵기 시작한다. 손마디가 떨린다. 이미 회의는 시작됐다. 내가 한 실수들이 얼마나 더 있을까? 얼마나 더 발각되는 걸까? 슬라이드를 넘기던 손이 멈추고 불안감에 휩싸인 최사원 옆으로 육중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뭐혀, 빨리 넘기고, 응? 이제 안전처여."



비극 넷 10:30

'빨리 끝나라..., 하.'


마지막 슬라이드다. 기술처의 PT가 시작됐다. 시간은 참으로 상대적이다. 회의실 밖에 있을 때는 쏜살같이 지나던 시간이 이렇게도 안 갈 줄이야. 나만 아는 아침의 소용돌이와 회의 중 발각된 작은 사고들을 딛고 일어선 최사원은 마지막 슬라이드를 띄워놓고 안심했다. 다행히도 다른 실수는 나오지 않았다. 타고난 기질이 윗사람인 그는 회의가 끝나면 아침의 추태를 함께한 정대리와 강사원에게 고마움을 표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회의 후 일정을 머릿속으로 짚어가 본다. 과장님은 오늘도 점심 메뉴로 투정을 부리겠지? 시설처 그 사람은 내가 가서 사과를 해야 하나? 아니면 받아야 하나? 아, 기술처랬나? 만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퍼져나간다.


정치의 희생양의 되어 당장 쫓겨날 판인 좌불안석 사장 역시 눈앞의 열정적인 PT는 안중에도 없다.


"아이고, 이 양반들아, 될 걸 해야지, 에휴."


사장에게 기술처의 미래 기술 발표는 큰 의미가 없다. 그보다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다. 퇴진 압박에 향후 거처를 마련하려 극한의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 연로한 몸이다. 버티기에 돌입한 지 두 달이 넘어가고 있다. 서둘러 맺음말을 흩뿌리는 사장의 손이 회의 시작 전 데스크 서랍에 넣어둔 넥타이를 찾는다. 사장은 쇠한 몸을 이끌고 회의 후 즉시 세종으로 이동했다 전주로 향해야 한다. 이 의미 없는 회의 시간만이라도 목을 죄어오는 넥타이는 접어두고 싶었다. 깊숙이 데스크의 서랍을 휘저은 사장의 손에 가여운 넥타이가 걸려든다.


"뭐어야 이거!"


사장의 손에 걸려든 넥타이는 뜻밖에도 두 개였다. 속세의 비위와는 단 한 점 연관도 없을 듯한 쪽빛 청렴한 넥타이, 그리고 검붉은 라면 국물과 찐득한 물엿이 물든 열정의 넥타이. 회의 후 일정을 짜맞추던 최사원은 지난주 분실한 자신의 넥타이에 들러붙은 사장의 넥타이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2019년 11월 25일 월요일 구름


<전략처 송과장> 저거 언제 인간 되려나

뭐, 오늘 일로 지도 식겁했겠지. 그렇게 당해봐야 진짜 일을 하는 거고. 나도 다아~ 그랬고. 근데 넥타이는 거기에 왜 쑤셔 넣어서 그 사단을 만들어 만들기는. 멍청한 놈. 처장님이 안 계셨으니 망정이지. 멍청하니 귀여운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드만 좀 모자란 놈인가? 아니, 서울대는 어떻게 갔대? 살곰살곰 처장님한테 다이렉트로 연락해대는 거 보면 또 영악한 것 같기도 하고. 요즘 애들은 알 수가 없단말여.


<전략처 정대리> 다 과장님 탓이다

왜 나한테들 난리야. 회의 담당 바뀐 지가 언젠데. 과장님 별 말 없으신 거 보면 회의는 잘 마무리된 것 같다. 과장님도 자기가 내뱉은 말 한마디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알아야 하는데... 하, 갑갑하네 진짜. 그래도 이번 주에 이 난리를 쳤으니 다음 주부터는 좀 낫겠지.


그나저나 미리 언니가 ㅇㅇ공사 대리...면 부서가 어디지? 합동 티에프에 있었다고 했으니까 기획? 전략? 영업? 기술? ...기술인가? 혹시 미리 언니도 스페셜리스트 아냐? 기차장님이 기술사셨던 거 같은데... 친한 거 보면 언니도 뭐 있나? '쯩' 있는데 여기 신입으로 온 거면 진짜 반칙이다, 그러지 말자. 아.. 회계사에 변호사에 이제 기술사까지 전략에 끼어드나...


<시설처 기차장> 왜 돌아왔지?

오랜만에 보니 반가운 건가, 아니면 징그러운 건가? 내 그렇게 이 판 떠나라고 말해줬는데 다시 돌아온 걸 보면 강대리도 참 갈 데가 없어. 요즘 젊은 애들 힘들다더니... 강처장이 그때 어디였지? 기획이었나, 영업이었나. 성격만 보면 강대리랑 극인데 쟤는 왜 하필 또 저길 갔대 그래. 나도 난데 저기도 인생 참 꼬인다 꼬여. 우리 막내놈 한전 간다는데 그 자리 비면 강대리는 내가 데려와야겠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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