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빈의 4대 비극(후편)

2019년 11월 25일 오후

by 선량한해달

"저 놈이 최사화야?"


점심시간이 끝나자 아침 회의 전 기술처에서의 마찰과 관련된 소문이 19층을 덮는다. '저 시커먼 놈?, 시설처장한테 반말했다며?, 아냐, 기술처 차장이라는데?, 신입이 전략뽕이 찼다더라고, 유학파라 한국 예절을 모른다던데?, 정대리도 버렸대.'


'인사 안 하는 신입'이라는 타이틀은 처장에게 반말한 유학파 최씨가 일으킨 만행, 즉 '최사화'로 바뀌었다. 정대리는 뒤틀리고 과장된 소문에 어이가 없었지만 소문이란 으레 그런 것이다. 애초에 빌미를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도 누가 누구랑 사귄다더라 같은 흔한 소문에 비하면 참신하기 그지없는 소문 아닌가. 굳이 따지자면 '인사 안 하는 신입'보다는 '최사화'라는 타이틀이 더 마음에 드는 정대리다.


송과장의 출장으로 오후의 어린이날이 시작된다. 정대리는 강사원에게 자리를 지켜줄 것을 당부하고 최사원을 소회의실로 부른다. 아무리 최사원이라도 오늘 일어난 크고 작은 사고에는 풀이 죽을 수밖에 없다. 어두운 낯빛으로 정대리의 부름에 따라나선 최사원의 굽은 등이 물 먹은 스펀지처럼 무거워 보인다. 무겁고 걸쭉한 액체가 흘러내리는 듯한 음습한 기운을 풍기며 마지못해 소회의실로 빨려 들어가는 불쌍한 인생이다.


"고생했어요. 쉽지가 않죠?"

"... ."


최사원은 정대리를 똑바로 바라보기 어렵다. 죄송합니다라는 말 한마디를 위해 입을 떼기도 버겁다. 부끄럽고 비참해서 얼굴이 달아오른다. 이 사람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무선마이크 설치를 잊은 걸 알고 있을까? 슬라이드의 타이밍이 수차례 늦거나 빨랐던 건? 혹시 사장님의 넥타이를 망친 사실까지 알고 있나? 회의 중 자신이 일으킨 실수들을 복기하며 하나하나 변명을 해야 할지, 무조건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여야 할지 내적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 최사원이었다.


"유빈씨, 공단이랑 우리 회사 관계 알아요?"

"...네?"


뜻밖의 질문에 이윽고 고개를 든 최사원은 영문 모를 눈으로 정대리를 바라본다.


'어라? 아무것도 모르나?'


몇 초정도 오디오가 빈다. 최사원은 필사적으로 덜그럭거리는 뇌를 작동시켜본다. 오늘 아침 대리님은 회의에 들어오지 않았다. 들어왔던 건 과장님이다. 그 사람은 지금 자리에 없고, 말을 전할 새도 없이 출장길에 올랐다. 고로 눈앞의 이 사람은 내 실수를 알지 못한다. 최사원은 얼굴에 번졌던 열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본체가 차분해지자 뇌도 정상 작동하기 시작한다. 지금 대리님은 나를 질책하려는 것이 아니라 업무적 회의를 진행하는 중이다. 이 결론은 최사원에게 평상시의 적극성을 되찾아주었다.


"공단이요?"

"공단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죠?"

"공단...도 공기업... 이잖아요. 우리랑 다른 분야... 라고 해야 되나? 분야는 같은데 좀 더 카테고리가 넓은 곳이라는 느낌이에요. 인기도 많고. 흐흐."

"맞아요. 공단은 기반 시설을 관리하죠. 그래서 더 넓은 범위라는 느낌이 있는 거고요. 하지만 제가 물어본 건 우리 회사, 그러니까 '액세스공사와 공단의 관계'예요."


최사원은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다. 공자 붙은 곳들이야 다 공생 관계일 건 뻔하다. 이제 막 입사한 신입사원에게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걸까? 최사원은 윗사람이랍시고 무게 잡으며 크게 크게 질문하는 사람들이 싫었다. 그리고 그러지 않을 것 같았던 정대리마저 그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 약간의 실망감을 느끼고 있다.


"잘 모르겠습니다."


최사원 답지 않은 깔끔한 대답이다. 정대리는 강사원에게서 느꼈던 시원시원함과 같은 종류의 청량감을 한 달만에 최사원에게서 느낀다.


"공단은 뭘로 먹고 살까요?"

"네?"

"우리는 차를 굴리잖아요. 운임을 받고요. 공단은 시설만으로 어떻게 돈을 벌까요?"

"... . 시설을 빌려주겠죠? 렌트비 받고요."

"맞아요. 그걸 '이용료'라고 해요. '사용료'라고도 하고요."

"아... 네, 그렇겠죠."


'뭐지? 혹시 이 여자 내가 이용료라는 단어를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가?'

최사원은 하찮은 지식을 풀어놓는 정대리의 의도를 알 수 없다. 나를 바보로 보나 싶다가도 설마 그건 아니겠지 싶어 동그란 눈으로 정대리를 한 번 보고 애먼 천장을 한 번 보고를 반복한다. 사정없이 구르는 최사원의 눈동자를 감지한 정대리는 곧 말을 이어간다.


"우리 수익의 몇 퍼센트 정도를 이용료로 낼 것 같아요?"

"한... 10, 20프로요?"

"50프로."

'헐!'


최사원은 이용료에 대해 자신이 몰랐던 부분이 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여전히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정대리의 의도는 알 수 없다.


"이것도 협의해서 내린 거예요. 처장님이 재무 쪽이랑 대외 협의 다니시느라 거의 사무실에 안 계시잖아요. 이용료 때문이에요."

"와 씨, 50이면 엄청나네요 수익의 반을..."

"그럼 저쪽 공사는 얼마나 낼까요?"

"네? ㅇㅇ공사요?"

"30프로."

"뭐가요? ㅇㅇ공사가요?"

"네, 거긴 같은 시설을 이용하면서 30퍼센트를 이용료로 내요."

"그러니까..."


갑자기 튀어나온 ㅇㅇ공사 얘기에 머릿속이 복잡해진 최사원은 부족한 배경 지식을 탓하며 억지로 이해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리님 말씀은... 우리가 이용료를 훨씬 많이 낸다... 라는 거죠?"

"네."

"죄송해요. 제가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그게 왜 중요한가요?"

"이 업계에서 우리 회사의 입지를 잘 보여주니까요. 우리는 어떻게든 이용료를 내려야 살아요."

"대리님, 거긴 워낙 오래된 회사잖아요. 우리 같은 건 경쟁사로도 생각..."

"안 하죠. 잡아먹으려고 하지."

"네?"

"잡아먹으려고 한다고요. 자립 못 하면 먹혀요 우리. 거기 가서 셋방살이 해야지."

"아... ."


최사원은 그제야 액세스공사 사람의 입장에서 주변 환경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돌이켜보면 신입사원 도입 연수 때부터 이따금씩 ㅇㅇ공사 얘기가 나오곤 했었다. 업계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액세스공사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회사 사람들이 이쪽 공사 저쪽 공사라 부르는 것에도 이제 막 익숙해진 참이다.


최사원은 그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바꾸고 싶었다. 작은 모니터 속 세상에서 빠져나오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시기에 우연히 채용이 눈에 들었다. 업계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저쪽 공사 출신들이 많은 회사다. 일찌감치 분위기를 감지했어야 했다. 동기들도 ㅇㅇ공사 이야기를 자주 한다. 심지어 회사 내부는 두 기관의 통합파와 반통합파로 나뉘어 있다. 조금만 관심을 가졌어도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 그럼... 처장님이랑 과장님이 밖으로 다니시는 게..."

"살려고 그러시는 거예요. 그분들은 저쪽 공사 출신이시라 개인적인 앙금까지 있으니 말 다했죠."

"그럼 전략처에서 하는 일이..."

"액세스공사가 액세스공사로 존속하도록 하는 것."

"회사가 돈을 잘 벌어야... 아니, 덜 뜯겨야 살아남는다."

"바로 그거예요."


최사원은 빙빙 돌려 말하는 정대리의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의중을 파악한 것에 만족했다. 아침 회의 일로 긴장한 탓에 정대리와의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을 뿐 중요한 사실은 인지했다. 그럼 일단 나가서 회의 결과 보고를 작성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A사, B사, C사도 같은 시설을 이용하고 40프로만 내요. 기가 막히죠?"

"아..., 네."


'아직 안 끝났어?'


정대리는 뜻 모를 안도의 표정을 보이는 최사원의 집중력이 흐트러지자 심기가 불편하다. 이쪽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자립해서 먹고 살까요?"

"이용료를 내려야...죠?"

"그런 거 말고. 궁극적으로요."

또다. 또다시 의미불명의 큰 질문이 치고 들어온다. 작은 한숨과 함께 최사원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진다.


"힘들어요?"

"네?"

"이런 말 나도 하기 힘들어요."

"...네?"

"우리는 궁극적으로 기반 시설을 가져와야 해요. 자립해서 먹고살려면."

"아..., 네? 아. 네... 네."

힘주어 말하는 정대리의 매서운 눈이 말아 올린 최사원의 소매 끝을 향한다. 최사원은 저도 모르게 그 서늘한 눈빛을 따라 자신의 소매를 한 번 보고는 어색을 감출 수 없어 팔을 데스크 아래로 감췄다.


"전기. 소방. 구조."

난데없이 어색한 공기를 가로지르는 짧은 단어들이 차갑다.


"네?"


우리가 시설을 가지려면 그쪽 스페셜리스트들이 있어야 돼요. 우리 쪽에 회계사, 변호사가 있다면 저쪽에는 기술사들이 있어요.


"...네?"


당황한 최사원은 정대리와 잠시 눈이 마주친다. 아프다. 눈빛이 아파 차마 마주 볼 수가 없다. 영문을 모르겠다. 고개를 살짝 숙인 상태로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이며 지금 이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필사적으로 알아내려 노력한다.


"기술처와 시설처는 기술사들이 모여있는 부섭니다."

'!'


예상치 못한 이야기 전개에 최사원의 고개가 들린다. 난사 중인 정대리의 눈빛을 아로 받아가며 멍한 입을 하고서 정면을 바라본다. 정대리는 그 모습이 흡사 송과장 같아 기분이 상한다. 기분이 상한 김에 그대로 말을 이어간다.


"거기가 회의실 콘센트 보는 부서가 아니란 말이죠."


이제야 모든 것이 맞아 들어간다. 조금 전까지 최사원이 파악한 정대리의 의중은 페이크였다. 지금 하는 말이 진짜다. 최사원은 언제부터인가 풀어진 자세를 다잡는다. 애초부터 긴장을 풀지 말았어야 했다. 오늘은 누가 봐도 사고친 날인데 너무 안일했다. 사람을 꿰뚫는 데에는 정대리가 한 수 위다.


"사무실이 좌우로 나눠져 있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우리가 더 잘났나요? 다 똑같아요."

"... ."

"영업처 가서 전략처는 막내가 차과장 상대하는 거라고 그랬어요?"

"...아, 회의 자료 안 주셔서 달라고..."

"우리 회식 때 윗분들이 힘내라고 내뱉는 자위적인 말들을 다른 처에 가서 그대로 하면 될까요?"

"... .죄송합니다."

"감사실 분한테 일부러 인사 안 하고 그러세요?"

"...!, 아... 그건 제가... 비선 줄 알고..."

"그럼 제가 비서 발령 나면 저한테도 인사 안 하시겠네요?"

"아닙니다."


"혹시 유빈씨 인사처분 인쇄하는데 그 앞에서..."

"혹시 유빈씨 현장 동기들한테 우리 일..."

"혹시 유빈씨 송과장님 건너뛰고..."

"혹시 유빈씨..."


끊임없이 이어지는 지난날의 과오를 들으며 최사원은 그저 샌드백이 되기로 결심했다. 변명을 하면 할수록 더 나쁜 놈이 된다. 사실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더라도 어쨌거나 내가 저지른 일이다. 누굴 탓할 수도 없다. 어떻게 이 모든 걸 알고 있는 건지 신기할 틈도 없이 공기를 가득 채우는 정대리의 딕션이 온몸을 조여 온다. 그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느끼며 조아리고 있을 뿐이었다.


최사원의 악행을 공들여 열거한 정대리는 말을 마치고 일어선다. 열 좀 식히고 나오라는 듯 눈치를 주고는 후련한 듯 팔랑 일어서 소회의실을 나간다. 은박지 속에서 얼어붙은 응축된 생크림처럼 몸을 움츠리고 있던 최사원은 회의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얼굴을 감싸 쥐고 몸을 앞으로 숙인다. 그와 거의 동시에 다시 문이 열리고 빼꼼 정대리가 나타난다. 최사원은 숙이지도 펴지도 못한 상체로 정대리를 바라본다.


"다음 주부턴 무선 마이크부터 올려놓고 시작하세요. 그거 원래 잘 잊어버려."




2019년 11월 25일 월요일 흐림


<전략처 강사원> 대리님이 인간 하나 만드시네

불쌍한 친구다. 욕 심은 데 욕 난다고... 이 좁은 판에서 살아남으려면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었다. 동기복이 큰 건데 나는 원래 그런 종류의 복은 없었으니까... 불손한 동기를 얻은 것도 내 탓이라면 내 탓이다. 나한테 피해올까 걱정이었는데 대리님이 마음먹고 할 말을 하신 것 같다. 언뜻 봐도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면서 사고친 것들이 많았다. 하필 업무 분장이 회의라 밖에서 줄줄 새는 게 위태로웠지... 당분간 조용히 살 수 있겠다.


<전략처 최사원> 어떤 놈이야

어떤 놈이지? 미리 누나? 유미? 인혜 누나? 규빈인가?? 와, 씨, 일 좀 해보려고 한 건데 그게 이렇게 돌아온다고? 아니 처음부터 도와주던가 그럼. 지는 뭐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던 주제에 이제 와서 꼬치꼬치 설교질이야? 과장님도 아무 말 안 하는데 지가 뭐라고 난리지? 잠깐만? 송과장이 나가기 전에 말하고 간 건가?? 나 혼내라고?? 지금 처장님하고 다이렉트로 연락했다고 기분 나쁘다 이거? 아니 그럼 지가 제대로 봐주든가. 처음부터 싹 다 해보라며, 뭐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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