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와 노동자의 적

2019년 11월 28일

by 선량한해달

"아, 예예, 애들 밥은 잘 사줬고요, 예예."


강처장에게서 온 전화를 내려놓기 무섭게 송과장이 움직인다.


"정민이, 회의."

"넵."


자연스럽게 송과장 뒤로 세 사람이 따라붙는다. 우연인지 키순으로 정렬된 그들의 모습이 반듯하니 보기가 좋다. 외부에서 보는 전략처의 각이란 의외로 이런 우스운 것일지도 모른다. 회의실에 둘러앉은 네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다. 정대리의 다이어리 넘기는 소리만이 공기를 가를 듯 예리하게 울려 퍼진다.


"그..., 오늘 처장님 오실거여."

'저딴 걸 뭘 무게를 잡고 말하고 난리야?'


뇌를 조여 오는 듯한 숙취감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최사원은 송과장의 일거수일투족이 밉다. 쓸데없이 무게나 잡으며 회사원이 회사에 출근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전하는 것이 너무나도 거슬린다. 순간 정대리의 다이어리 넘기는 소리가 멈춘다.


"뭐... 혹시 결정된 거 있으시대요?"

"오늘 결정허신다고."

"여기서요? 아님 위층에서요?"

"..."


송과장은 입을 다물고 두 손을 얼굴 앞으로 모은다.


"여기서요, 윗층에서요오!"


날카로워진 정대리를 주시하던 강사원이 긴장한다. 흐리멍덩한 최사원과는 대조적인 모습으로 정대리의 감정선을 가만히 따라가본다. 위층이면 노조위원장실. 지긋지긋한 기억이 스친다. 송과장과 정대리의 무드가 폭발할 듯이 조용히 끓어오른다.


"내가 걸 우찌 알어?"

"아니 과장님, 저희가 지난번에도 계량, 비계량 중요하다고 그렇게..."

"됐고."

"과장님!"


이쯤 되니 최사원도 정신을 차리고 눈동자를 굴리기 시작한다.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은 제쳐두고서라도 왜 눈앞에서 송과장과 정대리가 싸우는지 모르겠다. 굳이 알고 싶지는 않지만 기왕이면 누가 설명해줬으면 좋겠다.


"정민이. 너는. 거. 고쳐. 원래 안 그랬잖어. 좀... 나가서 머리 식히고 오고."

"..."


다이어리를 탁 덮고 퇴장하는 정대리다. 정대리만 사라지면 두 사원은 자그마한 개미가 되는 것만 같다. 마주 앉은 송과장이 불편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아니, 그전에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차암 늬들은 다행이여. 현장 몰라서. 내가 이래서 보직 순환이 싫은거여."


송과장은 현장을 아는 정대리가 불편하다. 정대리가 입사할 무렵 시행한 신입사원 현장 배치 방침에 끝까지 반대했던 유일한 사람이 바로 송과장이다. 저도 현장 출신이면서 '현장을 알면 기조실 일 못한다.'라는 공연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


"기조실 일 아무나 하는 거 아녀. 미리는 공사 다니다 왔으면 알겄고. 그, 공시는 해봤고?"

"내평만 해봤습니다."

"햐아, 미리씨가. 내평이여? 크아, 씨, 넌 사공처 가야겠다이?"


움찔하는 강사원과 여전히 대화의 흐름을 전혀 잡지 못하는 최사원이 나란히 앉은 모습이 가관이다.


"처장님이 노조위원장 만나신다는구만?"

"..."

"..."


"우리는 쩌어쪽 공사랑 다르다이, 컴팩트한 조직이라 이거여. 거긴 뭐 하나 결정하다보면 계절 바뀌고 그러자네. 미리 넌 알거여, 마케팅에서 여름 기획하면 그거 결재가 가을에 나고 그런단 말여. 어이가 읍어. 참내."


스스로에게 리액션이라도 하듯이 고개를 비스듬히 아래로 꺾어 피식 웃는 송과장이다. 그러더니 무슨 생각이 난 건지 낄낄 웃는다. 두 사원은 이 기괴한 광경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잠시 고민 중이다. 그때 정대리가 들어온다.


"커피? 잘했네."

"넵."

"오늘 노조위원장이랑 얘기 끝나면 뭐가 나오겄지."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홀짝 들이킨 정대리는 송과장을 쳐다보지도 않고 다이어리를 대충 편다. 불시에 끼어든 야근 스케줄을 정자로 적는 모양새가 제법 날카롭다. '허.송.세.월.'.


"뭐가 나오긴 할까요? 작년에 빤스였으니까 이번엔 뭐 메리야스 달라 그러려나?"

"이번엔 협조해주지 않겄냐? 회사가 중요한 시점인데."

"이번엔 더 기막힌 결론이 나지 않을까요? 거기도 중요한 시점인데요."

"넌 누구 편이냐?"

"전 제 편입니다."

"..."


"그... 혹시 준우란 놈 알어? 중부 부장 위원이라든데, 걔가. 7기."


멈칫하는 정대리의 모습이 어색하다. 지금껏 쏘아붙이던 기세가 멈춘 손에서 사그라든다. 따뜻한 텀블러를 감싸쥔 손가락이 텀블러의 표면을 검사라도 하듯 곡면을 따라 위아래로 움직인다.


"..."


애먼 커피를 꿀꺽 한 모금 들이키고는 자세를 틀어 송과장을 빤히 쳐다본다.


"이름은 알아요. 동기라고 다 친한 건 아니라서요."

"뭐, 그럼 됐고."

묘한 분위기 속의 묘한 대화가 묘한 커피 향을 타고 공기를 차갑게 물들인다. 덩달아 긴장한 강사원도, 이제야 정신이 든 최사원도 숙연해지고 만다.


"오늘은 퇴근 못허니까 그리들 알어. 대판 하고 사무실 내려왔는데 아무도 읍으면 빈정 확 상하는거자네."

"넵."/ "네."/ "네."

"수고들 허고."


송과장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기우뚱하더니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유아 같은 걸음으로 소회의실 밖으로 빠져나간다. 적막과 커피향이 남은 세 사람을 위로한다.


"오늘 집에 못 갈 수도 있으니까 1층 편의점 다녀오세요. 속옷, 세면도구, 면도기 다 있어요."




2019년 11월 28일 목요일 흐림


<전략처 강처장> 같이 죽자카노

또 쎈 척 한데이. 눈에 비이는데 아주 썡연기를 하고 자빠따. 여 구린 놈 한둘도 아인데 이래 나온다? 뭘 믿고? 가마있어봐라, 유재희 금마랑 뭐 있는 거 아이가? 내도 썌가 빠지게 샬아왔는데 저거들이 머라꼬 이 지*들이고 지*이. 내 안케도 쎄하더라만은. 이래저래 휘저으마 다 한 물 되는기라.


<전략처 강사원> 지긋지긋한 노조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여기 노조라고 뭐 다르겠어. 어찌들 그렇게 사업가 마인드로 사시는지. 개인주의도 정도가 있는 거 아닌가? 야근을 해도 우리가 더 하고, 회사 힘든 거나 여기 인간들 개판인 것도 우리가 더 잘 아는데. 심지어 꿈뻑 죽는 척까지 하지 우린. 그런데도 항상 받아내려고만... 재원이 한정적인데 뭐라도 받아내면 그만큼 돌아가는 돈이 주는 걸 모르진 않을테고. 을끼리 을질해서 받아낸 팬티 한 장이 그렇게 뿌듯할까?


<14기 신입 단톡방(15)>

(전략 최유빈)

너네 노조 가입해써? ₃


(인사 김규빈)

먼솔 ₃


(사공 윤인혜)

우린 공사 출신들 몇 명만 가입 하신듯? ₃


(영업 최단)

누나 전 분위기 봐서 결정하려고요 ₃


(인사 김규빈)

전략 받아주는 노조도 있냐? ₃

기조실, 감사실은 그들 입장에서는 적 아니겐냐 ₃


(중부본부 김두희)

엥? 행님 우린 첫 날 단체로 신청서 받아가던데? ₃

아직도 가입 안 했어요? ₃


(재무 유미)

우린 안될걸? 어차피 노조 가입하기 싫었는데 잘 됐어. ₄


(전략 최유빈)

아 그러쿠나... 첫 회사라 몰랐네 ₄


(영업 최단)

원래 오른쪽은 노조 가입 잘 안 하더라 ₄


(중부본부 김두희)

왜들 그러지? 잘 지내면 조은데... 우리 이번에 발열내의 준대요 ₄


(전략 최유빈)

뭐야 왜 우린 안죠 ₄


(중부본부 김두희)

노조에서 받아와서 노조원들한테만 주는거 같은데ㅋㅋㅋ ₄

현장 진짜 추워요 형 얼어주거 ₄


(전략 최유빈)

여기도 추워... 심장 얼어붙는다고 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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