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빈이는 얼굴이 조오~코. 아주 좋아."
지난밤 24시 13분. 세 어린이 중 하나는 결국 막차를 타고야 말았다. 연이은 회식에 쌓여가는 업무 스트레스로 어머니와의 사이까지 틀어져버린 최사원은 한 번 더 늦으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 것만 같았다. 결과만 놓고 보면 최사원의 선택은 제대로 틀렸다. 집에서 또 한 판 싸움이 일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날 싸움인 것을 차라리 충성심이라도 보여줄 걸 후회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앉은 꼴이 애처롭다. 송과장의 못마땅한 콧숨 소리가 파티션을 넘어 크게도 드리운다.
「누나, 과장님 화 많이 나셨어요?」
「보시는대로」
「어제 일찍 들어가신 거 아니었어요? 자정쯤에 안 계셨잖아요」
「한 시 반쯤 들어오셨어요, 사우나 다녀오셨대요」
「아..., 처장님은요?」
「처장님은 안 오셨어요」
「엥?」
「노조위원장실에서 회의 마치고 나가셨다고는 하는데 결국 사무실엔 안 내려오셨어요」
최사원은 '그럼, 뭐가 문제지?'싶어 송과장을 한 번 스윽 쳐다본다. 이번에는 정대리에게 메시지를 보내본다.
「대리님, 뭐 좀 여쭤봐도 될까요?」
「네네~」
「과장님 왜 화나신거예요?」
「신경쓰지마요, 원래 저래~ 집엔 잘 들어갔어요? 엄마가 화내시죠?」
「하아, 또 한 번 파란이...」
「유빈님도 고생하시네요」
「처장님 안 내려오셨다면서요?」
「네네」
「다행이네요 오셨으면 뭐라고 변명을 해야하나 걱정했어요」
「에이~ 가는 게 당연한 거 과장님 때문에 있는건데 신경쓰지마요」
「후... 제가 처장님이라도 빈정상할 것 같긴 하더라고요...」
「엥? 처장님은 그런 걸로 안그러세요」
「정말요? 과장님이 처장님 내려오시면 빈정 상하니까 있으라고 하셔서...」
「아ㅋㅋ 그건 자기가 빈정상한단 소리죠. '나랑'같이 있어달라고 투정 부리는 거~」
「...아」
'아, 그런 거구나!' 최사원은 송과장의 심중을 파악하지 못한 스스로를 돌아본다. 언뜻언뜻 보이는 송과장 양볼의 심술보가 유독 씰룩거리며 시야를 간섭한다. 다 큰 어른이 왜 저러나 싶다가도 눈앞의 누나들은 어쨌거나 끝까지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심장을 옥죄어온다. 당분간 조용히 몸 사리며 일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애꿎은 인쇄를 수십 부 보내 놓고는 복사기 앞으로 다가선다.
"어이구~ 용자, 어제 잘 들어갔어?"
가뜩이나 신경 쓰이는 이 상황을 콕 짚어내는 이대리다.
"아, 대리님!"
이대리는 최사원이 귀엽다는 듯 어깨를 툭 친다.
"뭘 쫄아, 우리 복사기 고장 나서 전략 꺼 쓰려고."
아직 다른 부서 사람들의 얼굴을 명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최사원도 명확하게 알고 있는 영업의 이로운 대리다. 입사 첫날 길잡이를 해준 덕에 모든 신입사원들에게 확실히 각인된 인물이다.
"어제 뭔 일 있었어?"
"네? 아, 아뇨."
"거기 밤새던데, 뭐... 기재부랑 뭐 해? 아니면 국토부? 서울시?"
"아뇨아뇨, 노조 관련이라던데.. 뭐.. 빤스... 그런 거."
"아아~, 발열내의?"
이대리의 정보력에 감탄하는 최사원이다.
"오와 대리님 어떻게 아세요?"
"우리 애들 그거 받는다고 떠들썩하더라고."
"좋겠다, 우린 못 받는데..."
"나도 못 받아. 난 노조 아니거든. 크크."
"아, 진짜요?"
"영업도 사무실은 가입하기 좀 껄끄럽지. 요전 기관에서 노조 하시던 분들만 해."
"그렇구나... 전 또 기조실만 안 되는 줄 알았어요."
묘하게 미소 짓는 이대리는 풀죽은 최사원을 끼고돌더니 한 팔을 턱에 괴고 마주 본다. 최사원 너머로 정민 대리와 눈인사를 나누는가 싶더니 비스듬히 땅을 쳐다보며 몇 초간 다물었던 입을 연다.
"너, 너무 말 많이 하지 마라."
"...네?"
"정민씨나 미리씨에 비해서 너무 가벼워. 전략이 그럼 쓰나."
한 장 짜리 미스프린트를 집어든 이대리는 최사원의 어깨를 짚고 손가락을 모아 톡톡하더니 인사하듯 종이를 휘날리며 사라진다. 벙찐 최사원은 이대리가 사무실 중앙을 지나 왼편에 자리 잡은 영업으로 돌아가 앉을 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어이, 유빈이!"
"아, 넵!"
최사원은 송과장의 부름에 반사적으로 대답하고 달음질쳐 자리로 돌아간다. 파티션을 사이에 두고 송과장을 바라보며 엉거주춤 선다.
"줘 봐."
"네?"
"거, 회의 자료 아녀?"
"아, 네네."
한껏 미간을 찌푸리고 거친 숨을 몰아 쉬는 송과장이 한 줄 한 줄 미완성의 회의 자료를 읽어 내려간다. 최사원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침을 꼴깍 삼키며 송과장의 이목구비 중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고민한다. 아직 제대로 검토하지 못한 회의 자료를 이렇게 급히 보자고 할 줄이야. 송과장의 변덕을 원망하는 와중에 의외의 주문이 날아든다.
"이로운이 오라 그래."
"..네??"
"거, 영업에 이로운이 오라 그러..."
"아이코, 과장님 제가 회의 자료를 잘못 가져갔네요."
언제 왔는지 송과장 뒤에서 자료를 돌려받으려는 손짓을 하며 서있는 이로운 대리다.
"너 이거 뭐여."
"네, 뭐, 보시는 대로."
"뭐..., 거서 말 나온 거 있고?"
"뭐어, 말은 한 달 전부터 나왔죠."
"..."
자연스레 최사원의 회의 자료와 의문의 종이 몇 장을 바꿔 든 이로운 대리는 멀뚱이 서 있는 최사원에게 윙크를 날리고는 사라진다. 생각이 많아진 송과장 주위로 세 어린이의 시선이 꽂힌다. 재무처장이 송과장 뒤로 다가온다.
"결정됐대?"
"모르겠습니다."
"강처장은?"
"연락드려야죠."
터덜터덜 슬리퍼를 끌고 일어서는 송과장과 오늘따라 빠릿한 재무처장의 뒤를 따라 오른쪽 팸 처차장들이 우르르 몰려 나간다. 송과장은 나가려다 방향을 틀더니 한참 전부터 같은 자리에서 눈만 꿈뻑이고 서있는 최사원에게 회의 자료 초안을 돌려준다.
"싹 다 엎어."
2019년 11월 29일 금요일 흐림
<영업처 이대리> 내가 이로운이올시다
전략에서 바보짓하고 있으면 이 이로운이가 알려드린다 이거야. 이름만 전략 달고 있으면 뭐하나 돌아가는 건 하나도 모르는데. 총괄부서? 시행부서? 웃기고 앉았네. 처장 모가지 날아가는 줄도 모르고.
<전략처 강사원> ...
저 사람은... 아주 해로운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