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하러 오지도 않고, 응? 바나나 2분의 1개에? 호두 다섯 아알?"
이번 주도 전원 토요 출근이다. 매주 토, 일요일 중 하루는 기조실장의 눈에 출근한 모습을 박아야 한다. 단단한 밧줄 같은 휴일 출근 방침이 지난달부터 세 어린이의 몸을 옭아매고 있다. 송과장은 상하반기 승진 시즌과 국정감사 시즌에는 항상 이런 식이다. 죽상인 최사원을 노려보던 송과장은 애먼 정대리에게 골난 한 문장을 뱉어내고 팩 돌아서 밖으로 나간다.
"야! 정대리 나오면 실장님 들어가셨다고 가라 그래! 이제 와서 뭐해?"
"..."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로 멀어지는 송과장을 배웅하는 두 사원이다. 사회인에게 있어 '보여주기'란 이런 것이었던가. 매주 주말이면 전원 출근 인증 사진을 단톡에 올리는 송과장이다. 이대로 직장 생활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한 최사원은 지난달부터 사기업 채용 정보까지 샅샅이 뒤지기 시작한 참이다. 2020년이 코앞인데 사람 하나 잘못 만나 우리팀만 주 6일제라니 미칠 노릇이다.
"아주 그냥 지*을 하고 있네, 지*을, 개버릇 남 못 준다더니 남의 다이어리는 왜 들여다봐 미친*이."
"...대리님?!"
송과장이 모습을 감추기 무섭게 커피향과 함께 정대리가 등장한다.
"안 그래? 남이사 바나나를 먹든, 호두를 먹든 무슨 상관이야. 감사실 또 한 번 가야 정신 차리지 저 인간."
"...아, 네."
"아까 탕비실 쪽 엘리베이터로 올라와서 텀블러 씻고 있었거든. 다 봤지. 내 다이어리 꺼내서 뒤지는 거."
"...죄송해요."
"응? 왜? 유빈이는 잘못이 없다는 거~"
휴일에는 말이 편해지는 정대리다. 두 사원은 이제 정대리의 on과 off에 익숙해졌다.
"언니, 언니도 조심해요. 저 사람은 전력이 있어."
"아, 네."
"아, 혹시 두 분 아시나? 그 사건 꽤 컸는데."
모른다기엔 너무 차분한 무표정의 강사원과 온 얼굴로 안다는 표시를 하고 있는 최사원이 사뭇 대조적이다.
"아, 그, 그거, 성... 희롱 맞죠?"
"정확히 따지면 직장 내 괴롭힘인데 성희롱이 포함돼버린 케이스."
"저... 왜 그런 건지 여쭤봐도 돼요?"
나 없는 자리에서 뒷담화를 한 것에 대한 복수심이 곁들여진 탓이지, 휴일인 탓인지 정대리의 입이 가볍게 떨어진다.
"미래라고 있었어요. 신입사원. 박미래."
모월 모일, 힘든 마음으로 휴일 출근을 한 박사원은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고 만다. 잠시 허둥대다 뒤이어 출근한 정대리를 대뜸 붙잡았다.
"대리님, 대... 대리님! 도둑이요!"
"엥? 헛, 이게, 뭐, 뭐야..?"
서랍장이 전부 열려있고, 데스크 위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용품들이 뒤엉킨 채 널브러져 있었다. 박사원의 데스크였다.
"시... 신고하자. 내가 신고할게. 사진 찍어요."
통계와 회의 자료로 바빠 죽겠는데 도둑까지 들다니, 정대리는 삼재가 들어도 오지게 들었다고 생각하며 급히 1층으로 내려가 경비원을 대동해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대치 상황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럼 어쩌냐. 자료는 찾아 보내야 하고, 응? 위치는 모르고, 응?"
"..."
"뭐, 찾아서 보냈으니 됐자네, 기재부도 급허고. 거긴 원래 그려. 내가 다 했으, 미안해 허진 말고."
"..."
"왜 그려, 담부터 잘 허면 돼. 한 30분만 일찍 나왔어도 이 고생 안하자네, 응?"
"..."
'하아,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정대리는 경비원을 돌려보내고는 상황을 정리해본다.
'그러니까 이건, 도둑이 아니고, 과장님이 미래씨 서랍을 열고, 뒤지고, 개인 물품을 꺼내놓고, 무언가를 찾아서 기재부로 보냈다? 와, 씨... 기분 더럽겠네.'
그때였다.
"야! 이 미친 새*야!"
정대리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평소 화나는 일이 있어도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었던 박사원이다. 박사원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책상에 널브러진 생리대와 칫솔, 치실 따위를 세차게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진통제, 피임약, 진단서, 처방전 따위를 주섬주섬 핸드백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는 컴퓨터를 켜더니 무언가를 짧게 작성해 송신하고는 그 길로 곧장 뒤돌아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미... 미래씨!"
정대리는 붙잡기도 뭐하다고 생각했다. '나였어도...'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뭐... 뭐여. 쟤 왜 저려?"
죄의식 없는 송과장은 벙찐 상태로 두 눈을 꿈뻑이며 정대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송과장은 감사에 회부되었고 박사원은 긴 인병 휴가에 들어갔던 것이다.
"헐..."
소문이 아닌 제대로 된 정황을 들은 최사원은 꽤나 놀라 정대리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뭐, 그렇게 된 거죠."
"그럼, 과장님 징계받으셨어요?"
"당시엔 미래가 심정적으로 너무 힘든 상태였어서 오래 끌고 가려고 안 하더라고. 위원회가 소집되긴 했는데 그 양반들이 다 그쪽 양반들이니까... 우리 분위기 봐서 알겠지만 보건휴가도 못 쓰거든요. 생리통이 심한 스타일이어서 생리 안 하려고 피임약까지 먹으면서 버티고 있었다는데, 그거 때문에 병가 중에 소문까지 돌고... 정말 가관이었거든."
"동기 누나들은 보휴 쓰던데."
"여긴 부서가 좀 그렇잖아... 모든 건 부바부다 이거야. 그래서 저 인간은 흐지부지 견책으로 끝났고, 미래는 인병 휴가 상태로 딱 1년 채우고 퇴사했어."
"대박이네요."
소문의 진상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두 사원은 부디 송과장과 작은 마찰도 일어나기 않길 마음 속으로 기원하는 중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우리 회사의 인병 휴가는 6개월씩 세 번을 연장할 수 있다. 발병 원인이 회사에 있으므로 상여금까지 모두 받으면서 쉴 수 있다! 라는 것. 그러니까 다들 좀 아파보라고~ 아픈 게 더 나을 수도 있어. 뭐, ...미래처럼 그렇게 힘들지는 말고."
씁쓸한 농담과 웃음이 교차하는 중에 최사원 뒤로 강처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셨습니까."
"안녕하십니까."
"어... 엇, 안냐...세요!"
"햐아, 이 봐라 또. 송보강이만 없재!"
2019년 12월 7일 토요일 맑음
<전략처 송과장> 하극상이여, 하극상
지도 이제 짬이 찼다 이거여. 하, 어이가 없고만. 아니, 고작 3년차 아녀? 아닌가? 4년찬가, 응? 으째 다른 부서 놈들보다도 전략에 관심이 없어 관심이. 내 이래서 다른 놈으로 해달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듣질 않어. 다음번엔 쓸만한 놈 좀 데려와야지 못살겄다. 속이 문드러진다고. 일도 못 하는 게 요리조리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않았고. 이 와중에 지가 늦으면 어쩌자는 거여. 응? 차암 내, 토요일에 일하기 싫으면 전략에 오질 말어야지. 그렇게 능력 있으면 이직을 허시던가.
<전략처 정대리> 저 새*도 정년 하겠지?
이번에 정년이 1년 더 연장된다는데 저 새*를 1년 더 봐야 돼? 나도 내년이면 5년 찬데 이번에 이직 못 하면 여기서 저 새* 보면서 정년 할지도 몰라. 이제 미리 언니랑 유빈이도 있으니까 나 좀 다른 데 보내줘도 될 거 같은데... 하, 처장님 진짜, 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