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에따 마, 거다 박아두면 되긋다. 그자? 그쟈아??"
강처장이 회심의 한 마디를 남기고 소회의실 문을 나선다. 뒤통수에 꽂히는 인사들은 들은 체 만 체 제자리로 가서는 짐을 챙겨 어디론가 휙 나가버린다.
"허이그, 으흐이그읏! 사람 욕심만 많아서는!"
뒤이어 회의실을 나온 송과장이 퉁명스러운 발놀림으로 괴팍하게 서랍장을 뒤져 담배를 챙긴다. 그리고는 곧바로 강처장 뒤를 따라나선다. 휑한 공기가 전략처를 감싸고돈다.
"여어어어어이~ 또 어린이날이네, 정대리님~!"
"그러게요, 이대리님. 요즘 저희 어수선해요."
때맞춰 등장한 빌런이다. 강사원은 자기 뒤에 서서 정대리와 대화하는 해로운 사람이 영 불편한 눈치다.
"우린 티오 하나 날 것 같아, 전략은 어때요?"
"아시면서, 뭘."
"응? 뭐가? 저 몰라요. 난 아무것도 몰라. 왜, 누구 관둬? 이야~ 그래, 뭐, 능력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다 가더라. 미래도~ 민혁이도~, 정대리도 결국 가나~ 그럼 난 이제 누구랑 얘기하나아~?"
'이 자식은 뭐가 이렇게 능청스럽지?'
강사원은 제 뒤통수에 자리를 잡고는 너스레를 떠는 이대리가 못마땅하다. 목을 잔뜩 움츠린 채로 버티다 결국 지갑을 챙겨 일어나고 말았다.
"대리님 저 커피 한 잔만 사오겠습니다."
"네, 윗분들 안 계시니까 천천히 다녀오세요."
강사원이 자리를 피하자 이때다 싶었는지 재빨리 강사원의 자리에 앉는 이대리다. 제자리에 앉은 듯 본격적으로 정대리와의 대화에 돌입한다.
"본부장님 엄청 좋아하시겠네."
"에이, 이것 봐, 다 아시면서."
"우리야 영업이니까 지방 본부장님들 맨날 보잖아요. 정대리 보고 싶다고 보고 싶다고오~ 그렇게 노래를 하시더니 소원 푸셨네."
"서울에서는 멀지만 그래도 거기가 제 고향이죠 뭐."
"아이고, 그 말 들으니 마음 아프네. 많이 힘들었어요?"
"아시잖아요. 업무는 좋은데... 제가 좀 안 맞죠... 여기 사람들이랑."
'풉!'/ '큭!'
터지는 웃음에 두 대리의 어깨가 격하게 움츠러든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고개를 주체하지 못한 이대리가 그만 정대리의 텀블러를 쳐 바닥에 떨어뜨리고 만다. 두 대리는 그 상황조차도 웃겨 죽을 지경이다.
"우왓, 크크크, 아, 미안해요. 근데 너무 웃겨. 크크크크. 당연히 안 맞지. 크큿, 여기 사람들이 누구랑 맞겠냐고? 아니, 나와보라 그래. 크크크. 송과장이랑 여기 맞는 사람 누가 있냐고. 크으."
"푸흡, 그쵸. 흐흣."
쏟아진 우엉차를 대충 훔쳐낸 정대리가 자리에서 일어서 탕비실로 이동한다. 굳이 뒤따르는 이대리다.
"아, 앉아 계세요. 버리고 올게요."
"에이, 내가 쳤는데 내가 씻어야죠. 죄송해요. 내가 꼭 이런다니까."
정대리는 지난 3년간 동고동락한 이대리가 새삼 고맙다. 무리한 자료 요청에도 제 때 들어왔던 회신, 가끔 던져주던 농담. 절망 속을 걷던 정대리에게 이대리는 유일한 친구였다.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니 서운한 마음이 든다.
"미리 언니랑 유빈이 잘 부탁드려요."
"미리씨가 언니였어?"
"거어 뭐어, 제가 좀 들어 보이긴 합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농담이에요, 뭘 놀라고 그러세요~"
"미리 언니는 정말 일을 잘하세요. 유빈이가 걱정이죠."
"걱정마요. 그놈은 뭘 몰라서 그래. 내가 잘 가르쳐 놓을게."
"고집이 있으세요. 부드럽게 말하는 게 더 잘 먹힐 거예요."
"에에이, 아니지. 고집 있는 놈일수록 밟아야 알아듣지."
"그래요?"
"남자들끼리 통하는 그런 게 있그등요~ 걱정 마세요. 오히려 난 미리씨가 걱정이야."
"미리 언니가 왜요?"
"저쪽 공사 출신이잖아. 알게 모르게 윗양반들이랑 얽혀있고. 강처장이랑은 티에프도 같이 했다던데?"
"네, 그렇다고 들었어요."
"그 티에프팀 박살 났다드만..."
"네? 왜요? 무슨 일 있었대요?"
"작년에 그 뉴스에 났잖아요. 공사 비위..."
"언니!!"
언제 왔는지 탕비실 입구에서 도끼눈을 뜨고 안쪽을 노려보고 있는 지아다.
"어, 어어... 지아야. 무슨 일이야?"
"언니, 현장 간다며!"
뾰로통한 얼굴로 탁탁 걸어 들어오는 걸음에 이대리가 물러선다.
"어, 으응... 벌써 18층에까지 소문났어?"
"아, 뭐야아, 나도 데려가."
"너... 넌 현장 모르잖아."
"아, 가서 배우면 되지. 지금 비서 하는 것도 뭐 알아서 하나? 그래요 안 그래요 이대리님!"
"아, 맞지. 맞죠! 이주임님 말이 맞지. 백번 맞지!"
기세 좋던 이대리는 예기치 못한 지아의 등장에 뻘쭘하게 물러서 두 여자의 대화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비겁하게 혼자 도망가기 있어? 언니 가면 그 자리에 또 나 돌려 막을 수도 있잖아. 여기 아저씨들 다 그냥 영악한 여우라고. 난 내가 땜빵하기도 싫고, 전략에 언니 말고 다른 사람 있는 것도 싫어."
지나치게 솔직한 지아의 의견에 정대리가 당황한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이대리도 이걸 듣는 건 좀 아니다 싶었는지 슬금슬금 입구 쪽으로 몸을 옮기더니 정대리에게 찡긋하며 두 손가락을 붙여 인사를 던지고는 사라진다. 이대리의 부재를 확인한 정대리는 지아를 진정시킨다.
"너 왜 그래. 이대리님이 말 이상하게 전하면 어떡하려고."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나 막내라고 지금 아저씨들이 여기저기 땜빵하는데 쓰잖아. 비겁한 새*들."
"그래, 너도 참... 고생이 많아."
"아, 언니 가지 마아. 나랑 있자. 나 여기 19층 사람들 잘 모른단 말야. 사람들이 다 피해."
"에효, 너도 왜 하필 발령이 감사로 나냐. 너나 나나... 운도 지지리도 없지."
정대리와 이주임은 싱크대에 엉덩이를 붙이고 나란히 붙어 서서 말없이 바닥을 바라본다. 투명한 스타킹에 갇혀 꼼지락거리는 지아의 발가락이 빛을 받아 빛난다.
"패디했어?"
"옹."
"귀여운 거 했네. 곰돌이야?"
"아, 언니, 강아지잖아. 콧구멍에 큐빅 안 보여?"
"어머, 코구나. 난 그게 눈인 줄."
"아, 뭐래, 이 언니. 크크큿."
이별을 직감한 두 사람은 좀처럼 탕비실을 벗어나지 못한다. 꺼질 듯 파르르 떨리는 형광등 불빛이 이따금씩 코인지 눈 일지 모를 보석에 찰나의 빛을 머금어준다. 말없는 시선이 지아의 발을 떠나 칙칙한 카펫에 머문다. 정대리는 곧 사무실을 떠난다. 떠날 수밖에 없다. 떠나고 싶었다. 머물고 싶었다. 돌아가고 싶었다. 돌아가기 싫었다.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일이 싫은 게 아닌데.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본사 오지 말 걸 그랬나 봐."
"아니지 언니, 이 회사를 오지 말았어야지. ...공자 붙은 델 오는 게 아니었어."
"그러게 말이다. 지아 너는 사기업 준비했었어?"
"사실 나 비행했었다?"
"아, 그래?"
"응, 경력에 도움 안 되는 거라 말 안 했어. 아저씨들 입방아에 오르기도 싫고."
"세상을 누비고 다녔었겠네. 어쩌다 이렇게 꽉 막힌 델 왔니."
"안 맞더라고. 비행을 할수록 점점 바보가 되는 기분이 들었어. 자존감도 떨어지고. 그래서 전혀 새로운 일에 도전해서 잘 되면... 내가 확 달라질 줄 알았지."
"인간이 쉽게 변하나... 너나 나나 사회생활이 안 맞는 타입일지도 몰라.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아니야, 언니는 잘 맞아. 상사랑 상극이라 그렇지. 언닌 누가 봐도 공기업인이야. 모습이 그래."
"...고마워."
"...고맙긴."
이 날 침침한 탕비실 주변에는 오전 한동안 쿰쿰하고 애틋한 공기가 감돌았다. 두 여자가 내뿜는 부의 감정들이 작은 공간을 휘돌아 밖으로 밖으로 퍼져나간다. 어느덧 사무실 전체에 감도는 잿구름빛 공기가 비라도 내릴 듯 비릿한 무게감을 띤다. 아무래도 이번 발령은 액세스공사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직접적으로 와닿는 최초의 발령이 될 것 같다.
2019년 12월 11일 수요일 구름 뒤 비
<전략처 정대리> 지긋지긋한 현장
다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숙소는 여전히 비 새고 그렇겠지? 중부 본부까지 통근은 무리고 집을 알아봐야겠다. 다시 현장 간다 그러면 엄마 아빤 또 길길이 날뛰겠네. 불효도 이런 불효가 없어... 4년 동안 거주지가 세 번이 바뀌고 난리다. 이번에는 그냥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혼자 조용히 내려가자. 애도 아니고 일일이 뭘 보고를 해. 하, 지친다. 이직도 쉽지가 않고. 이 바닥에서 이직해봐야 거기가 거기일 테고. 인생이 꼬였다. 망했다고.
<감사실 이주임> 도망쳐야 하나?
다시 비행을 할까? 요즘 채용도 없는데 왜 하필 이때 발령이야... 아니야. 여긴 절대 아니야. 민이 언니 없으면 나 혼자 여길 어떻게 다녀. 윤택이 그건 말이 좋아 동기지... 동기가 동기 같아야 동기지. 여우 같은 놈. 관둬야 돼. 난 민이 언니처럼 현장으로 가지도 못하잖아. 하필 감사실로 와서 다른 부서 일도 하나도 모르고... 어떡해 진짜. 나 어떡해.
<정략처 송고장> 희한해
정민이 그건 희한하게 탐내는 사람이 많단 말이지. 일을 특출나게 잘하는 것도 아닌데. 가만있어봐라, 혹시 뭐 있나? 저거 회사에 아는 사람 있는 거 아녀? 허어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