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닥타닥타닥...'
오늘이다. 아마도 오늘일 것이다. 헌 사장의 거처도 새 사장의 부임일도 정해졌다. 오늘부터 약 한 달간은 조직개편의 망령 속에서 발령 공문이 수시로 피어오를 것이다. 송과장은 정대리가 유독 밉다. 아침부터 중부 본부에서 환영 전화가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통에 머리가 시끄럽다. 웃는 낯으로 현장 선후배들과 인사를 나누는 저 남의 새끼가 꼴보기 싫다.
정대리는 이제 마음이 편해졌다. 며칠 곰곰이 생각해보니 발령 스타트를 끊는 것이 꽤 마음에 든다. 막판에 예기치 못하게 이동을 '당하는' 사람들이 등장할 텐데 그렇게 마음에 상처를 안고 떠나는 것 보다야 환영해주는 곳으로 미리미리 가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은가 생각한 것이다.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에는 미련 한 톨도 남지 않았다.
강사원은 정대리가 가고 익숙지 않은 새 상사가 올 것을 생각하니 앞이 까마득하다. 벌써 입사한 지 두 달이 흘렀다. 정대리에게 많이 익숙해졌는데 마음 안 맞는 사람이 오면 어쩌나, 행여라도 날 아는 윗분이 오면 어쩌나 제 나름대로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막둥이 최사원은 아무 생각이 없다. 아직 사람들 사이의 관계조차 파악하지 못한 입장이다. 이번 발령이 어떤 변화를 몰고 올지 감도 오지 않는다. '팀장과 사이 나쁜 선배 하나가 방출되는 건가? 조직은 무서운 곳이구나.' 정도의 생각을 하며 한 다리 건너 멀리서 난 불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금요일 회의 자료 마감만이 머릿속에 맴돈다.
「어이~ 뭐 들은 거 있나~」
영업처 이대리가 최사원의 눈앞에 작은 창을 띄운다.
「아, 대리님, 그보다 영업은 회의 자료 언제...」
「아직 5시잖아. 6시까지 주면 되지?」
「5시까진 주셔야 저도 취합을...」
「거 뭐 별 거라고. 안 들어오면 안 하면 되는 거지. 퇴근해. 너는 정대리처럼 그럴 필요 없어.」
「...그쵸. 결국 방출되는 거」
「아, 결국 간대?」
「네, 뭐... 벌써 한참 전에 나온 말인데요...」
「아?! 너도 고생하네」
「아뇨... 뭐, 저야 늘 같은 거만 하는데요, 뭐」
「괜한 거 물어봤다. 수고~」
이대리와의 대화를 마치고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는 최사원이다. 아침부터 묘하게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는 키보드 마찰음이 이제야 들린다. 무겁다. 너무 무겁다. 회의 자료 취합이라는 좋은 핑곗거리가 있어 정신을 집중할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생각 없이 눈을 굴리다 정면의 강사원과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란다. 강사원이 뚫어져라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저 누나 눈이 저렇게 생겼었구나.'
땡그랗게 큰 속쌍꺼풀 눈을 보고 있자니 처음 보는 사람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오후 5시가 넘어 오늘 처음으로 마주치는 눈이다.
"유빈님은 오늘도 참 바쁘시네요."
"아, 미안요, 누나. 나 오늘 회의 자료 마감이잖아요."
"미안할 건 없고요."
송과장 쪽으로 눈을 흘깃 힌트를 주는 강사원이다. 그 눈길을 따라 밟아가니 심통이 날대로난 송과장이 주섬주섬 짐을 챙겨 일어서고 있다.
"회의 자료는 메일로 보내 놓고, 응? 유빈이 잘 하드만. 난 여의도 들렸다 바로 들어간다이. 일찍들 들어가고."
정대리는 조용히 일어서 애증의 송과장 등에 깊은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는다.
"아흐~ 좋다. 그래도 눈치는 있어서 자리 비켜주시네."
뜻밖의 30분짜리 어린이날에 분위기가 누그러진다.
"대리님, 중부 본부 가시면 새 자리 번호 알려주세요."
"유빈님, 그룹웨어 검색해보면 되는데? 여기여기. 이런 거 하나하나 알려줬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아, 거기 현장도 나와요?"
"..."
역시 마지막까지 한 건 하는 최사원이다. 뒤편의 재무처 사람들도 움찔하며 분위기를 살핀다.
"크크크..."
"?"
최사원은 멋쩍게 작은 눈을 굴려 주위를 살핀다. 갑자기 익살맞게 웃는 정대리를 똑바로 바라보는 모습이 하찮고 귀엽다.
"유빈아, 이리 와봐."
정대리의 귓속말에 대각선으로 마주 않은 최사원이 한참을 돌아 정대리 곁으로 쭈뼛쭈뼛 가서 선다.
"귀 가까이 대봐."
거북이 마냥 고개를 쭈욱 빼고는 엉거주춤 자세를 낮춘다.
"더 내려와 봐, 키 더럽게 크네."
알맞게 최사원의 머리가 사정권에 들자 점프하듯 팔을 들어 최사원의 목을 두르고는 볼이 붙을 정도로 가까지 끌어당기는 정대리다. 옆에 있던 강사원도 화들짝 놀라 주위를 살핀다. 정대리는 정면을 보며 가장 편안한 자세와 표정으로 최사원을 둘러 잡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읊조린다.
"야. 최유빈이. 너는. 항상. 입조심해야 돼. 현장 쪽수가. 더. 많거든."
좀처럼 팔의 힘을 풀어주지 않는 정대리다. 서늘한 기운을 감지한 최사원은 완력으로 벗어나 보려 애쓰지만 힘을 쓰기에는 자세가 불리하다. 정대리는 왼팔의 힘을 빼며 오른팔로 새로운 향수를 공기 중에 분산시킨다. 귀와 얼굴이 새빨개진 최사원이 한 손으로 목을, 다른 한 손으로는 찌그러진 셔츠 깃을 매만지며 급히 두세 걸음 뒤로 물러선다.
"이 향이 좋아서 바꾼 건 아닌데, 탐내는 놈 없으니 이제 내 향이지. 안 그래요, 언니?"
"네, 대리님."
"언니, 잘 지내요."
"길지는 않을걸요."
"알아요, 여기든 저기든 또 불러들이겠지."
"한 번 부려봤던 놈이 쉽죠."
"흣, 그렇지, 더러워도 쉽지."
하루 종일 바라보던 메신저에서 인사처 실무자들이 하나둘 사라진다. 송과장이 나설 즈음 모든 처의 과장급 이상은 이미 자리를 비운 참이다. 발령날 분위기는 항상 같다.
"언니, 인사처 다들 들어가네요."
"곧 뜨겠네요. 제가 바로 접수할게요."
"아냐냐, 마지막인데 나도 오랜만에 공문 접수 좀 할래, 언니."
수강신청 개시를 기다리는 대학생들처럼 모니터에 바짝 붙어 앉은 전략처 어린이들이다. 괜한 초침 소리가 심장을 때린다.
'팟!'
"..."
"..."
물러선 최사원에게는 순간 멈춘 공기와, 정대리와 강사원의 거대한 의자 등받이만이 감지될 뿐이었다. 온 사무실의 공기가 굳고 이따금씩 한숨과 탄식과 욕설이 들려올 뿐이다.
'발령이... 이런 거구나.'
숨소리 하나, 탁 소리 하나, 욕 하나에 일일이 반응하며 미아처럼 두리번거리던 최사원은 저 멀리 홀로 우뚝 솟은 영업처 이대리와 눈이 마주친다. 반쯤 입을 연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로운 사람이 오늘은 어쩐지 해괴해 보인다. 그 표정에 간담이 서늘해진 최사원은 다시 제 앞을 가로막은 두 사람을 본다. 거대한 의자의 매쉬 등받이에는 두 여자의 실루엣이 있다. 그 실루엣 사이를 비집고 미간을 찡그리며 파고들어 보니 가려진 이름들이 보인다. 가장 위가 전략처일 것이다. 그래, 위부터 짚어가 보자. 송보..., 과장님? 저기가 4급이고. 민, 그래 정민 대리님 가시고. 5급들 발령이고. 그 아래 6급. 이번에 본사로 오는 동기들이 있으려나? ...유빈. 응? 유빈? 유빈?! 나?!?!?!
"젓.. 저, 저기, 잠깐만요!"
다급한 최사원의 목소리에 두 여자의 방벽이 풀리고 두 팔 벌려 가운데를 비집고 들어간 최사원의 눈앞에 이윽고 화창한 모니터가 드러난다.
「 1. 전략처 4급 송보강 새행복Dream사업TF팀장에 보함(겸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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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전략처 5급 정 민 새행복Dream사업TF팀에 보함
8. 영업처 5급 이로운 전략처에 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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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전략처 6급 최유빈 중부 본부에 보함. 끝. 」
2019년 12월 13일 금요일 맑음 뒤 비
<전략처 정대리> ...이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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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처 강사원> ...이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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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처 최사원> ...이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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