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선약이 있어서."
전략처의 마지막 회식에는 최사원이 없었다. 발령일 이후로 이미 깨끗이 정리된 책상이다. 저스트 18시, 드물게 야근하는 이도, 칼퇴를 말리는 이도 없다. 회의 자료는 자연스럽게 강사원이 취합하고 있다. 이로운 대리는 구멍 난 자리에 새로 들어앉은 능글맞은 한 마리의 동물이 되었다.
"이야, 좋네 여기. 과장님, 아니 우리 차장님! 오늘은 막걸리 어떠심까, 제가 여기 파전 먹으려고 집엘 못 가잖아요."
"어이구, 그래? 우리 이대리가, 아니 이과장이 응? 술을 좀 알어. 안주는 더 잘 알고. 응?"
강처장은 송과장과 죽이 잘 맞는 이대리를 보니 마음이 놓인다. 술기운이 좀 돌면 통 말이 없는 정대리와 대화를 시도해볼 참이다. 가운데 술상을 기점으로 남녀로 갈라 앉은 모양새가 썩 좋질 않다. 이대리의 고기압과 정대리의 저기압이 오묘하게 경계를 타며 강처장의 미간을 간질인다.
"우리 미리씨는 인자 사심위 해야겠네요오."
"아, 사심위요. ...네. 알겠습니다."
모처럼의 회식 자리에서 부드럽게 인수인계가 시작된다.
"아, 그르네. 미리씨는 쩌기 공사에서 사심위 해봤지? 응? 그냥 하면 되겄고. 응? 정대리, 내일 파일 싹 다 줘. 인수인계할 것도 읍어. 내가 아니라 여기가 과장이여."
"와 씨, 미리씨 사심위도 해보셨어요? 난 전략 아무것도 몰라 어떡하냐. 크크."
"..."
말 없는 정대리의 눈치를 살피느라 회의 자료 분장에 대해 미처 말을 꺼내지 못한 강사원은 기회를 엿보아 말을 꺼내려다 능청스러운 이대리의 만담에 입을 거둔다. 술 좋아하는 이대리와 기분 좋은 잡담을 나누는 송과장을 보니 애잔해진 것이다. 팀에 우환이 깃들었는데 나라도 다물자. 여물자. 오늘만큼은 조용히 넘어가자. 오랜 사회생활이 내린 결론이었다.
"정대리님은 티에프 하신다면서요? 그거 뭐 하는 거예요? 사업 면허 보는 거죠? 전에 하던 그 남부 쪽? 아니면 중분가요?"
만담의 화살이 미끄러져 그만 정대리 쪽으로 향한다. 뚝 끊어진 대화 속에서 말없이 홀짝이던 정대리가 술상을 한 번 휘 둘러본다.
"이모님, 여기 계란말이 추가요. 감싸함다아~."
생글생글 건강하게 웃는 평소의 정대리가 돌아왔나 싶더니 감싸함다를 기점으로 돌연 무표정으로 변한다.
"에이씨, 뭐 이렇게 먹을 게 없어... 파전에 파는 없고 다 밀가루야. 뒤는 또 다 탔어, 이거 봐."
파전을 향해 강한 비난을 퍼붓는 정대리다. 더 묻기도, 질문을 거두기도 애매해진 이대리가 침을 꼴깍 삼킨다. 송과장도 이대리와 축 늘어진 파전을 번갈아 보며 동태를 살핀다. 이목이 집중되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정대리가 이윽고 말문을 연다.
"몰라요."
"...아? ...아, ...그러시구나."
멋쩍게 말을 섞는 이대리가 애처롭다. 정대리는 미끄러진 화살을 받아 강처장에게로 쏜다.
"그거 뭐 하는 티에프예요, 처장님? 우리 뭐 또 새사업 해요? 국민 여러분께 행복 드리는? 기쁨 드리는? 자산 불려 드리는? 아니면 싹 다 뺏는? 국토부가 뭐 하재요? 아니면 기재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시작된 불편한 대화가 술자리의 다섯을 옭아매고, 싯누런 강처장의 안색에는 좀처럼 피가 돌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정대리의 이 궁극적인 질문은 언젠가는 결국 나와야 할 질문이었다. 누구의 입을 통해서 나오느냐의 문제였을 뿐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새 TF팀의 정체를 아는 액세스인은 아무도 없다. 사람 욕심 많은 강처장이 정대리를 잡아두기 위해 만든 TF팀이라는 공연한 소문이 돌고있을 뿐이다.
"송과장, 니는... 어데까지 아노?"
"저는 요전 것만 알고요, 녜, 녜에."
"그래."
빈 잔을 가만히 바라보는 강처장을 포착하자마자 원거리의 이대리가 손을 뻗어 잔을 채운다. 혼자서 한 잔을 들이킨 강처장이 말을 시작한다.
"요전 껀 이제 뭐 다 알지요오? 쩌어쪽 공사 지분 탕감하는기라, 그기."
강처장이 검지 손가락으로 술잔을 톡 건드리니 바짝 붙은 이대리가 또 한 잔 따른다.
"우리 보강이가 욕봤따."
"아유, 아닙니다. 제가 뭘요."
정대리와 이대리는 그게 그런 TF였구나 하며 시선을 정면 45도로 고정한 채 가만히 듣는다. 또 한 잔 들이킨 강처장이 미동도 없는 정대리를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이더니 입을 뗀다.
"분위기 봐가마 차차 칼라켔는데..."
빈 술잔에 술이 차고 다시 비길 여러 번, 강처장은 결심한 듯 경계하듯 주변을 둘러본다.
"이대리하고 강사원은 고마 인나라."
"...네?"
벙찐 이대리와는 대조적으로 서둘러 목도리와 코트를 챙겨 일어난 강사원이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강사원의 템포에 맞추기 못한 이대리가 서둘러 뒤를 따라나선다. 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로 나서다 뒤를 돌아보니 먹음직스러운 계란말이가 뒤늦은 파향 김을 피워 올리며 술상 위에 놓인다. 이대리는 강사원이 잡아둔 엘리베이터에 억지로 몸을 밀어 넣고도 시선만큼은 떼지 못한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강처장, 송과장, 정대리가 술을 나누는 모습이 보인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멍하니 셋을 바라보던 이대리는 강사원의 인사에 정신이 든다.
"아, ...아뇨. 미리씨야말로 고생했어요."
느리게 이동하는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감당해내지 못한 이대리가 곧 말문을 연다.
"아니, 그... 미리씨는 알아요?"
"네?"
"아니, TF말야. 거... 뭐 있어요?"
"저야 모르죠."
"...아니, 무슨 팀끼리 이래? 자기들 셋만 비밀 얘기야. 막말로 정대리는 이제 전략도 아니잖아."
"대리님도요."
"네?"
"이로운 대리님도 전략 아니시잖아요."
강사원의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에 말문이 막혀버린 이대리는 복합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붙다만 강사원의 파리한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직."
강직한 한 마디를 내뱉으며 오늘 처음으로 이대리와 눈을 맞춰주는 강사원이다. 느리디 느린 엘리베이터 안에서 외부인임을 깨달은 불쌍한 청년의 모습이 포착된다. 이윽고 열린 엘리베이터 문을 서둘러 나선 강사원은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강미리씨!"
막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와 짝다리를 짚고선 청년의 외침에 뒤돌아선 강사원은 의외의 질문을 마주한다.
"안 궁금해요? 저 사람들 무슨 얘기 하는지."
태연히 목도리를 둘러 단단히 묶고는 이대리 앞으로 돌아온 강사원이 대답한다.
"네, 안 궁금해요."
2019년 12월 17일 화요일 흐림
<전략처 정대리> ...
기밀 유지 메일이 그렇게 많더니... 이번 건 내가 아니면 안됐던 걸까. 내가. 왜 내가. 하필 왜 내가 이런 티에프를.
<전략처 강사원> 정신 똑바로 차리자
회의 자료 분장은 절대 네버, 가져오면 안돼. 외부인 한 마리 때문에 무슨 꼴이야 이게. 이러면 대체로 신입이 덮어쓰는 경우가 많은데... 해로운 그놈이 성가신 회의를 맡을 리는 없고, 사심위는 할 줄 모른다며 버틸 거고. 최악의 경우 내가 다 뒤집어쓴다. 통계와 회의와 사심위를... 다 같이 한 적이, 전에도 있었지.
<영업처 이대리> 길고양이는 집냥이가 잡아야지
저쪽 공사에서 뭐 하다 왔다고? 일은 얼추 다 아는 것 같은데... 송보강이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라... 최유빈이는 그래도 얼빵하니 귀여웠는데 말이지. 말세다 말세. 신입이. 신입다워야. 신입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