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병

2019년 12월 19일

by 선량한해달

"중국에서 뭔 괴질이 돈다는구만?"

"야, 봤나? 너튜브 보니까 사람들 막 쓰러지고 토하고..."


며칠 사이 발령 따위는 지나간 일이 되어버렸다. 20일자 발령을 맞아 사무실은 꼭 털갈이 시기 시골개의 모양새다. 전보자를 배려해 암묵적인 하루의 휴가 부여된 것이다. 물론 최사원처럼 화를 표출하기 위한 자체 휴업도 더러 있다. 듬성듬성 사람 빠진 자리를 오가며 세 여자가 짐을 나른다.


"언니, 여기 너무 골방이다?"

"오히려 좋지 뭐."

전략처 뒤의 깊고 긴 통로를 지나 왼편 끝 복도에 붙어있는 버려진 회의실. '제2운영실'이라는 이름이 붙은 작은 방에 새로운 TF의 유일한 고정 멤버인 정대리가 둥지를 틀고 있다. 강사원과 감사실 이주임이 뒤따른다.


"어머, 죄송해요. 미리님은 회의 자료 보셔야죠? 저희가 할게요."

"아뇨, 괜찮습니다."


최사원이 싸고 간 똥을 치우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정대리의 이사를 돕고 있었던 강사원은 자연스럽게 회의 자료를 언급하는 정대리가 밉다.


"그래요 어차피 나도 있는데, 뭐. 가요 가."

"...아, 네."


말리는 시누이는 더 밉다. 굳이 19층까지 올라와 정대리의 이사를 돕는 감사실 사람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지난 회식부터 다른 팀 사람의 성화에 계산이 자꾸만 어긋나는 것이 불쾌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 신입은 어디에서든 치이게 마련이다. 마지못해 정리하던 박스를 내려놓고 쓸쓸히 퇴장하는 강사원의 뒷모습이 멀어진다.


"왜 저래? 저 사람 좀 음침해."

"말조심해, 저 언니 과장급이야."

"아, 언니한테도 언니야?? 맞다, 저 사람 공사 경력 길다 그랬었지?"


곁눈질하며 강사원의 사라지는 뒷모습을 끝까지 추적하던 이주임이 골방을 둘러보더니 팩 토라지며 행동에 나선다.


"아유, 이것 봐. 여우 같은 아저씨들!"


세종이나 여의도행을 위한 탈의실로 활용되고 있는 제2운영실의 모양새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겹겹이 쌓인 행거를 툭툭 치며 일부러 8cm 구둣발로 먼지를 일으키는 꼴이 불량배가 따로 없다. 뽀오얀 먼지가 일렬로 늘어선 양복 소매에 엉겨붙는다.


"아니, 응? 티에프 발령을 내려면, 좀, 이 냄새나는 옷들이나, 좀, 미리미리 빼놓고 좀 그래야지. 하여간 인간들이 생각이 없어. 이거 다 그냥 내놓을게, 언니."

"지아야, 그냥 놔둬 알아서들 가져가시겠지."


이미 반포기 상태인 정대리가 큰 동요 없이 구석의 작은 티테이블에 짐을 풀자 솟구쳐 오르는 무언가가 이주임의 사고 회로를 끊고 기어를 당긴다. 급발진이다.


"언니! 언니도 정신 챙겨! 아니, 미친*들 아냐! 어디 지들 맘대로 회사에 피팅룸 만들어 놓고, 어? 여기 고정 멤버라고는 언니 하난데! 그걸 지들 탈의실에 박아놓는다고? 말이 티에프지 여기 인터넷은 돼? 비품 하나라도 가져가려면 복도 걸어서 한세월이겠네. 탕비실은 또 좀 멀어? 예산도 없잖아, 이 티에프. 이 새*들 이거, 양아치야! 여기 옷 놔두면, 어? 티에프 뭐 하는 거 있냐고! 옷 관리하라고! 그게 봉급 값이라고 할 놈들이잖아!"

"..."


조용해진 골방에 짠맛이 감돈다. 가만히 곱씹어보는 정대리는 이주임의 말이 틀린 것도 없다 싶어 멍하니 손을 멈추고 영혼 없는 눈동자를 가만히 굴려본다. 아차한 이주임도 뱉은 말들을 어찌 되담을 방도가 없어 급히 동그란 눈을 깜빡여본다.


"...미안."


지난 비서 겸직 발령의 원한이 불덩이 토하듯 치고 나와버렸다. 애매하고 비참한 공기 속에서 두 청년의 참담한 시간이 흐른다.


"시간 있니?"

"그, 그럼! 나 내려가봤자 있지도 않은 사장 비서야."

이윽고 두 여자의 피팅룸 해체가 시작된다. 마치 세련된 디자인계 사기업 사원인 양 행거를 끌어내는 모습이 강단 있다. 19층 골방에서부터 길게 늘어선 양복 행거가 전략처 뒤의 복도를 따라 줄지어 선다. 본부장실들을 차례로 지나 전략처 강사원의 자리 바로 뒤까지 삐죽이 튀어나온 양복 행렬이 장관을 이루자 어디에선가 한두 명씩 나타난 중년들이 명품 매장에라도 들어선 듯 쭈뼛쭈뼛 어색하게 맴돌다 제 옷을 찾아 자리로 돌아간다.


"와아, 여기 좋네, 언니."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행거가 빠지니 버려진 골방의 실체가 드러난다. 각종 서류가 가득 든 블랙오크빛의 원목 캐비닛과 큼지막한 본부장 책상이 발굴되니 방금 전까지는 초라해보였던 티테이블도 제법 있어보인다. 골방 공기업인의 권력욕이 고개를 든다. 혼자 있기에는 큰 방, 큰 수납장, 큰 책상, 나만의 가죽 소파, 나만의 티테이블. 정대리는 '뭐, 본의는 아니지만 이것도 나쁘지는 않네.'라고 생각하며 감사실 하이에나와 정사각의 구성 좋은 방의 한 모서리에 서서 긴 조망을 감상한다.


"이렇게 나한테도 방이 생기네."



2019년 12월 19일 목요일 맑음


<중부본부 신위원> 뭐야 이건?

기조실에서 사람이 온다고? 크, 새*들. 오는 거야, 심은 거야? 사측 하는 짓 뻔하지. 6급이면 몇 사번이냐, 이게. 꼬꼬마가 뭘 안다고 여길 와. 최유빈... 여자? 민이 후밴가? 민이도 본사 가서 개고생이라던데 내가 노조라 연락하기도 그렇고.


<전략처 최사원> ...

내년 상반기는 최소한 4월은 돼야 할텐데... 시골 가서 이직 준비나 해야겠다. 개새*들. 나한테 이런 수치심을 줘? 공기업 인기 없던 시절에 대충 살다 들어와서 급수 올라가니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말이야. 잘됐어, 어차피 멍청한 놈들이랑 일하기 싫었다고. 준비해서 탈출하면 그만이야. 더러운 놈들.


<감사실 이주임> ...

민이 언니도, 나도. 이 썩어빠진 조직에서 얼른 떠나야 하는데. 그래도 19층엔 방이라도 있지... 왜 나는 잠깐 겸직이라더니 아직도 비선데? 잠깐 쉬다 오라며? 나쁜 놈들. 적성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비행을 접는 게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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