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우와 유빈

2019년 12월 20일

by 선량한해달

"어어, 그래. 강짱돌이가 전화 왔더라. 어이고야아~ 한 2미터 되나?"

"잘 부탁드립니다."


중부 본부 출근 첫날, 최사원은 본부 바로 앞의 원룸을 잡은 덕에 무리 없이 출근할 수 있었다. 급히 잡은 방 치고는 넓고, 깨끗하고, 무엇보다 쌌다. '500에 30', 듣도 보도 못한 깔끔한 보증금에 월세. 최사원은 월 30만 원에 한 달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송과장 말대로 모든 것이 다 있는, 단지 서울이 아닌 곳으로 이주했을 뿐인데 돈 단위가 달라졌다. 마음속 우울감과 분노가 1% 정도 가라앉은 최사원은 출근 전 신축 월세방 옆 커피 전문점에서 분위기도 잡아보았다. 최소한의 짐으로 살자. 미니멀 라이프다. 나는 이제 이곳을 떠나기 위해 다닌다 되뇌며 고소한 에티오피아산 원두향을 즐겼다.


"어~이, 신위원, 여기 좀 갈쳐줘라이. 난 쩌어기. 거, 알쟈?"


보이지도 않는 누군가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제스처를 남긴 나이 든 아저씨 하나가 밖으로 나간다. 주변은 모두 유니폼 투성이다. 누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촌스러운 풀색 유니폼이 사방으로 돌아다니는 통에 정신이 어지럽다. '인민군이야 뭐야?', 최사원은 처음으로 회사 유니폼에 대한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 어쩜 유니폼 색을 저리도 못 뽑았나, 디자인은 또 왜 저럴까, 삐져나온 실밥에 구김살, 빠져나온 무릎, 늘어난 엉덩이. 옷 관리들은 또 왜 저렇게 못하나 생각하며 본부 구석의 소파에 앉아 몇 분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최유빈씨?"


저음의 청량한 목소리가 슬레이트를 친다


"나 민이랑 동기, 16사번."

"아, 예. 19사번...입니다. 최유빈입니다."


양각으로 '신준우'라고 새겨진 왼쪽 가슴의 잿빛 명찰을 엄지와 검지로 흔들어 보이는 멀끔한 청년이다. 잘 다려진 유니폼을 입고 한 손에는 각 잡힌 모자를 들고 서있다. 패션의 완성본을 눈앞에서 처음 본 느낌이다. 조금 전까지 혹평했던 유니폼이 참으로 달라 보인다. '기생오라비?', 따옴표 머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 그랬는데 밝은 듯 어두운 듯 적당한 색채의 회갈색 웨이브가 눈에 띈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괜찮다. 아직 괜찮다. 그래도 키만큼은 내가 이겼다. '175 정돈가?' 앉은 채로 청년을 스캔하던 최사원의 등 뒤로 차가운 한 마디가 날아와 박힌다.


"아야, 궁뎅이가 무겁네이?"


반사적으로 일어서 눈앞의 청년을 향해 허리를 접는다. 정대리와 동기라면 한참 선배다. 갑작스러운 발령에, 갑작스러운 이사, 갑작스러운 등장까지. 너무 넋을 놓고 있었다. 힐끗 뒤를 돌아보니 양말을 반쯤 벗은 왼발을 오른쪽 무릎에 올리고 연신 코를 파내며 유니폼에 이물질을 닦아내는 한 남자가 보인다.


"어? 이대리..님?"

너무 놀라 몸을 틀어 자세히 살펴보니 확실히 이로운 대리는 아니다. 비슷한 사이즈와 스타일의 조금 더 통통한, 그야말로 인민군이다.


"대에~리는 무슨, 현장에 대리를 주긴 준대? 준우 저게 마지막이잖아."


영문 모를 소리를 내뱉고는 휴대폰을 챙겨 쪽문으로 사라지는 인민군을 멍하니 바라보는 등 뒤로 결이 다른 한 마디가 꽂힌다.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라야."


다시 훤칠한 청년이다. 같은 옷이 이리도 다르다니.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최사원 눈앞에 카키색인지 겨자색인지 모를 구겨인 옷더미가 가득 든 마대 자루가 놓인다. 자루 속을 뒤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묘하게 정대리기 겹쳐진다. '이 사람이... 사수?', 마대 자루에 집중한 정돈된 정수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새삼 현실감이 든다. 아까부터 느껴지는 묘한 아저씨 스킨 냄새가 신경 쓰인다. 최사원은 대체 어디에서 이 정체불명의 냄새가 나는 것인지 알아내야만 한다. 두리번거리며 눈앞의 벽면부터 짚어가본다. 한중간의 태극기와 코팅된 슬로건, 미션, 감사패, 상장. 온갖 것들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아, 대리님이 저 슬로건 만들 때 한 달 동안 집에 못 갔다고 그랬었는데.', 본부의 책상과 캐비닛은 어긋나도 한참 어긋난 색상과 디자인이다. 커튼에 반쯤 가린 작은 테이블이 눈에 들어오려는 찰나,


"가만있어봐, 187? 8? 190은 안되지?"

"아, 예... 옙."


이리저리 옷을 들춰보더니 맨 밑바닥에서 눌리고 접힌 거대한 천 쪼가리를 하나 꺼내 최사원 앞으로 쑥 내미는 따옴표다. 상냥한 웃음과 상쾌한 목소리와 구겨진 유니폼과 온몸이 굳은 검정 양복이 한데 어우러져 본부의 초침을 가로지른다. 마대 자루 안에서 도피한 크다 만 바퀴벌레 한 마리가 다급한 듯 어색한 듯 구식 갈색 테이블 밑으로 숨어들고 있었다.


"자요, 갈아입어요."




2019년 12월 20일 금요일 맑음


<중부본부 최담당> 무슨 옷이 이래?

색은 그렇다 쳐도 무슨 옷이 다림질도 안 받고 이 난리지? 누가 이런 걸 유니폼이라고 준대? 이래서 다들 꼴이 그 지경이었구나... 와 씨, 이대리님이 영업이니까 연락 한 번 해볼까? 이건 아닌데.. 무슨 포대자루 입고 있는 것도 아니고 쓸리기는 왜 이렇게 쓸리지? 살 까지겠는데? 그보다... 안 춥나 이거? 소재가 여름 꺼 아냐? 내복도 없는데 어쩌라는 거야. 그리고 이 냄새... 누가 입던 건데 이렇게 아저씨 냄새가 나?


<중부본부 신위원> 헷갈리네.

...그냥 바본가? 척인가?

이전 15화역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