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 이과장 6일에 나올 거고. 응? 미리씬 알아서 잘 허니께 걱정은 안 한다이?"
연말과 연초에 연차를 붙여 10일씩 이어 쉬는 습관이 있는 사람이 어딜 가나 꼭 있다. 강사원에게 무척 해로운 그 사람이 그러한 종류의 인류다. 연차는 개인의 자유이지만 발령으로 어수선한 연말에 장기간 자리를 비우는 것은 너무 매너가 없는 것 아닌가 생각하는 강사원이다. 문득 발령 전 회식 자리에서 전략 일 처음 해본다며 싱글싱글 쪼개던 해로운 모습이 떠올라 불덩이가 솟구친다.
'저 둘은 어떻게 저렇게 친하지?'
강사원이 보기에 송과장이 이대리를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르다. 정대리 때와 비교하면 둘의 무드는 항상 맑음에 가깝다. 공사 출신도 아니고, 전략 일이라고는 해 본 적도 없는 이대리다. 송과장과의 접점은 '없다'. 강사원은 송과장과 유독 사이가 좋은 이대리가 불편하다.
각 부처에서 연말 통계 자료를 요청해대는 통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중부본부로 떠난 최사원의 회의 분장까지 받아 드니 불지옥이다.
'최유비니, 그 개새*!"
이대리도 싫지만 싫어도 상사다. 불타는 증오심도 결국에는 만만한 곳에 꽂히는 법이다. 또 한 명의 발령 피해자인 애꿎은 최사원을 향한 원한을 두뇌에 새기는 강사원이었다. 발령 이후 힐링용 연차와 나이롱 병가가 줄을 이어 제법 비어있는 사무실 공기를 휩쓸며 달콤 알싸한 향이 지난다.
"미리씨, 봉쥬~흐."
오늘도 어김없이 전략처 뒤 좁고 긴 복도로 사라지는 감사실 이주임이 감지된다. 멍하니 향기에 취해 정면을 바라보던 강사원은 저렇게 아무 이유 없이 따르는 사람이 있는 것도 큰 복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굳이 꼬집어 말하자면 이번 발령 최대 피해자는 정대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강사원이다. 하지만 혼자만의 공간에서 생활하며 팍팍한 회사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귀여운 동생이 따라다니는 것을 볼 때면 정대리가 부럽기도 한 것이다. 감사실 이주임은 여느 때처럼 15분 정도 지나면 딸기향 홍차든, 스콘이든 뭐라도 하나 가져 나와 던져주고 떠날 것이다. 가끔 정대리의 안부를 물어다 주기도 하고, 업무 관련 문의를 전해주기도 하는 소중한 메신저다. 조심해야 할 감사라지만 전략처 사람들에 비하면 천사가 따로 없다.
'드르르륵, 드르르르르륵'
웬일로 심성 고운 휴대폰이 짜증을 부린다. '영업처 이로운 대리'. 빛나는 배경화면 중앙에 떠오른 발신자가 여간 껄끄러운 것이 아니다. 이제 전략처 이로운 대리로 이름을 바꿔놔야 할 때가 왔구나 생각하며 억지로 손가락을 쓸어 전화를 받는다.
"행복한 미래와 함께합니다. 전략처 강미..."
"에이~ 미리쒸, 뭘 개인 폰을 그렇게 받아아~ 딱딱하게시리~"
"...네, 대리님."
"그, 택배 혹시 도착했어요? 요만한 상자."
"네? 아뇨, 택배는 안 왔는데..."
"아, 그래요? 송보강 과장님 성함으로 갈 건데 받아놔요."
"네. 그런데... 중요한 걸까요? 들은 바가 없어서요."
"아유~ 중요하지 그럼. 거 한 번에 몇 개밖에 못 보내는 거거든."
"아, 네."
"원래 정대리가 받아서 과장님 드렸었는데 이제 미리씨가 하면 되겠다."
"...네?"
"크크, 진짜 별 거 아니니까 오면 받아놔 줘요. 안뇽~!"
딸깍 끊어진 목소리가 무색하게 한참을 멍하니 멈춘 강사원이다. 휴대폰을 귀에서 떼다 만 채로 방금 이 놈이 무슨 소릴 한 것인지 되뇌어본다. 택배 셔틀을 굳이 해줘야 하나. 기사님이 문 앞에 두고 가시면 각자 찾아들고 오면 되는 것을 왜 내가...
"여기요!"
"!"
허를 찌르는 데가 있는 이주임이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제대로 놀란 강사원이 벌떡 일어서자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이 자지러지게 웃는다.
"하하하, 미리씨, 아 정말, 흐흣, 왜 놀라고 그러세요."
"죄송합니다. 제가 방금 전화를 좀 받느라."
"어머, 내가 연애 방해한 건가? 싸웠어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으이그, 봐줘요, 그냥, 남자애들 원래 그렇잖아요."
"아, 그게 아니라."
"난 그래서 귀엽던데. 남자가 그런 데가 있어야지."
대화를 포기한다. 잠시 곱상한 외모에 홀렸었다. 돌이켜보면 이 사람도 그리 잘 통할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입사하자마자 전략처의 불량한 최사원에 대해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녔던 사람이기도 하거니와 조심성이 없고, 무엇보다 소속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거 먹어요. 민이 언니가 만들어 줬어요."
초코시럽이 정갈하게 뿌려진 크로플이 하트 모양 접시에 담겨 있다. 초코 시럽과 하트 접시는 누가 봐도 이주임 취향이다. 모르긴 몰라도 나에게 주기 위해 따로 신경을 쓴 거다.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다.
"...아, 감사합니다."
"어우! 감사 하지마요! 지긋지긋한 감사. 근데 말이에요."
이주임이 갑자기 몸을 바짝 붙이더니 얼굴을 들이민다. 마치 비밀이라도 말하려는 듯이 주변을 살피며 삐쭉삐쭉 입을 뗀다.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
역시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이다.
"주임님 갑자기 왜..."
"아니, 그렇잖아요. 씨는 좀 아랫사람 부르는 것 같고. 나보다 언니고, 경력도 기신데. 그런 거 싫단 말야."
"...아."
난처하다. 이쪽에서 언니라고 부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 용감한 고백을 딱 잘라 거절할 수도 없다. 그렇게 우물쭈물하는 사이 이미 결론은 지어졌다.
"그런 지금부턴 언니다아?"
애초에 정해진 거였다. 저 작은 요정의 계획은 틀어질 리 없었던 것이다. 저 사람이 날 언니라고 부르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이미 난 언니였던 것이다.
"빠아이~!"
'안뇨옹'에 이은 '빠아이'다. 몇 분 사이 두 이에 사정없이 휘둘린 강사원은 진이 빠진다. 힘없이 자리에 앉으려는 찰나,
"언니!"
"네?... 아, 네. 네."
한 손에 작은 택배 상자를 들고 다시 사무실 입구로 들어온 이주임이 포착된다. 한 손으로 이리저리 흔들어 보더니 송장을 뚫어지게 바라보고는 알았다는 듯이 빙긋이 웃고선 작은 악마같이 활짝 웃으며 강사원을 바라본다.
"던진다아?"
"네??"
사무실 입구인 중앙에서 오른쪽 끝 전략처까지 스트레이트로 날아드는 작은 택배박스가 공기를 가른다. 얼떨결에 상자를 받은 강사원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른다.
'미친 거 아냐??'
해도 너무한다 싶어 고개를 들어보니 이주임은 이미 온데간데없다. 당황해 무게를 가늠하지 못했지만 물건은 상당히 가볍고 작다. 송보강 과장 앞으로 도착한 택배다. 아마도 이대리가 말한 그 택배일게다.
'뭐야 이거? 송장이 뭐 이래?'
송장을 뜯어살피다 품목에 눈이 멈춘다. 그곳엔 영문 모를 과자 이름이 쓰여있었다.
'솜사탕 gold*2'
2019년 12월 24일 화요일 맑음
<티에프팀 정대리> 찰나의 평화
오늘은 지아랑 새로 산 와플기를 시험해봤다. 감사실 크루아상이 참 맛있네. 크루아상이 맛있으니 크로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상큼한 딸기를 하나 올리니 딱 좋다. 지아는 회사에 홈메이드 카페가 생겨 기분이 좋은지 초코 시럽에 휘핑크림까지 가져왔다. 너무 달았지만 그것도 그것대로 맛있다. 한 번 정도는 이렇게 단 것도 먹을만하지 뭐. 언제까지 이 평화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처장님 말씀대로 누리자. 즐기자. 난 이제 별동대니까.
<감사실 이주임> 나 한정 민이 언니네 카페
민이 언니네 카페에 와플기가 들어왔다. 내일은 와플 믹스를 가져가 봐야지. 맨날 죽상이던 사람이 오랜만에 웃는 걸 보니 행복하네. 뭐, 죄책감은 들지만 나도 내 일은 해야 하니까. 이렇게 같이 웃으면 언젠가 뒤에서 칼을 꽂아도... 조금 덜 아프겠지. 우리 민이 언니.
<전략처 강사원> ...
...시럽이 너무 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