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숲 속의 산타 최
2019년 12월 25일
"어이, 꺽다리. 이거 막내 니가 입으면 되겠네."
최담당은 휴일에도 쉬지 못하는 현장의 비애를 인생 최초로 느끼고 있다. 흐늘쩍한 초록색 나무 의상에 몸을 욱여넣으며 새어 나오는 실소를 억지로 참아본다. 사무실과는 다른 자유로움이 제법 마음에 들긴 하지만 하루 내내 인간 트리가 된다고 생각하니 앞이 까마득하다. 의상을 입는 시간을 나누어 분담을 해도 될 텐데, 사무실과는 다른 묘한 위계질서가 신경을 긁는다. 어딜 가도 막내, 막내 지긋지긋하다. 간혹 아주 앳된 얼굴도 보이는데 대체 몇 살들인지 의문이다.
"야, 막내, 옆에 서봐. 이 봐봐, 트리랑 딱 설레는 눈높이라는 거 아냐 이게. 이런 거에 여자들이 껌뻑 죽는거그등. 내가 또 젊을 때 동시에 아홉 명 사귄 적이 있잖냐~"
시시때때로 밀고 들어오는 듣기 거북한 사적 발언들이 이곳이 감사실과 거리가 있는 현장임을 실감케 한다.
'보고서 사진이 필요하면 얼른 찍고 가면 될 것이지. 말만 더럽게 많네!'
전략처 시절 끊임없이 말조심하라는 주의를 받았던 것이 무색할 지경이다. 같은 회사가 맞는지조차 모르겠다. 그나마 멀쩡한 사람은 첫 날 봤던 준우 선배뿐이다. 그가 유일하게 최담당에게 존댓말을 써주는 사람이다. 이런 질 낮은 사람들과 같이 생활해야 하다니. 숨 쉬는 일분일초가 역겹다. 사무실에서도 몇 번 지적을 받았던 최담당의 나쁜 기질이 끓어오른다. 주변 모두가 미개한 동물로 보이기 시작한 그때였다.
'우다다다다!'
갑자기 발소리가 어지럽게 들리더니 조금 전 흐트러진 모양새는 온데간데없고 키순으로 2열로 늘어선 선배들이 트리 옆에 바짝 붙는다. 위화감이 든다.
'뭐야, 이거.'
늘어선 남자들의 침 넘기는 소리에 덩달아 긴장한 최담당은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린다. 이 사람들이 조금 전까지 질 낮은 농담을 주고받던 양아치들 일리가 없다. 선배들의 시선이 멈춘 곳을 따라가보니 저 멀리 민방위복 무리가 보인다. 준수한 외모의 준우 선배와 중부 본부장님이 가운데의 작고 검은 남자를 에스코트하고 있다.
'처장님?!'
휴일을 맞아 현장 행사를 보러 나온 시찰단이다. 준우 선배가 유독 멋있어 보인다. 평소에는 쓰지 않던 모자까지 갖추어 쓰고 처장단을 안내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부럽다. 손동작 하나까지 각이 잡혀 먼 거리에서도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 것인지 알 것만 같다. 처장단이 다가올수록 진땀이 난다.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하, 시*.'
인간 트리가 되어 얼굴에 초록칠을 하고 눈동자를 꿈뻑이며 선 스스로가 부끄럽고 원통하다. 인민군 같아도 유니폼이었으면 차라리 나을 뻔했다. 제발 지나쳐가라 마음속으로 외쳤건만 야속한 준우 선배는 처장단을 인간 트리 옆으로 안내한다.
"어, 그래 수고하는구만."
"아, 안녕하십..."
"고생 많아요."/ "수고해요."/ "수고."
지난주까지 매일 마주치던 처장님들이다.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최담당을 잊었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전략처 신입 따위 안중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줄지어 형식적인 인사를 던지더니 아무 일 없다는 듯 옆에 와 포즈를 취한다.
"거기 잘생긴 유니폼씨 한 칸 앞으로."
"넵!"
최담당은 현장을 누비는 홍보실 사람을 눈앞에서 보며 홍보실이 액세스뉴스를 캡처해 전사에 뿌리는 Ctrl C, V 부서가 아님을 새삼 깨닫는다.
"처장님들, 주먹 꽉 한 번 쥐어 주시고요!"
저 사람의 말대로 모두가 움직인다. 그 대단하신 강처장님도 웃으라면 웃고 주먹을 쥐라면 쥔다.
'저 여자가 누구더라? 대리? 과장? 민솔... 뭐라 그랬던 것 같은데?'
애써 기억을 더듬는 도중 번쩍 섬광이 두어 번 지나자 처장 무리가 무표정으로 빠져나가 그대로 본부장실로 향한다. 줄지어 이동하는 모습이 무척 멀게 느껴진다.
'처장...님.'
강처장은 너무 멀었다. 처장단의 한중간에 선 탓에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하기야, 봤어도 막내 사원, 아니, 막내였던 사원 따위 알아보지도 못했을 거다. 어제의 직속 상사가 이제는 인사도 못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음을 깨닫고는 씁쓸히 마른 침을 삼킨다. 전략처는 너무 먼 곳이 되어버렸다. 이곳에서는 오로지 준우 선배만이 처장단과 얼굴을 맞댈 수 있다. 현장은 그런 곳이다.
"어이, 나무! 사다리는 쩌어기. 철수할 때 텐스랑 다 치우고 와라이."
"...네? 테...텐?"
삽시간에 흩어진 불한당들은 한 마디 설명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나무 옷은 계속 입고 있으라는 건지, 사다리는 왜 언급한 건지, 텐..스?는 또 뭔지. 머릿속이 엉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최담당 주변에 사람들이 모인다.
"엄마, 나 이거랑 사진 찍을래."
인간 트리 주변에 모여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들이 인정사정없이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댄다. 개중에는 전문가용 카메라로 사진가 포스를 뽐내는 분들도 계시다. 푸르디푸른 내 모습이 부끄럽고 비참하다.
'나는 나무다. 나무다. 나무다.'
두 눈을 감고 가만히 선 채로 어린이들과 연인들에게 수차례 모욕당한 최담당은 점심도 거르고 꼬박 세 시간을 나무 의상 속에서 철학하며 인생을 되돌아봤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햇빛은 왜 또 이리 얼굴 정면에 들이붓는가. 지금껏 아무도 이 망할 햇빛을 보고한 적이 없나. 자포자기 상태가 되자 화도 가라앉는다.
'어차피 떠날 거......'
그렇다. 떠날 마음이었다. 무슨 일을 당하든 알 바 아니다. 그저 머물다 조용히 뜨면 될 일이다. 나무옷 입은 게 뭐 대순가. 지난 발령부터 이미 액세스공사의 귀퉁이에서 아무도 모르는 허드렛 나무 역할을 하고 있지 않나. 질 낮은 인간들일랑 잊고 이 집단 괴롭힘에서 벗어날 궁리를 하는 게 살 길이다.
"최담당님, 교대 왔습니다."
"?!"
준우 선배다.
"...아, 교... 교대요?"
"네, 시간 빨리 가죠? 줘요 줘. 어우, 땀 봐. 고생하셨네."
별안간 나무옷이 준우 선배에게로 넘어간다. 차가운 공기가 폐를 파고든다. 겨울의 상쾌함이란 이런 것인가 감탄하고 있을 때쯤 넋이 나간 최담당 앞에서 새로 탄생한 나무 인간이 전등을 온몸에 두른다.
'?'
이 인간이 뭐 하는 건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새 인간 나무의 온몸에 불이 들어온다. 나무의 엉덩이 뒤로 삐쭉 나온 전선이 굽이쳐 트랜스와 연결되어 있다. 뒤편의 쪽문 안쪽에서 선을 따온 모양이다.
'뭐지? 전기실인가? 통신실?'
처음 보는 쪽문에 의구심을 품으려는 찰나 선배의 주문이 들어온다.
"어때요? 봐줘봐. 전구 나간 거 없어요? 일 년만이라서요."
"...아, 예. 아..., 좋습니다."
"굿. 내가 이 날을 기다렸지. 크크크."
몰려드는 어린이떼를 능숙하게 놀리고 겁박하는 인간 나무가 차가운 공기를 따뜻하게 데운다. 반짝이는 미인 주변에 남녀노소가 모여들자 멀찌감치 선 민방위대 처장단이 흐뭇하게 인간 나무를 바라보고는 현장을 떠난다. 홍보실에서도 기어코 사진 몇 장을 더 찍어간다. 저 사진은 보고서나 브로셔의 중앙 즈음에 박힐 것이 분명하다.
'현장에는 저런 사람이 살고 있구나.'
왠지 모를 패배감. 선배는 선배다. 적성도 적성이다. 전략처에서도 버려졌는데 현장에는 범접할 수 조차 없는 사람이 살고 있다. 저런 놈은 종류가 다른 놈이다. 싸워볼 수가 없다. 태초부터 빛나는 사람이다. 나는. 안 맞는다. 터덜터덜 본부로 돌아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괜스레 땀에 절은 옆머리를 쥐어뜯는다. 슬슬 탈모가 걱정된다. 아무도 없는 본부는 고요하고 편하다. 조금 전까지 처장단들이 앉아있었을 터다. 시계 초침 소리가 최면을 걸어온다. 땀냄새와 온기와 먼지 냄새가 뒤엉겨 절묘하게 편안한 흐트러짐을 만들어낸다. 눈이 스르르 감긴다.
"...씨, ...빈씨, 유빈씨!"
"아, 옙, 네? 아, 네!"
세차게 흔들리는 어깨 앞에 땀범벅인 인간 나무가 서있다.
"나...나무? 준우 선배?"
"뭐해! 빨리 와! 종무 해야지!"
"네? 조...종..?"
불 꺼진 본부에서 웬 인간 나무가 몸집이 두 배는 되어보이는 덩어리를 잡아끌어 맞은편 쪽문으로 뛴다. 영문모를 덩치는 그저 자다 깬 모양새로 발만 뛰고 있을 뿐이다. 뇌가 작동하기 시작한 건 생전 처음 보는 쪽방 사무실에 들어선 다음이었다.
"최유빈이, 너 이 새*!!"
준우 선배가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날 것 그대로 달려온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웬 털보 하나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복식 호흡을 하며 성악가처럼 소리를 내지른다. 한참을 그러다가 화를 가라앉히는 듯하더니 갑자기 조용해진다.
"종무한다, 실시."
"..."
"최유빈이!"
"넵."
"종무한다, 실시."
"..."
'종무? 뭐야 그게?'
새하얘진 머릿속에서 종무가 무엇인지 배운 적이 있나 되짚어본다. 잠들었던 뇌가 도통 깨어나려 하질 않는다. 당황한 기색의 준우 선배가 나선다.
"부본부장님, 제가 사숩니다. 아직..."
"넌 뭐야? 나무야?"
"..."
이건 아무리 신위원이라 해도 당해낼 재간이 없다. 나무에게 장황하게 설명할 기회 따위 주어질 리 없다. 다시 최담당에게 화살이 꽂힌다.
"시간은?"
"..."
"소속은?"
"..."
말라붙은 입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다. 아직 밖은 어두워지지 않았는데 몇 시쯤 된 것인지 감도 오지 않는다. 지금 시간을 말하면 되는 걸까? 소속은... 가만있어봐, 어디지? 난 얼마나 잔 걸까?
"넌 일머리가 없냐?"
뒷짐진 털보가 코앞까지 다가온다. 이 회사에서 이렇게 큰 사람은 처음이다. 어쩌면 나보다 더 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덜컥!'
이 타이밍에 본부장이 뛰어든다.
"어이고오~! 성님!"
'으윽, 술냄새.'
각 담당들을 지나쳐 털보에게로 달려가는 본부장의 모습이 마치 아버지를 향해 달려드는 어린 딸 같다.
"이야아~ 우리 처장님 그냥 신수가 훤하시네. 몸은 더 좋아지셨구마이."
"까분다."
오가는 대화로 짐작건데 저 털보가 본부장보다 더 위다. 그리고. 저 털보는 처장이다?
'저런 처장이 있었나?'
"성님, 요 앞에, 응? 가자고오~"
마침맞게 달려든 본부장이 성난 털보의 화를 누그러뜨려 술자리로 안내한다. 대화로 보아 아마도 오랜만의 술자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잘들 하자."
무게 실린 한 마디를 남긴 털보가 사라지자 여기저기서 거친 안도의 숨이 새어 나온다. 최담당은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작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다. 본부장의 경망스러운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저 멀리 잦아들어간다.
"야, 저 새* 종무도 몰라?"
"아, 제가 오늘 교육했어야 하는데 오전에 처장단 수행 때문에..."
"...아, 징글징글한 처장 새*들."
"그래, 니가 고생했네. 옷 갈아입어라."
"예."
"가요."
준우는 최담당에게 눈짓을 보내고는 굳이 육중한 덩치를 끌어당긴다.
"걔는 두고 가."
"제가. 잘 말하겠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
끊어진 대화 속에서 선배들의 기싸움이 일어난다. 사번은 한참 차이가 나지만 자기를 지키려는 사수가 중부본부의 신망 두터운 신위원인 것이 최담당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하, 씨. 쳐돌았나, 본부에는 왜 쳐기어들어가? 거기가 어디라고! 하, 그래, 데려가라. 보기도 싫다."
'지금 혹시 들으라고?'
상황 파악이 안된 최담당은 묘한 표정으로 변해 막말을 내뱉는 남자를 쏘아본다. 정면을 가로막고 선 인간 나무 덕에 그 모습이 가려진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가요."
최담당은 쏘아보는 눈을 거두지 않고 그대로 준우를 올려다본다. 애초에 당신이 잘 알려줬으면 생기지 않았을 일 아니냐는 듯 원망과 분노를 한껏 담아 하찮은 인간 나무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일어나."
이번에는 꼴에 선배랍시고 명령을 하냐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슬금슬금 거대한 몸을 일으켜 인간 나무를 따라나선다. 이 질 낮은 인간들과는 하루도 더 있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며 쪽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는 듣기 싫었던 그 말이 기어코 귀퉁이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야 만다.
"근데 저 새*, 인사는 일부러 안 해?"
2019년 12월 25일 수요일 비
<중부본부 신위원> 애초에 글러먹은 건가?
태도가 나빠서 본사에서 방출됐다는 소문이 있었던가? 고분고분한 성격은 아니고. 사람 대하는 재능은 아예 없고. 인사성도 없는데 뭘 어디부터 가르쳐야... 아무것도 몰랐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글러먹은 건가? 정민이한테 연락을 해봐야... 아니, 아니야.
<중부본부 최담당> 아이씨, 창피하게
본부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개방하고, 평소에는 맞은편 쪽문 사무소를 이용한다. 출근하면 출무 신고, 퇴근 전에는 종무 신고, 전원 일보 제출. 아무도 안 알려주면 내가 어떻게 알아? 물론 잠든 건 내 잘못이지만... 아 씨, 내가 왜 잠들었지? 여지껏 현장 일을 해봤어야지. 돌아가는 것도 모르는데 아침 내내 인간 나무나 시킨 것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