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포트의 연수가 끓는점에 도달할 무렵 딸칵 전원을 내린다. 포트의 손잡이를 오른손으로 단단히 잡고 가볍게 한 바퀴 돌리며 열을 식힌다. 97도가량의 열탕 물을 필터에 축이고 잠시간 머그를 데운다. 그라인더에서 방금 갈린 신선한 원두를 크게 두 스쿱. 파르륵 뜨거운 물이 닿자 브그그 커피빵이 부푼다. 정대리는 커피빵이 부푸는 소리도 모양도 향기도 마음에 든다. 퍼스트 드립, 얼마간의 시간을 두고 세컨드 드립. 따스하니 맛이 좋다. 09시 30분,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1분 1초의 투쟁을 이어가던 사무실을 벗어나 누리는 골방의 자유. 수준 높은 드립커피로 아침을 여는 것은 중부본부 시절 이후 처음이다.
시원한 수풀향과 커피향이 어우러지자 4년 차의 묵은 체증이 가라앉는다. 나만의 향기가 살아있는 사무실, 회사라는 곳에 처음으로 생긴 내 방이다. 정대리는 촌스러운 짙은 자주색과 갈색이 번갈아 깔린 카펫 타일을 눈으로 따라가다 눈부시게 밝은 회색으로 마무리된 모서리에 눈을 멈추고는 '푸흡'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아무리 바닥재가 모자란다 해도 저 색은 아니지 않나?'
예술가적 감성으로 신랄한 인테리어 비판을 시작한 두뇌가 덜그럭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정대리는 이 회사에 와서 처음으로 두뇌가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흡사 중부본부의 맥락 없는 인테리어다.
'거기도 찐갈색 인테리어였는데. 여긴 다들 취향이 미쳤네.'
추억을 떠올리며 빙긋이 웃음 짓는 정대리의 모습이 낯설다.
그래도 그곳에는 사람이 있었다. 본부장님도, 부장님도, 각 담당들도. 이 사막 같은 곳에 비하면 인간미가 넘치는 곳이었다. 가만히 구석에서 커피를 내리는 막내 담당을 위해 작은 테이블을 하나 얻어오신 본부장님이 정대리만의 공간을 만들어준 날,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던 착하고 순했던 본인이 떠올라 헛웃음이 새어 나온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기 전, 막내 담당이 내리는 모닝커피는 본부의 활력소이자 구심점이었다.
'쾅!'
벌컥 열어젖힌 문 뒤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작고 동그란 송과장이다.
"..어어, 어. 정대리."
입에 갖다 댄 머그를 잠시 멈추고는 눈동자만 들어 송과장을 스윽 스캔한 정대리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눈동자를 제자리로 돌려 커피향을 씹어 넘긴다. 왜 하필 저 인간이람. 코 밑에 붙은 머그잔 속으로 향한 시선이 여유롭기 그지없다.
"쩌어기저기 저.. 뭐냐, ...그, 회... 회색."
송과장의 등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모금 크게 들이킨 정대리가 큼지막한 본부장 책상으로 돌아들어가 앉는다. 책상 앞에 비스듬히 엉덩이를 걸치고 서서 커피를 마시던 정대리가 대꾸도 없이 느릿느릿 움직이자 송과장은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한 발 들어설 듯하다 다시 문 밖에 서서 읍소한다.
"그, ...회색 마이. ...그, 겨울용. 전에 세종 갈 때 입었던 거. 몰러?"
정대리는 멀쩡한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애먼 파일들을 꺼내 책상 위에 늘어놓으며 공중에 대답을 흩날린다.
"탕비실요, 싱크대 옆에."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는 송과장이다.
"아아니, 정민이 너는 말이여, 응? 중요한 옷을, 응? 어디 거어다 넣어놔?"
서랍을 탁 닫고는 정대리가 일어선다.
'하 씨, 진짜.'
5cm 통굽 로퍼로 갈아 신은 거대한 괴물이 송과장에게 다가간다. 기골이 장대한 정대리가 점점 커지며 다가오자 송과장이 반발짝 주춤 뒤로 물러선다.
"그러게요, 왜. 누가. 그걸 거기다 넣어뒀을까요?"
폭력배 영화에나 나올법한 바로 선 눈동자로 단어를 하나하나 끊어가며 송과장을 비껴 날리는 말이 차갑고 기분 나쁘다. 괘씸함을 앞서 민망함이 밀려든다. 한 발 멀찌감치 떨어져 선 정대리가 이번에는 45도 사선으로 혼잣말을 흘린다.
"4일 동안 먼지 타서. 누가 쓰레긴 줄 아셨나 보네."
원컷으로 모든 대사를 매끄럽게 처리한 정대리가 '텅' 하고 송과장의 면전에 대고 제2운영실, 아니 TF실의 문을 닫는다. 기밀 TF실의 문을 유일한 고정 멤버의 허락도 없이 연 자의 말로는 생각보다 더 매웠다. 겸직 팀장 따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송과장은 정대리를 보내기 전 마지막 회식 자리에서의 강처장의 당부를 떠올리며 굳은 입술로 돌아선다.
"으응, 그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알았고? 응. 나도, 응? 이제 너, 내 새끼 안 할 거고? 응."
전략처의 한 팀장과 전 실무자의 공식적인 갈라섬은 작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간결히 이루어졌다. 송과장은 걸레 옆에 놓인 값비싼 양복을 수습하러 어두운 탕비실로 숨어들어 한참을 나오지 않았고, 정대리는 맛을 버린 커피를 쏟아버리고 제 향기로 가득 찬 작은 골방에서 새 커피를 내렸다. 수많은 원한으로 얼룩져있는 액세스 공사의 인간관계에 엉겨 붙어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을 '새 균열'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2019년 12월 23일 월요일
<전략처 송과장> 아니 내가 보냈어?
내가 보냈어? 내가 보냈냐고오? 참 내. 성깔머리 하고는. 겨우 3년 된 것이, 아, 가만있어봐, 4년인가? 뭐, 내 알 바 아니고. 3년이나 4년이나 10년이나 꼬맹인 건 매한가지 아녀? 하는 꼴이 가관이여. 응? 막말로 지가 사장이여 뭐여? 큰 방 얻으니 그게 지 꺼 같나 보지? 정민이 고게 베실베실 웃고만 다니더니 마음속에 권력욕이 있었다?
<전략처 강사원> 왜 내가...
회의 진행까지 해버렸다. 이건 이제 내 업무다. 이로운이 그 자식 때문에...
<TF팀 정대리> 액세스공사의 힐링포인트
저 수납장을 커피장으로 쓰면 되겠어. 집에 홍차도 많으니 싹 다 옮겨와야지. 햐아~ 회사에서 포트넘앤메이슨을 즐기게 될 줄이야. 에어프라이어도 하나 가져다 두면 스콘 굽기 좋겠는데? 메인 책상은 큼직해서 다행이야. 공부하기 좋겠다. 행정법이나 좀 봐둘까? 처장님 오더 떨어지기 전까지 잘 버텨보자.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 그날 처장님이 하신 말씀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딜 가도 지옥인 건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