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2

2019년 12월 3일

by 선량한해달

"유빈님, 명사형 어미 뒤에 마침표 찍지 마세요."


송과장의 알 수 없는 분노로 이번 주 회의는 정대리가 진행했다. 몇 주간 잘 해왔다고 생각했던 최사원은 풀이 죽어 버렸다. 모처럼의 어린이날을 맞아 점심 대신 1층 카페에 모인 셋이 속내를 터놓는다.


"통일시킨다고 명사형 어미 뒤에 마침표 찍는 부서가 많아서요."

"모든 건 다 송과장님한테 맞추시면 돼요."

"서체나 폰트 크기 통일하는 것만 해도 죽겠는데 다른 부서 회의 자료까지 제가 작성하는 기분이라니까요."

"우리가 회의 주관 부서니까 어쩔 수 없죠 뭐."

"세네 줄씩 줄글로 작성해서 주는 부서들 너무 많아서 미치겠어요."

"그쵸, 그거 줄이는 거 진짜 일이지.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업 내용을..."

"제일 싫은 게 뭔 줄 아세요? '~함.'이렇게 끝내는 거요."

"아하하하, 알죠 알죠, 과장님 보시면 극대노각인데 그거!"

"'하다동사 단순명사화+마침표' 조합 때문에 잠이 안 와요."

"아, 너무 와닿는다. 날짜도 그렇지 않아요? 가운데 점만 찍어서 주는 사람들 많잖아요."

"맞아요! 보고 부서 입장에서는 월, 일을 줄인 건데 두 개를 찍어야지 왜 가운데만 찍어, 하."

"괄호 요일 폰트 크기 엄청 크고 막."

"제 말이요!!"


정대리와 최사원의 티키타카를 가만히 듣고 있던 강사원이 가만히 입을 연다.


"저..., 대리님."

"네?"

"영업 이로운 대리님이요."

"네네."

"원래 기조실에 계셨었나요?"

"아뇨, 영업으로 입사해서 쭉 영업에 계셨어요."


강사원은 몇 초간 골똘히 생각하더니 갸웃하며 정대리를 바라본다.


"친하세요?"

"친... 하다기보다는, 제가 도움을 많이 받았죠. 저희가 거기 차장님이랑 좀 안 좋아요. 이대리님 없었으면 영업에선 회의 자료 주지도 않았을걸요? 사람 지인짜 좋으세요."

"네에..."


강사원은 잠시 끊어진 대화를 재개하며 화제를 바꾼다.


"새 사장님 결정된 건가요?"

"아,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저씨들 그거 때문에 다들 바쁘신 것 같긴 한데."

"지난주에 이대리님이 인쇄하셨던 거 신상명세 맞죠?"

"그렇대요. 새 사장님 오시면 영업 쪽이 힘 좀 받을 거라는 소문이 쫙 퍼졌더라고요."


최사원이 끼어든다.


"그럼 이제 회의 거기서 가져가요?"


정대리의 입이 탁 막히자 강사원이 어이없다는 듯 눈을 공중에 흘기며 고개를 잠시 떨군다. 그러더니 다시 입을 뗀다.


"혹시... 저쪽이 확장될까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현장을 더 늘릴 수는 없으니 사무실이 늘겠죠? 아니면..."

"아니면...?"


뜸 들이는 정대리의 마른 입술에 두 사원의 눈이 멈춘다.


"이쪽이 축소될 수도... 있고요."

"어떤 식으로 축소될까요?"

"그건 저도 잘 몰라요."


두 누나의 대화를 들으며 요지를 파악하던 최사원이 불현듯 어두워진 안색으로 달려든다.


"우리... 짤려요?"


다시 입이 탁 막힌 정대리는 이내 표정을 풀고 귀여운 동생을 대하듯 입을 뗀다.


"아뇨, 공기업 좋다는 게 뭐야, 여기 왜 왔어, 해고 같은 건 웬만해선 없죠."

"그럼 뭔데요? 축소가 뭔데요."


"조.직.개.편."


묵직한 한 마디를 새어낸 강사원의 입이 매섭다. 정대리는 무언가 알았다는 듯 강사원에게 말을 건다.


"아, 그러네, 미리님은 대규모 개편 여러 번 겪으셨죠? 저보다 더 잘 아시겠다."

"..."

"전 지난 큰 개편 때 본사 발령받은 거라 잘 몰라요. 이후엔 짜잘짜잘한 개편이었고. 그 전까진 현장 인원이었어서 회사 돌아가는 거 관심도 없었어요. 큰 개편 때 사무실 분위기 험악했었다던데."

"그랬을 거예요."

"3년 전이면 저쪽 공사 계실 때죠? 그때 거기랑 맞물려서 대대적으로 조직개편했었던 것 같은데..."


정대리는 강사원의 변하는 안색을 살피다가 이내 입을 멈춘다. 사람의 상처를 건드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ㅇㅇ공사 출신들은 모두 사연이 있다. 아랫사람이라고 없을까. 어쩌면 이 언니는 어린 만큼 윗동네 아저씨들보다 더한 고통을 겪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정대리다.


"뭐, 우리가 축소되든, 저기가 확대되든. 저 같은 대리 나부랭이는 상관없네요. 현장 보내주면 저야 땡큐죠."

"대리님, 우리 현장은 어때요? 동기들은 잘 적응하고 다니는 것 같던데."


최사원이 끼어든다.


"음... 거긴 일이 연속적이질 않아요. 특이 사항 없으면 그날 일은 그날 퇴근하면 끝이에요. 그게 참 좋아."

"사람은요?"

"사람... 사람이라... 사람 나름이긴 한데 인사 잘하고 싹싹하면 별 문제없어요. 여기처럼 막 20시간씩 같이 일하고 먹는 건 아니니까."


두 사원은 정대리의 현장 체험 수기를 들으며 커피로 입안을 적신다. 그러다 무심결에 흘린 정대리의 담담한 마지막 한 마디에 손끝과 이목구비가 일순간 굳어버리는 것이었다.


"아, 거긴 한 분기에 한 번은 경찰 조서를 써. 범죄자나 정신병자를 꼭 만나거든요."




2019년 12월 3일 화요일 맑음


<전략처 정대리> 또 현장인가

가고 싶다 가고 싶다 말은 하지만 가능하면 피하고 싶다. 다시 돌아가서 현장 선후배들 볼 낯도 없고. 만에 하나 현장으로 가게 된다면 최대한 멀리, 콕 틀어박혀서 자기 관리나 하면서 살 수 있는 한직으로 보내줬으면 좋겠는데. 나 같은 일개 대리에게는 사친가? 잠깐, 토익이 만료됐던가? 스피킹은 아직 1년 남았고, 일본어는 언제든 보면 되고. 컴활이랑 한국사는 기한 없으니 됐고. 하... 씨 누가 공기업이 안정된 직장이랬어. 그런 말 한 새*들 어디서 무슨 일들을 하고 사는 거야. 정권 바뀌었다고 조직개편, 새 사장 온다고 조직개편, 헌 사장 간다고 조직개편. 뭐 이러냐... 하...


<전략처 강사원> 조직은 개 편

난 항상 개편 운은 없었으니... 신입이라 현장으로 보내진 않을 테고 전보라 치면 어딜까? 사공? 재무? 영업은 날 못 보는 양반들이 천지니 안 받을 테고. 기차장님 아래도 괜찮은데... 어디든 이로운 대리만 피하면 된다. 속을 모르겠는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 아닐 수는 있지만 좋은 사람은 아니다. 좋은 사람은 느낌이 오는 법이니까. 이로운 대리만 피한다면 이번 조직개편은 성공으로 생각하고 감사히 살자. 여기는 좀 덜할 줄 알았더니 조직이 작아서인지 더 안 좋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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