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부일체

2020년 1월 24일

by 선량한해달

"미리씨, 오늘 오리고깃집."

"네?"

"어차피 야근이니까 차장님 좋아하시는 거 먹자고."

"...아, 그럼, 축하파티는..."

"됐고, 그냥 와요."


아, 역시 해롭다. 정신 건강에 특히 해로운 사람이다. 지난주 승진파티 타령 때문에 저렴하고 깨끗한 식당을 찾느라 며칠을 고생했다. 열심이었던 스스로가 한심하다. 24일 금요일로 날짜를 정해주길래 식당 정보까지 공유했는데 갑자기 이 꼴이다. 모든 게 없던 일이 되는 경우는 많지만 이런 식은 아니다. 한 사람의 독단이 비업무적 과제를 생성하고 제 맘대로 당일에 모든 것을 무로 돌렸다. 허탈함과 작은 분노가 치민다. 참자. 직장 생활 10년이다. 별 꼴을 다 겪었다. 이런 일도 있는 법이다. 괜찮다, 괜찮다.

"네, 사장님, 죄송합니다. 7시 반 세 명 예약했는데요. 저희가 오늘 못 가게 됐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갑작스러운 죄인행이다. 죄 없는 자영업자의 사업에 손실을 끼친 것에 대해 급히 사과하고 나니 다시금 화가 치민다. 참자. 참아야 한다.


"아이고~ 예약까지 했어? 웬일이래? 승진 축하 안 하고 싶어 하더니?"

'?!'


강사원은 잡고 있던 줄을 놓기로 한다. 아니, 어쩌면 이미 놓은 줄이었다. 끓어오른 양은 냄비 위에 간신히 덮여 있었던 뚜껑이 차오르는 거품을 이겨내지 못하고 터져버리는 순간이었다.

"이미 날짜, 장소까지 정하지 않았었나요?"

"아이고오~ 선물도 안 하려는 사람인데 그런 거 시키면 미안하잖아."

"과한 선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게 그거지."

"..."

"왜? 편해졌잖아? 빨리 결정해서 이렇게 진행하면 될 걸 뭐 어렵다고 그렇게 질질 끌어."

"그러니까 제 말은..."

"10분이면 끝날 걸."

"하아."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비튼 강사원의 입에서 대놓고 새어 나오는 한숨이다. 이과장은 잠시 눈치를 보다가 다시 입을 연다.


"넷이에요."

"..."

"우리 한 명 더 가도 되죠?"

"..."

이미 틀어져버린 강사원의 입은 하루종일 열리지 않았다.


'누가 또 온다는 거야? 정대리님? 아니야, 정대리님이면 말했겠지. 기차장님? 처장님?'


해결되지 않은 의문을 품은 채 승진 파티 대신 잡힌 저녁 일정을 향해 천근은 족히 될 발걸음을 옮긴다. 팔자에 없었던 수저를 세팅하고 물잔과 술잔을 각각 엎어둔다. 한 명 분을 더 챙기려니 그것도 일이다. 평소처럼 로스 하나, 양념 하나 주문을 마치자 송차장과 이과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이고, 우리 미리씨 일찍 왔구먼, 응? 고생허고, 응?"


오늘 유독 듣기도 보기도 싫은 송차장이다. 잘못은 이과장이 했지만 왜인지 송차장이 더 보기가 싫다.


"차장님, 오늘..., 그..., 한 명 더 옵니다."

"응? 누구?"

"제가 소개시켜드릴 사람이 있거든요. 큭."


오자마자 인사도 없이 자리에 앉아 자연스럽게 냅킨으로 손을 닦으며 가부좌를 트는 늙은 놈과 어린 놈이 괘씸하다.

"응? 왜에? 응? 뭔데? 나 저기저기저, 청탁은 안 받어. 우리 전략처는 이제 픽스여. 이 멤버가 딱이여."

"에~이, 그런 거 아님다. 그... 개인적으로 소개시켜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앞으로 자주 보실 것 같아서... 남들 통해서 아시는 것보다 제가 먼저 소개하는 게 낫지 싶어서요."

"아, 아아?! 그래? 여자친구? 응? 애인? "

"네, 뭐. 흐흐..."

'!'


천하의 강사원도 이건 몰랐다.


'미친*. 가지가지하네.'


나는 지금 이 인간의 여자친구를 위한 자리를 세팅하고 있었던 것인가.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여친소다. 회의감이 밀려든다. 회사고 뭐고 싹 다 싫어진다. 이렇게나 개인적인 일로 추진하고 있었던 승진 파티를 취소하다니. 아랫사람에게는 공유 없이 윗사람하고만 대화하겠다는 태도, 의뭉스러운 웃음, 때때로 양말 위로 발가락을 어루만지는 습관까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바빠 죽겠는데 지 혼자 올 것이지!'


밀린 일 때문에 오늘도 막차 인생 당첨이다. 적어도 이 자리는 조금은 의미 있는 자리였어야 했다. 잠을 쪼개어 하는 일은 이것보다는 가치 있는 일이었어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화가 더해진다. 튀는 오리 기름과 허투루 세척된 쌈채소까지 식당 전체가 강사원의 신경세포를 긁는다.


"허이고오~ 이 과장 좀 한다이? 누군데? 응? 회사 사람이야? 응? 나도 아는 사람?"

"뭐, 보시면 압니다. 흐흐."


송차장과 이과장 사이에 이야기꽃이 핀다. 금요일마다 돌아오는 회의 자료는 아직 취합도 마치지 못했다. 이 무의미한 자리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있자니 속이 안 좋다. 이에 낀 부추와 입가에 자랑스럽게 한 줄기 늘어진 양념장에도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입을 떼는 송차장이 보기 싫어 잠시 일어나 화장실로 향하려는 순간,


'철커덕.'


"어, 여기, 여기!"


오래된 식당 철문을 열고 익숙한 사람 하나가 들어오다가 이과장의 부름에 반응한다.


"어머, 차장님! 여기 오리 맛있죠~!"


다가온다. 생강꽃향이 다가온다. 눈이 휘둥그레진 강사원 앞에 선 것은 다름 아닌,


"미리씨, 안녕하세요. 다행이다, 여자 나 혼자면 민망할까봐 걱정했는데에~"

강사원은 강렬한 그의 앞발에 팔짱을 빼앗긴 채로 제자리로 돌아와 앉고야 말았다. 거의 뒤로 돌아선 상태 그대로 끌려와 눈만 꿈뻑이고 앉아있는 것이다. 이지아 주임이다. 아니, 제는 감사실 이대리다.


'이... 이게 뭐야... 이대리님이랑, 해로운이?'


"어, 어... 어, 이주임..., 아니 이대리. 헛.. 허."


감사실과 얽힌 일이 많았던 송차장도 이 상황이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반쯤 열린 입에 부추 하나가 침방울을 달고 매달려있다. 시뻘겋게 달아 오른 두 귀가 민망하다.


"이 사람입니다. 흐흐..."


지금 이 순간 유일하게 당황하지 않은 전략처 사람은 이과장뿐이다. 유독 싹싹한 이대리의 모습에 한껏 기분이 올라 헤벌쭉 갈라진 입이 닫힐 줄을 모른다.

"이 사람이 오늘 승진 파티 한다고오 한다고오, 마침 식당도 가까우니까 소개도 할 겸 같이 가자고 그래서 왔어요. 회의 자료는 들어가서 드려도 되죠?"

"어? 어..., 그럼 그럼. 뭐 그거 별 거라고. 안 그래 미리씨?"

"아, 예에. 네."


마주 앉은 송차장도 나란히 앉은 강사원도 달려드는 당황스러움에 시선이 흔들린다. 1분에 네 번가량 서로 눈이 마주치는 것 같다. 저 놈의 부추는 오지게도 이에 박혔는지 자꾸만 강사원의 눈에 거슬린다.


'바스락 바스락'


"저... 이거."


대리가 들어올 무렵부터 자꾸만 바스락거리던 이과장이 기어코 무언가를 꺼내고야 만다.


'알마*!'


호화롭게 포장된 눈앞의 넥타이에 불현듯 제정신이 돌아온 강사원은 하필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원망하며 실눈으로 주변을 급히 살핀다. 그리고는 송차장을 유심이 지켜보며 침을 꿀꺽 삼킨다. 송차장도 머리끝까지 달아올라 눈동자만 굴려 주위를 훑는다. 그러다 놀란 눈을 굴리는 이대리와 눈이 마주친다. 감사실 사람 앞에서 고가의 선물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사람이 센스 있는 선물 골라와서 드리려고요. 승진 축하드립니다아, 우리 차장니임."

'!'/ '!'/ '!'


'이 놈이 기어코 미쳤나. 이대리가 그럴 리가 없다. 이건 독단이다.'


강사원이 사태를 파악하고 있는 동안 무거운 공기가 이과장을 짓누르기 시작한다. 서서히 고개를 돌려 운명의 연인과 눈이 마주친 이과장은 그만 차게 식어 나란히 앉은 강사원과 눈을 맞춘다. 한심하다는 듯 냉담한 그 눈빛이 이과장의 동공에 꽂힐 무렵, 약속이나 한 듯 송차장과 이대리가 동시에 싸늘하게 입을 뗀다.


"뭐하는 거야 이과장, 청탁법 위반이여."

"자기야 무슨 짓이야, 청탁법 위반이야."




2020년 1월 24일 금요일 눈


<전략처 송차장> 상사 잡아먹을 눔

이로운이 그눔이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미친 거여? 응? 아니면 뭐여? 먹고 죽으라 이건가? 어서 배워먹은 습관인지 시도 때도 없이 뇌물질이고. 응? 영업은 그딴 식으로 일허나? 생각도 오질라게 읍지, 지아 고것 앞에서 그걸 어떻게 받누, 받기는? 하던 데로 담배나 몇 갑 주면 되지, 에이그으. 쯧쯧쯧. 뭐, 내가 맘은 알지. 알어. 그 맘은 뭐, 기특은 허네. 에이그으...


<전략처 강사원> 바보다

바보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바보다.


<감사실 이대리> 귀여워

오빠도 가끔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그래도 거기서 그러면 내가 뭐가 돼? 몰래 하던지. 당황해서 혼났네 진짜. 차장님도 얼굴 시뻘게져서... 전략처 가기 전에 사규랑 법령 자료 봐두라고 그러게 말했는데... 처세는 좋은데 글을 안 본단 말이지. 안 되겠어, 내가 교육 좀 시켜야겠어. 그래도 멍한 옆모습은 좀 귀여웠다?

이전 09화막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