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2020년 1월 17일

by 선량한해달

"차장님, 그 꼬맹이 있잖아요? 1년 전에. 인턴 중에 막내. 걔 유턴해서 의대 갔다던데요?"

"아아, 그거? 멍청하니 눈치도 없고, 응? 거, 얻다 쓰냐, 의사라도 해야지. 크흐흐."


반주가 곁든 대원각에서 멋쩍은 웃음이 울려 퍼진다. 그들은 시원스레 웃는다고 웃지만 강사원의 귀에는 어색한 웃음으로 들릴 뿐이다. 대체 어디가 웃음 포인트인지 알 수가 없다. 나이도 나이고, 경력도 경력이지만 애초에 정대리처럼 싹싹하게만은 대할 수 없는 성격이다. 그런 이유로 송차장과 이과장은 전략처 셋이 모여있어도 언제나 둘만의 시간을 갖곤 한다.


"미리씨 우리 담배 좀 태우고 올라갈게, 응? 여기 계산하고. 먼저 가있어."

"네."


저녁 타임은 언제나 둘의 술담배 시간에 공연히 따라나선 느낌이 든다. 이럴 바엔 차라리 따로 먹는 게 나을 것 같지만 눈치가 보여 그럴 수도 없다. 송차장은 팀이면 밥은 함께 먹어야 한다는 주의다. 그 때문에 강사원은 원하지 않는 시간에 원하지 않는 메뉴를 원하지 않는 값을 치르고 먹어야만 한다. 오늘처럼 술이 곁들여지면 마시지도 않는 술값까지 나누어 내는 통에 기분이 더 상한다. 저녁 식비는 두당 8천 원. 그 선에서 적당한 밥을 먹으면 될 것을, 술값 보조를 위해 기가 막히게 싼 밥을 찾아내는 송차장이 혐오스럽다.


세 사람의 식비 24,000원을 법카로, 나머지는 팀카드로 계산을 마치고 영수증을 두 개로 나누어 받는다. 회사 건물로 향하다 뒤를 돌아보니 송차장이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 다른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익살맞게 웃고 있다. 악마의 웃음이 따로 없다. 꼴도 보기 싫다. 어서 사무실에 올라가 원하지 않는 향기로 물든 겉옷을 갈아입고 헤어에센스라도 발라 냄새를 지우고 싶은 마음뿐이다. 이럴 때면 정대리의 빈자리가 새삼 크게 느껴진다. 사회생활 10년 차에 온갖 잡일을 담당하게 된 막내 아닌 막내의 삶이 원통하다.


'내가 미쳤지, 내가 그때 왜.'


19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에 붙어있는 거울이 강사원을 바라본다. 인간이 슬프고 비참해지는 것은 거울 때문이 아닐까 잠시 생각하며 현실을 부정하듯 눈을 피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 절망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세차게 고개를 떨어본다.


"어머, 미리님!"

19층 문이 열리자 오랜만에 본 정대리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어?! 예. 오랜만이네요, 대리님."

"그러게요. 저도 요즘 일이 시작돼서..."


얼마 만에 보는 정대리인가. 아무리 기밀 티에프라지만 유독 눈에 띄지 않는 게 희한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와중이다. 살짝 야윈 느낌의 정대리는 마음만은 편하다는 듯 환하게 웃어 보이며 강사원이 타고 온 엘리베이터를 잡아탄다.


"힘내세요. 대원각 갔다 오셨구나, 페브리즈 캐비닛에 있으니까, 아시죠?"

"아, ...예."


어색하게 등을 굽혀 인사를 하니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다. 저 사람이 부럽다. 구성원이라고는 없는 단독 티에프에서 아침마다 커피향을 내뿜는다고 한다. 야근도 본인이 정해서 하고 혼자 다니니 음식 선택권도 있다. 기밀 티에프라 예산도 없고 법카도 없다. 모든 비용은 전략처에서 처리한다. 어수선한 시기의 티에프는 때려죽여도 가지 말아야 한다. 그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지난 기관에서 뼈저리게 느낀 바다. 그러나 이제는 두 술담배쟁이 밑에서 일하는 밑바닥 인생이다. 정대리만큼 세심한 사수도, 최사원만큼 어린 사원도 없다. 저 사람이 그저 부럽다.


그때 강한 진동이 두어 번.


'하, 숨 좀 쉬자...'

일도 밀려 있는데, 어이없는 술자리에 불려갔고, 심지어 마시지 않은 술값도 냈다. 이제 전표만 치면 오늘의 잡무도 일단락이다. 더 늦기 전에 내 '일'을 해야만 한다. 다시 내려오라는 전언이면 기필코 그들 중 하나는 죽이리라. 불쾌함에 휩싸여 휴대폰을 꺼내니 이과장으로부터의 카톡이다.


「미리씨 어디야?」

「나 지금 올라갈게. 할 말 있거든.」


'씨*.'


이제는 슬슬 어린 놈의 반말이 거슬리기 시작한다. 유하게 넘기고 있었지만 이틀 전 기차장의 노골적인 표현 이후로 이과장의 반말에 민감해질 대로 민감해졌다. 그래도 어쩌나. 지금은 내가 아니라, 저 어린 놈이 과장이다. 기다리는 수밖에.


「네, 지금 엘리베이터 앞입니다.」


19층의 엘리베이터가 바쁘다. 정대리를 싣고 내려간 엘리베이터가 이과장을 싣고 올라왔다.


"정대리 봤어요? 방금 만났는데."

"네."

"정대리 좋겠다, 그쵸? 거기 지금 일 하나도 없잖아, 크으, 얼마나 좋아 꿀이지."

"..."


잠시 정대리를 부러워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진다. 어울려 있다보니 남일을 쉽게 말하는 해로운 놈과 같은 수준의 인간이 된 것만 같아 소름이 끼친다. 빨리 할 말이나 하고 사무실로 들어갔으면 좋겠다. 당신들 때문에 먹기 싫은 저녁을 먹으러 나갔던 탓에 시간이 부족하다.


"우리, 뭐, 파티 같은 거... 있잖아. 그런 거."

"...네?"

"아니, 차장님 승진하셨는데 아무도 안 챙겨드리면 좀 그렇잖아?"

"...?"


이것이 매일 저녁 술파티를 벌인 사람이 할 소리인가. 강사원은 승진 파티란 때를 가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바이사 팀바이팀이지만 지금껏 일해왔던 곳에서는 승진 파티란 부서장의 결단이 있을 때에만 행해졌었다. 이번처럼 급작스럽고 주위의 시선이 곱지 않은 승진은 조용히 넘어가는 게 상책이다. 심지어 사무실 왼쪽과 현장은 승진자가 단 한 명도 없다. 누락자들이 너무 많다.


"어떤 식으로... 챙겨드리고 싶으신데요?"


강사원은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작한다.


"아니, 내가 챙겨드리고 싶다기보다... 거, 뭐, 당연한 거잖아? 상사가 승진했는데 챙겨야지."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


짜증이 난다. 소회의실에 케이크라도 사다 놓고 박수를 쳐야 하는 걸까? 축하송이라도 부를까? 이 사람의 머릿속을 도통 알 수가 없다. 승진 이후 진행된 술파티로 이미 축하는 끝난 것이다.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단 말인가. 회사는 회사답게 건조하게 다니고 싶은 강사원이다. 이과장의 생각이 전혀 와닿지 않는다.


"차함, 풋."


이과장이 한심하다는 듯 피식하고 고개를 비스듬히 뿌리며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아선다. 역겹다. 가증스럽다. 챙기고 싶으면 챙기고 싶은 사람이 챙기면 될 일이다. 말만 번지르하게 늘어놓고 준비는 다른 사람에게 시키는 타입이 이런 유형이다. 해로운 사람인 것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지낼수록 가관이다.


"아니, 내 말이 그렇게 어렵나? 그럼 질문을 바꾸자. 음, 내가 지난주에 좋은 걸 하나 봤거든. 뭘까? 알마* 껀데 우리 둘이 반반 냅시다."

"...네?"

"선물은 하나 해야 할 거 아냐? 세종, 여의도 가서 기죽지 마시라고 좋은 넥타이 하나 해 드리자고요."


기가 막힌 강사원은 이 사람의 극심한 뇌내 망상이 어디서부터 출발한 것인가 싶어 급격히 사고력이 저하된다. 할 말은 많다. 하지만 설명하고 싶지 않다. 전의 상실이다. 가르칠 수도 없다. 과장이다. 아무리 다른 부서에서 왔대도 너무 모른다. 조심성이 없다. 이런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이 있을까? 마찰이 일더라도 팩트로 접근해야만 한다.


"...부정청탁 관련법에 위배됩니다."

"엥? 무슨 법을 들고 나와. 빡빡하네."

"감사 신고 들어가면 혼자 벌 받으실 재간은 있으시고요?"

"아니 뭔 또 감사가 나와? 싫으면 싫다고 해요. 나 혼자 할 테니까. 참 나!"


기분 나쁘다는 듯 혀끝을 차며 사무실로 복귀하던 이과장은 자연스레 왼쪽으로 도는 몸을 급히 오른쪽으로 돌려 제자리를 찾아간다. 강사원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사무실을 바라보며 저 인간과 남은 시간 야근을 하기에는 내 생명이 너무나도 고귀하다고 생각했다.


'젠장... 값비싼 선물은 제쳐두고라도... 식사 한 끼는 해야겠네.'


이미 많은 짐을 짊어진 강사원에게 무거운 보따리가 또 하나 추가되고 있었다.




2020년 1월 17일 금요일 구름


<전략처 송차장> 따라오질 말던가

죽상으로 앉아서는... 술맛 없게, 응? 애시당초 따라오질 말던가. 술 싫어한다는 거, 그거 다아 핑계여. 술이 아니라 사람이 싫은 거 내가 다 안다고, 응? 지 좋은 사람이랑 마시면 지도 좋다고 마신다는 거여, 응? 기분 나쁘게 허어연 게 눈앞에 앉아서는... 입에도 안 댈 술이면 받지나 말던가. 아깝게. 에이, 밥맛 없어!


<전략처 이과장> 개기네?

최유빈이 그놈이 낫지, 이건 뭐 바득바득 기어 올라오고 말이야. 내가 말하기 전에 알아서 파티 준비 딱딱 하고 날짜 장소 정해서 알려주면 좀 좋아? 뭐어? 청탁법? 참내, 우리 올바르신 강사원님, 세상 그렇게 사는 거 아뇨. 가만, 혹시... 혹시 뭐 믿고 저러는 거 아냐? 기태림이도 그렇고. 저거 뒤에 누구 있나?


<전략처 강사원> 멍청한 놈들

술쟁이들은 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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