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리, 응? 수요일 보고 알지? 거, 난 몰러. 난 겸직, 응? 고정이 알어서 허고. 응?"
알다마다. 정대리는 작은 정사각 골방에 들어올 때부터 세상 나 혼자 산다는 각오였다. 겸직 팀장이랍시고 때때로 얼굴을 들이미는 송과장이, 아니 송차장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밖은 승진의 소용돌이였지만 골방은 호젓하니 을씨년스러울 정도였다. 이따금씩 코를 찌르는 커피 찌꺼기 냄새만이 벗이었다. 천성이 'I'로 타고난 정대리에게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었다. 새 사장이 부임하고 매주 수요일 직속 보고가 생기기 전까지 정대리가 둥지를 튼 작은 골방은 액세스 유일의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서른 살 생일에 엄마가 사주신 명품백도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곱게 보관할 나만의 옷장이 생겼기 때문이다. 의미 없는 보고서를 쓰고 또 쓰다 한숨이 새어 나올 즈음, 문득 손톱이 거슬리면 자유로이 일어나 골방을 뱅뱅 돌며 손톱을 깎기도 했다.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 회사에 나만의 공간이 생긴다는 것은 퍽 행복한 일이었다.
"유재흽니다."
수화기 너머로 그 말이 들려왔던 그날까지는.
'감사실장이 무슨 일이지? 왜 굳이 19층 골방까지 온다는 거야? 할 말이 있다면 지아 편에 충분히 전할 수 있을 텐데.' 긴 동굴 생활 끝에 오랜만에 타 부서와 얽힌다. 하필 감사와 얽힌다. 진한 커피향이 예민한 코를 괴롭힐 즈음 덜컥 작은 문을 연 것은 지아였다.
"실례하겠습니다."
"...아, 네, 이대리님."
오랜만에 접한 업무 모드 지아다. 제법 대리답게 실장을 수행하는 모양새가 왠지 뿌듯하다. 동기 하나를 보내고 제자리를 찾은 용사의 모습이다. 치마 대신 바지를 입기 시작한 지아는 요근래 유독 남의 눈을 신경 쓰고 있다.
"어, 일어나지 말아요. 앉아요, 앉아."
작은 골방의 매무새를 여유롭게 훑어보며 방의 중앙으로 걸어 들어온 감사실장이 상석의 정대리를 그대로 앉힌다.
"여기 홍차가 그렇게 고급지다던데요."
"아, 네, 벌써 18층까지 소문이 났나요?"
"에이, 당연하죠, 여기가 19층 핵인데."
감사실장은 당해낼 수가 없다. 송차장과의 입씨름에서는 한 번도 밀린 적이 없는 정대리이지만 감사실장과의 대화는 언제나 버거웠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도 밀리는 느낌이 든다. 감사실장도 정대리와의 대화는 약간의 긴장감을 동반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서로의 긴장감이 유연한 대화를 방해한다.
"대리님, 혹시 윤주임 소식 들으신 거 있어요?"
"아, 사기업으로 간다는 소문만..."
"그렇구나..."
지아와의 대화도 어색할 뿐이다. 애꿎게도 떠난 자의 이름이 맴돌고 만다. 정대리는 결단을 내린다. 말이 안 되면 음료다.
"...자, 아쉽지만 오늘은 홍차 대신 커핍니다. 제가 에티오피아 원두를 가져왔거든요."
정대리는 바삐 손을 옮겨 드립해둔 커피를 두 잔 들고 중앙의 테이블로 이동한다. 새큼한 향이 공기를 타고 긴 리본을 드리운다. 정대리의 머리칼을 타고 시작한 향기의 끝이 작은 창에 가 엉겨 붙을 때쯤 유실장이 신문물을 입에 쏟아 넣는다. 조심스럽지만 큰 한 모금이다. 생전 처음 본 커피맛에 얼떨떨한 유실장이 입안을 소독하듯 혀를 삐쭉 볼 쪽에 두어 번 갖다 댄다.
"오호, 이게 비싼 맛인가봐요.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정확한 표현을 못 하겠지만. 음, 알갱이가 이에 감기는 느낌이네요. 조금 신맛도 나고요."
"어머, 정확하세요. 산미가 유명한 동네 콩이거든요. 바디감이 좋아요. 까끌한 질감이 일품이어서 제가 정말 아끼는 콩입니다. 3년째 수입해서 마시고 있어요."
"오, 이거 완전 프로시네. 회의 때마다 보통 분은 아니시라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자주 들려서 신세 좀 지겠습니다. 이 정도면 한 잔에 2만원까지 가능할 것 같은데."
"어머, 잘됐네요, 이거 한 줌에 5만 6천 원이라서 제가 허리가 휘거든요."
대화가 풀려간다. 커피라는 음료는 참으로 오묘한 데가 있다. 좋은 커피 한 잔에 어색함이 녹아드는 맛이 있는 것이다. 어색함이 향기로 바뀔 때쯤 지아가 입을 연다.
"대리님, 이제 커피 없어도 자주 보게 될 것 같아요."
"응? 네?"
정대리의 의문의 눈동자가 발화자인 지아와 감사실장을 번갈아 포착하느라 요란하다. 그러더니 잠시간의 살핌이 끝나고는 알았다는 듯, 체념했다는 듯 가만히 커피를 들이켠다. 남의 것은 유리잔에, 제 것은 종이컵에 대충 내려 입안에 털어 넣는 모양새가 흡사 우리네 어머니 같다.
"사장님 가시고 거처가 떠서 걱정이었는데... 오히려 잘... 됐네요."
폭파를 향해 달리던 티에프였다. 헌 사장의 유물은 새 사장이 오면 통폐합이 수순이다. 마음 한 켠에 은근히 현장행을 기대하고 있었던 정대리다.
"중부 본부에서 그렇게 정대리를 탐내신다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거기가 제 고향이니까요."
한 번 무산된 현장행이 쉬울 리가 없다. 액세스에서 굴러먹은 지 벌써 4년이다. 정대리는 하릴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제 처지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 제가 윤주임 자리로 가는 건가요?"
"..."
감사 실장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을 한다. 대화가 끊어지자 정대리는 지아와의 관계가 걱정되기 시작한다. 한 지붕에 두 대리. 심지어 전략 출신 감사 직원이라니. 모르긴 몰라도 송차장과는 두 번 다시 같이 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것만큼은 참 다행이다.
"티에프팀에 식구가 늘 겁니다."
실장의 말은 뜻밖이었다.
"...네?!"
뇌 속에 마구 그어진 검은 선이 엉키기 시작한다. 흡사 파리의 지하철 노선도다.
"...그게, ...무슨?"
"이 티에프는 2월부로 감사실 산하로 들어옵니다."
약간 이해가 되지 않지만 얼추 느낌은 온다. 티에프는 존속이다. 전략처에서 감사실로 이관될 뿐.
"...아아. 이 티에프가 그대로 가나요? 과업 내용은요?"
"성격이 바뀔 것 같은데.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네?"
"감사실 티에프가 뭐, 다 그렇죠."
"...아. 또...요."
또다. 전략처도 감사실도. 항상 이런 식이다. 정대리는 솟구쳐 오르는 분노를 명치쯤에 잡아두고 뇌를 굴린다. 오랜만에 타 부서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자니 자꾸만 말이 막힌다.
"멤... 멤버는요? 아니, 아니. 됐고, ...팀장은요? 누구든 오셔야 일을 하죠. 이거, 이래서는 뭐 아무것도 안 됩니다. 매주 보고서 하나 나가는 게 전분데 것도 새 사장님 오시고부터는 계속 소설 쓰고 있어요. 저요! 전 사장이 지시한 일들 사규 허용 선에서 다 삭제하고 되도 않는 티에프 굴리겠다고 티 안 나게 문지르느라 회의 때마다 얼마나 개고생을..."
"..."
"하...! 됐습니다."
말없이 남은 커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실장이 지아를 한 번 보더니 눈을 맞춘다. 고개를 되돌리는가싶더니 이윽고 소파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는 앞으로 몸을 기울인다.
"앞으로는 감사실 전원이 티에프 겸직이 될 겁니다."
"..."
'뭐라는 거지?'
"겸직이요...? 겸직들만으로 잘도 일이 되겠네요."
냉소적인 정대리에 반해 명확하게 고개를 내들고 맑은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실장이다. 이 사람에게서는 더 이상 거둘 것이 없다. 할 말은 다 했다는 눈치다. 정대리의 당혹감을 캐치한 이대리가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자 입을 연다.
"정대리님, 정해진 게 아직 하나도 없어요. 앞으로 감사실 티에프가 하나 필요한데다 윤택이가 나가면서 인원도 부족해졌어요. 뭐든 이 티에프로 통합될 겁니다."
"통합이야 될 수도 있죠.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럼, 제 소속은 감사실인가요?"
"...아뇨."
"윤택이가 하던 일 제가 하게 되나요?"
"...아뇨."
"그럼 무슨 일일지도 모르는 티에프 일, 같이들 하시나요?"
"..."
할 말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대리도 현재로써는 이 티에프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
"거 봐요, 허울뿐이잖아요."
지난 몇 달간 혼자된 정대리의 사무치는 원한이 생각 외로 깊었던 것이 계산 밖이었다. 분위기를 푸는데 실패한 이대리가 시선을 돌리자 실장이 일어서며 몸을 한 바퀴 돌려 골방을 눈에 담는다.
"팀장...님."
"...아, 예. 팀장님, 어느 분이 오시나요?"
잠시 혼란 속에 정신줄을 놓았던 정대리가 불현듯 말을 잇는 실장의 템포에 급히 맞추어 대화를 이어가본다.
"팀장..., 아니, 책임이나 선임님이 될 것 같던데."
"아, 곧 개편된다고는 알고 있습니다. 직함이 바뀌나보네요. 그래서 어느 분이 오십니까? 책임이든 선임이든 일단은 한 명이 와주셔야..."
소파 뒤로 한 걸음 이동했던 감사실장이 다시 테이블 앞으로 나와 양복 단추를 잠그고는 몸을 살짝 굽혀 손을 내민다.
"정책임님."
강단 있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감사실장과, 차마 일어설 생각조차 못하고 헌 소파에 눌어붙어 버린 정대리와, 홀짝 남은 커피를 비워내는 이대리가 새로운 골방의 출범을 알리고 있었다.
2020년 1월 27일 월요일
<티에프팀 정대리> 이거 혹시 인성테스트야?
미쳤어. 싹 다 미쳤어. 유재희 저 인간도 정상 아냐. 지난달, 지지난달 필기만 붙었어도 이 꼴은 안 당할 텐데. 하, 씨, 나도 사기업으로 가? 윤택이한테 연락한 번 해봐? 지아는 저런 거 밑에서 어떻게 살지? 무소속 직장인 얼마나 더 하라는 거야? 내가 부슨 동에 북이야? 미쳐도 곱게 미치랬다고 더 심해지기 전에 나가야 돼. 더는 안 돼. 이건 한계를 넘었어.
<감사실 유실장> 똥물을 뒤집어써라 이건가?
이이제이. 잘 갈아둔 칼날이 자기 목을 치러 간다 이 말이지. 이 유재희가 앙칼진 고양이 호랑이로 키워 드리지. 어디 한 번 방어해보라고. 전략처 개새*들
<감사실 이대리> 윤택이 그놈이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힌다니까
잘 나갔어. 이번에 안 나갔으면... 자의로 나가야지. 똑똑한 새*. 잘 갔네. 민이 언니 동기는 다 나가고 없다더니 꽤 남아있었네. 알고 숨긴 건가? 아니면... 아니겠지.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