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기노 Feb 25. 2024

겨울비는 내리고

내 인생의 노래 (11)

도쿄의 겨울은 유난히 춥다. 웬만해선 밖의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일이 드물지만, 주말에 집에 있다 보면 체감으로는 한국보다 훨씬 추운 것 같다. 한국처럼 바닥 난방이나 이중창이 일반적이지 않다 보니 집에 있을 때는 옷을 껴입고 히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겨울에 웬 비가 이리 많이 오는지. 지난주부터는 거의 하루 걸러 비가 내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도쿄의 겨울은 추우면서도 습하다. 도쿄에서 사는 게 좋은 99가지 이유가 있지만, 딱 하나 이 빌어먹을 곳을 떠나고 싶다고 느낄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처럼 하루종일 겨울비 내리는 날이 아닐까 싶다.


춥고 어둡고 축축한 일요일 아침, 유튜브로 미사를 드리고 나니 그나마 마음의 우울이 조금 걷혔다. 어제저녁에 끓여놓은 배추된장국에 뜨끈하게 밥 한술 말아먹고 나니 마음의 온기가 한결 더 돌아왔다. 그러다가 문득 떠 올랐다. 그래 나 그 노래 좋아했었지…

겨울비는 내리고

이 노래는 충북대학교 재학 중에 <바람 바람 바람>이라는 노래로 그야말로 바람을 일으켰던 김범룡이 1985년 발표한 1집에 수록된 곡이다. 나무위키에 의하면 <겨울비는 내리고>는 가요톱텐 2주 연속 1위를 했다고 한다 (참고로 <바람 바람 바람>은 5주 연속 1위로 골든컵을 차지했다). 김범룡은 그 당시 보기 드물게 싱어송라이터로 활약했으며, 가수로 성공한 이후 녹색지대나 진시몬 등 여러 가수들에게 곡을 주기도 하였다. 멀끔한 외모에 가녀린 듯 독특한 보이스로 인해 남자들보다는 주로 여자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가수이기도 하다.


내가 이 노래 <겨울비는 내리고>를 처음 들었던 것은 중학생 시절 하굣길 버스 안이었다. 아마도 겨울방학을 며칠 남겨 놓지 않은 12월 언젠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만 해도 버스 안에서 라디오를 틀어 놓는 게 꽤 일반적이었기에, 등굣길에는 뉴스, 하굣길에는 주로 가요 프로를 들으며 통학을 하던 시절이었다. 두 세 정거장만 더 가면 내려야 하는데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날 비가 왔었는지 아닌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이 노래는 전주만으로도 너무 애잔했다. 홀린 듯이 노래를 듣다 보니 내려야 할 곳을 지나쳐 버렸다. 터벅터벅 걸어서 돌아와야 했지만, 김범룡이라는 가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노래는 지금도 가끔씩 흥얼거리는 또 하나의 내 인생 노래가 되었다.


그날 이후 수년간 김범룡이라는 가수를 좋아하게 되었고, 2집부터 4집까지는 내 돈 내고 앨범을 사기도 했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는, 지금은 없어진 고려당이라는 빵집에서 받은 콘서트 응모권이 당첨되어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개최된 콘서트에 가기도 했다. 콘서트 티켓을 4장이나 받아 2장은 같은 반 여학우들에게 뿌리고, 나머지 두장을 가지고 번호가 2번이었던 친구와 (참고로 나는 5번이었다) 난생처음 특정 가수의 콘서트에 참석하게 되었다. 콘서트장에 온 사람들은 99%가 내 또래의 여자애들 아니면 누나들이었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콘서트장 앞에서 온 순서대로 들여보내는 게 아니라 일단 특정 지점에 다 모아놓고 바리케이드를 열면 일제히 뛰어가 다시 줄을 서서 입장하는 방식이었다. 지금 같았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이런 불공정한(?) 방식으로 인해 나와 친구는 맨 앞줄에 서서 입장하게 되었고 무대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소리 지르며 난리법석인 대부분의 청중들에 주눅 들어 경호를 맡은 청원경찰과 함께 비교적 차분히(?) 공연을 봤다.



엄청 옛날도 아닌데 김범룡의 노래 가사엔 ‘내 님’이니 ‘떠나신 님‘과 같은 고전적인 표현이 종종 나온다. 한용운 선생의 <님의 침묵> 이후 우리말 ’님‘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하게 되었다. 누군가를 꼭 높여 부르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그리움, 고마움, 애절함 등을 이 짧고 명료한 단어 하나가 전부 품어내고 있는 것 같다. 겨울이 싫고 더구나 겨울비는 피하고 싶지만, 내 ‘님’의 잔상이 가득하니 차마 떠날 수 없는 그 마음이 이 노래에 묻어있다. 이제 곧 겨울비도 그치고 겨울은 끝날 것이다. 노래를 몇 번 반복해서 듣다 보니 어느덧 마음만은 벌써 봄날이다.   

그 누구인가 내게 다가와
나를 바라보는 애달픈 눈동자
비를 맞으며 우뚝 선 모습
떠나려 하는 내님이련가

바보 같지만 바보 같지만
나는 정말로 보낼 수가 없어
하얀 내 얼굴 난 사랑했는데
어떡해야 하나 눈물이 흐르네

바람 불어와 뒤돌아 보면
당신은 저 멀리 사라져 버리고
아픈 마음에 홀로 걸으면
겨울비 내려와 머리를 적시네...

https://youtu.be/U9-A2R8Nup4?si=L05Cid1efwuyd_Mg




매거진의 이전글 눈 내리던 겨울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