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장마철 단상
오늘 일본은 바다의 날(海の日) 공휴일이다. 창 밖에는 자분자분 이슬비가 내리고 있다. 비가 오는 날을 대체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지금처럼 장마시즌엔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지고 어딘가 노스탤직해지고는 한다. 이런 날엔 집에서 CBS 레인보우 앱 통해 라디오 들으면서 책이나 영화 보고, 여행계획도 세우며 조금은 게으르게 보내는 것도 괜찮다. 비가 내리기 전 새벽 조깅으로 ’오운완‘도 달성한 터라 그야말로 오늘은 죄책감 없이 뒹굴뒹굴하려 한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난지 얼마 안 되는데, 극강의 “J”답게 점심은 파 듬뿍 얹은 라면, 저녁은 있는 반찬에 더해 연어구이로 메뉴까지 정했다. 오늘 하루 먹고 즐길 계획이 완벽히 갖춰지다 보니, 문득 평온하고 행복한 느낌이 몰려온다. 이게 다 장마시즌 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이 때 마침 장마시즌이어서 아주 조금 더 행복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앞으로 열흘 정도 도쿄의 일기예보를 보니 장마는 곧 끝날 것 같다. 다음 주 토요일 후지산 등반을 예약해 놓은 상황이라 살짝 안도하면서도 뭔가 아쉽고 서운하다. 삼연휴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지 장마시즌 막바지가 겹쳐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이 쌉쌀한 듯 복잡한 행복감을 달래기 위해 이 영화를 다시 떠올려 본다. 장마시즌이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いま、会いにゆきます). 내가 별도 브런치 글로도 소개했던, 세상에서 미소가 가장 예쁜 여배우 故 다케우치유코(竹内結子)가 여주인공 미오로 나왔던 영화로 한국에서 소지섭, 손예진 주연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는데, 내 기준에선 원작만큼의 큰 감동을 받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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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형적으로 시작을 좋아하고 끝을 잘 못하는 타입이다. ’ 끝‘이 갖는 진중한 의미보다는 ‘시작’이 갖는 설렘을 더 좋아한다. 무언가를 끝내는 건 때로는 속 시원하고 보람된 일이지만, 무언가가 끝나는 건 슬프고 아쉬운 과정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렇듯이 긍정과 부정이 늘 공존하지만, ‘끝’은 내게 부정적인 기억과 경험을 더 많이 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과 시작이 서로 이어져 있다는 데는 늘 공감한다. 끝을 알고도 시작을 할 수 있는 용기, 그 끝의 너머에는 또 다른 시작이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오늘 하루 또 이렇게 잘 살아가게 된다. 이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무언가가 끝나가는 아쉬움, 그 뒤에 따라올 또 다른 시작에 대한 기다림과 설렘의 상황을 가장 잘 정리해 주고 또 한 발짝 앞으로 나가도록 살포시 등을 밀어준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장마철이 끝나지 말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마지막에 미오가 자신이 28세에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남편인 타쿠미와 아들 유지를 만나러 가기로 결심해면서 독백으로 내뱉는 대사가 가슴을 울린다. 이 장면을 도대체 몇 번을 돌려봤는지 모르겠다. ‘그리움’과 함께 내가 좋아하는 감정 상태 ‘기다림’ 그리고 결연한 실행의지가 담긴 이 짧은 대사에서 감동 이상으로 많은 위로와 용기를 받았다. 장미시즌이면 내가 이 영화를 떠올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다려 주세요.
지금, 만나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