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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바꿈 Jul 03. 2023

마치 발로쓴 것 (족달필) 같아도 꿋꿋이 필사

배바꿈_족달필사

지금은 학교수업에서 자취를 감춰 버렸지만, 나의 청춘에서는 펜글씨 수업이 있었다.

기다란 나무에 펜촉 꼽고, 잉크를 살짝 묻혀 글쓰기 연습을 했던 과목이다.

주어진 시간은 고작 한 주에 한 번인데 시험기간에는 보충수업이나 자율학습으로 바뀌는 깍두기(어느 쪽에도 끼지 못하는 사람이나 그런 신세) 과목이었다. 펜글씨 시간은 악필을 교정하는 시간이라기보다 이력서에 꼭 적어야 할 내용을 보기 좋게 쓰도록 하려는 학교의 거룩한 배려였다.  


당시 취업준비생의 가장 기본은 자필이력서 였다.  선생님은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속담을 내 세워 또박또박 잘생긴 글씨로 개근상과 우등상 정도는 적혀 있어야 서류라도 합격할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사실 말이 이력서지 학생 신분으로 딱히 써야 할 내용이 있겠는가?  주소, 집전화번호, 본적(그때는 무조건 적어야 했음), 아버지이름, 초등학교 입학, 졸업까지 죄다 적어놓고 그 글을 반복해서 다듬었다.


어느 날 내가 적은 이력서를 살피던 선생님은 "아이고 야야 발로써도 이거보다는 잘 쓰겠다 이놈아! 너는 그냥 중학교부터 적어라 한글자라도 줄이는 게 답이다 에휴!" 내가 봐도 내 글씨는 형편없었다.  판서를 받아 적은 노트 내용조차 알아볼 수 없어 시험칠 때마다 친구의 노트를 구걸했던 수준이었으니, 누군가 내 글씨를 볼 때마다 얼굴은 홍당무가 되기 일쑤였다.


이력서 글씨도 문제지만 글씨를 못쓰면 더 답답한 일도 많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공테잎에 녹음해서 듣던 시절,  숨죽여 기다리다 녹음에 성공해도 케이스에 노래제목을 발로쓴 글씨로 적어 놓기에는 가수얼굴에 X칠을 하는 것 같아 백지상태로 놔두곤 했다.  때문에 카세트테잎에 무슨 노래가 들었는지 들어봐야 하는 불편한 생활을 이어갔다. 이렇게 손글씨가 나의 큰 콤플렉스로 자리 잡고 있을 무렵 글씨 잘 쓰는 김석봉과 친구가 됐다.  석봉이 집에는 귀하디 귀한 턴데이블까지 있었고 녀석이 이문세 LP를 구입하면 난 60분짜리 공테잎을 사서 녹음을 부탁했다.  김석봉은 예쁜 글씨로 A트랙 B트랙 순서대로 케이스에 노래제목을 적어주곤 했는데 부탁도 한두 번이지 부끄럽고 미안해서 망설인 적이 많다.


하지만 세상은 내 손을 들어줬다. 연애편지를 끝으로 손글씨 쓸 일은 줄어들었다. 때문에 30년이 지난 지금도 내 글씨체는 여전히 족달필(마치 발로 쓴듯한 글씨)이다.  태어난 지 600개월 만에 철들기 시작하면서 글쓰기 매력을 알게 됐고 그 과정에 필사를 시작했다.  '기왕이면 필사 루틴을 만들자!' 다짐하고 글쓰기 작가의 가르침대로 인스타에_Writing 계정을 만들었다. 2022년 1월 1일 첫 번째 필사사진을 인스타에 올렸다. 나름 또박또박 꾹꾹 눌러쓴 내 손글씨는 극심한 멋, 아름다운 행복을 추구하는 인스타세상과는 상극이었다.  누가 보는 사람도 없는데 나는 문화적 큰 충돌을 예상하고,  재빨리 미리캔버스 템플릿에 필사 내용을 키보드로 옮겼다. 손글씨 해설판(자막)이라고 해야 할까? 키보드 필사 사진을 추가한 뒤 심리적 안정을 되찾았고 그 뒤로 필사를 이어갈 수 있었다.


매일 필사를 다짐했건만, 지키진 못했다.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좋은 문장은 필사하려고 애쓴다. 그렇게 필사인증은 1년 6개월이 흘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족달필을 팔로우한 사람은 107명이다.  적어도 이분들만큼은 내 족달필에 거부감이 없다는 뜻 아니겠는가?(그렇게 믿고 싶다)  이들의 뜻깊은 배려에 감사하며, 책을 한 권 구입했다.

소원풀이 시리즈 '나도 손글씨 반듯하게 잘 쓰면 소원이 없겠네'

책 속 좋은 문장이 더 돋보이도록  반듯한 글씨로 성숙해 나의 필사를 꿈꾸며 또 하나의 루틴을 시작해 본다.

"악필교정 펜글씨 연습" 배바꿈_족달필사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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