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by 오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해보니 이 일은 내 성에 차지 않는다는 걸 일찍이 알았다. 물론 사회초년생이 이런 결심을 하기에는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어떡하겠는가, 이 자유분방한 성격에 그렇지 못한 환경은 나를 안절부절하게 만들었다. 나는 목표를 잡기로 했다. 나를 불안하지 않게끔 해줄만한 목표. 목표 없이 인생을 사는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막 한복판에 남겨진 느낌이었다. 그러기에 회사 생활은 목표를 잡을만한 것이 못 되었다. 승진해서 직급을 받는건 가슴이 뛰지 않았다. 상사들을 봐도 저 자리가 딱히 탐나거나 대단해보이지 않았다.

나는 가슴 뛰는 일을 찾기로 했다. 그렇게 찾게 된 것은 ‘세계일주’. 세계일주는 너무도 멋져보였다. 일단 현실과 먼 뜬구름같은 얘기이고, 아득해보이는게 마음에 들었다. 내가 세계일주를 이루고 나면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원대한 무언가를 이루고 싶었다. 작고 반복되는 인생은 지루해보였고, 별로 대단해보이지 않았다. 나는 대단해보이고 싶었다. 모든 사람에게 박수 받고 싶었고, 무언갈 해냈다는 자부심이 필요했다. 그러기에 세계일주는 아주 적합한 타이틀이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룬 결과로 블루가 찾아왔다. 여행 후 멋진 사람이 되어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한국에 돌아온 첫 날 부터 무기력과 우울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돌아온지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블루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열심히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더 힘들어졌다. 하고 싶지도 않은 생각에 파묻혀서 골머리를 앓아야 했고, 울고 싶지 않았지만 눈물이 났다. 가장 괴로운건 힘들어하는 내 자신이 너무 밉고 초라해 보였다.


알록달록 무지개 색깔로 변해 있을 세상을 기대했다. 먼저 세계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의 글을 보면 분명 새로운 자신을 찾을 수 있다고 했기에. 그렇지만 나에게 펼쳐진 세상은 회색 빛 세상이었다. 회색 빛 세상. 그건 내가 바라지 않았던 그리고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게 세계여행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무지개 빛도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한 루저라고 생각됐다.

사람들이 날 한심하게 볼까봐 수치스러웠다. “세계일주 다녀온다더니 얘도 별 거 없네.”라고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건 누구에게서도 듣지 않은, 그저 내 머리 속에서 멤도는 말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더욱 더 학대하고 비난했다.

나를 제외한 주변 사람들, sns에서 웃고 있는 친구들, 길을 걷는 사람들까지 행복해 보였고, 인생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어보였다. 나는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힘든데 저들은 웃고있으니 너무 억울했다. 이런 일이 왜 나한테 생긴건지도 의문이 들었다. 친구들에 비해 뒤쳐진 스펙과 커리어는 여행을 후회하기까지 만들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어떻게 되었냐고? 밝은 세상은 아닐지 몰라도 새로운 세상을 살고 있는건 분명하다. 여행 후 찾아온 우울은 어쩌면 축복이 아니였을까 싶을 정도로 우울을 긍정하고 있다. 이 우울로 인해 더 성장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사람에게도 에너지가 있다는데, 다른 차원의 에너지로 가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련과 고통이 따른다는 말을 들었다. 그 과정에 내가 서있다고 생각한다. 어찌 할 수 없는 과거라면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과거도, 과거의 선택으로 인한 현재도. 그리고 서서히 나의 생각은 부정적인 블루가 아닌 긍정적인 블루로 바뀌었다.


세계일주로 얻은 결과는 우울증이라고 믿었다. ‘겨우 얻은게 우울증이라니.’라며 자책하고 후회했다. 하지만 그 결과를 '고작'이라고 단정짓기에는 성급하단 생각이 들었다. 내려가는 구간이 있으면 반드시 올라가는 구간이 온다고 믿고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올라가는 구간을 보지 못하고 끝낸다는 건 나에게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이 고통을 딛고 올라가려 한다.


PS. 앞으로 글에 등장할 루루는 나이기도 하지만, 내가 아니기도 하다. 내 무의식 속 자아들을 루루라고 칭해서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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