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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우 Aug 10. 2016

기획자의 고민

화성에서 온 프로그래머, 금성에서 온 기획자, 독후감.

나는 굉장히 특이한 프로그래머와 일한 적이 있다.

3년간 함께 점심을 같이 먹은 적이 없고, 사담을 나눈적이 없다. 회식 자리 만들어 식사한 적이 딱 한번이다. 

옆 건물에 리모트로 일하는 개발자도 아니고, 5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일하는 같은 부서 사람이었다.

신입 기획자인 나에게는 매우 어려운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과 대화를 마치고 나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되거나, 스스로가 굉장히 멍청해진 기분이 들거나, 기분이 몹시 상해 있는 채였다.

문제는 나뿐이 아니라, 사장이나 고객 또한 얼굴이 뭉개진채로 대화를 끝내는 일이 보통이었다는거다. 

같은 부서 개발자들 모두 이 사람 때문에 퇴직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누구든 이 사람과 대화하다보면 항상 듣게 되는 말이 있었는데, 

아까 내가 말했잖아요.

..라는 말이었다. 이 사람은 쉽게 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비전문가들은 이 사람이 내뱉는 전문적인 단어, 배경 지식을 필요로 하는 대화를 따라가다보면 한두번은 꼭 못따라잡고 절름발이가 되고 말았다.

말을 해줘도 알아먹질 못하냐는 억양으로 밖에는 해석이 안되던 나는 아직까지도 매우 싫어하는 말이고, 스스로 내뱉을 때에도 굉장히 후회하고 반성하게 하는 말이다.


신입 기획자였던 나는 요청을 올릴 때마다 항상 불안에 떨어야 했는데,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요청인지 아닌지에 대한 감도 없었을 뿐더러 알아보기 좋은 문서를 만들지도 못했다.

내 요청은 보통 안되는 일이거나 뭔 말인지 알 수 없는 요청으로 수렴했다.

이런 난관을 해쳐보려고 기획자 모임에서 진행하는 스터디 모임도 참여해보고 관련 글과 서적을 뒤져봤지만 기획 자체에 대해서만 공부가 되었을 뿐, 그 사람과의 대화에 딱히 도움이 되진 않았다. 

일이년 그렇게 고통받으며 지내다가 저 인간에게 부탁하느니 내가 직접 치고 말지라는 생각에 개발이 뭔지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 프로그래머인줄 알았다.

나는 전공이 만화애니메이션인데, 학교 다닐 때 매우 특이한 놈들이 많았다. 프로그래머도 유사한 특징이 있구나 싶었다. 골방에 박혀 낙서하는 애들이나 알고리즘 퀴즈 푸는 애들이나 어딘가 자신만의 세상 같은 걸 만들어 놓고 있는거구나. 하는 깨달음 같은게 있었다.


첫 직장을 그만두고 이직을 했을 때, 굉장히 오해하고 있었다는걸 알았다.

그 사람은 내 인생 전체에서도 독보적인 사람이었고 새로 만난 프로그래머들과도 매우 달랐다.

심지어 사회 생활 시작한 내 친구 몇몇도 개발자가 되어 있었다.

세상에, 내 친구들은 성격이 나쁘긴 해도 사회부적응자는 아니었다.





기획일을 하는 사람들이 항상 고통받는 것 중 하나가 이런 류의 고민 같다.

언어가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

비슷한 주제를 놓고 고민하는 기획자 커뮤니티와 서적도 많이 접했던 것 같다.

하는 일은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는 일인데, 부탁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


1층에서 2층 올라가는데 계단도 있고 엘레베이터도 있고 로켓도 있을텐데, 우리는 그냥 2층 가주세요 밖에 설명을 못한다. 거 뭐 적당히 올라가면 1초 정도 걸리겠지하며 스펙에 1층>2층, 1초라고 적을 때도 있고 난중에 생각해보니 10층이었는데 2층으로 잘못 얘기했다가 엘레베이터 없이 계단만 있는 불법 증축된 건물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책에서도 그렇고, 나도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얘기는 직접 쳐보는게 제일, 개발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가 있는 편이 좋다는 얘기다. 이 책은 무려 지면 절반 정도를 용어 설명에 낭비한다.

양놈들이 항상 하는 질문 중 하나가 디자이너가 코딩도 해야하냐는 질문인걸 보면 비슷비슷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직접 쳐보고 기획할 때와 아닐 때 차이가 크다. 거 뭐 1픽셀 틀어진거 가지고 힘드네 어쩌네 하는 애기 우습다가 CSS 들춰보고나서 1픽셀 따위 틀어지면 아무렴 어떠냐는 식으로 생각이 바뀔 때도 있고 리팩토링이 뭔데 지금 클라이언트 요청보다 급하냐고 불만에 쌓여 있다가 소스코드 이상하게 얽혀서 버그 리포트 쌓이는 것 보고나서야 뭐시 중한지 생각이 바뀌기도 했다.




헌데 여기에서 생기는 문제가 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어설프게 알고서 지나고보면 모르는 일을 안다고 생각하고서 일을 진행하니 여러 사람이 괴로워지는 일이 생긴다. 현업 개발자에 비하면 수준이 다른데도 나도 쳐봤다고 생각하니 적정선에서 멈추질 못하고 설레발 치다가 업무는 늘어나고 일정은 망가지고 원하던 그림은 없어지고 책임도 못지고 .. 개인적으로 같이 일했던 개발 팀장님에게 저 선무당 얘길 들었다.


더 고민인 것은, 기획자가 필요하냐는 질문.

기획자의 자질, 기획자에게 필요한 역량으로 검색하면 나오는 슈퍼맨 같은 능력 리스트, 개발도 잘 알고 디자인 트렌드도 잘 알고 문서도 잘 만들고 어쩌고 저쩌고를 보면 우왕굿, 나도 저런 사람 되어야지 싶지만.

이것저것 남의 영역까지 잘 알고 역량과 자질을 갖춰야 할 이유가 어쩌면 각자 영역에서 흘리는 일이 아니면 딱히 할 일이 없는 직종이기 때문이 아닌가.

가만 생각해보면 슈퍼맨 급 인재풀로 채워넣은 조직이 있다고 치고, 디자이너와 개발자도 비슷한 급으로 능력 리스트 채워넣으면 기획자가 할 일이라는 건 점점 없어지는 것은 아닌가. 

나는 과연 다른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고, 다른 사람에게 잘 맞추는 것으로 이 직업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원했던 기획 vs 자꾸 의심되는 상황

세상에 기획자가 읽으면 좋을 추천 도서에 내용 절반이 개발 용어 정리라니. 

괜찮은걸까 기획자...




다시 처음의 그 개발자 얘기를 조금 덧대면, 

지금 다시 그 사람과 일하게 된다면, 그럭저럭 잘 할 것 같다. 

몇 년 쫒기며 코드 정리할 시간 없이 쌓고 쌓다가 다른 개발자들은 문서화도 없는 레거시 보고 질려서 나갔을 것이고 혼자 남아 고생은 했겠지만 점점 회사가 의존하는 핵심 인재가 된 상황이었다. 

적당히 요구사항 쳐내고 이슈 기록 좀 해주고 전달 해주면, 얼굴 마주칠 일도 없을 것이고 딱히 대화할 일도 없겠고....

하지만 열 받는 건 그 사람은 그 깽판을 쳐도 인정받는 개발자였지만 

나는 딱히 회사가 의존할 필요 없는 고만고만한 기획자라는 것... 





화성에서 온 프로그래머, 금성에서 온 기획자, 제 점수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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