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시대

사랑의 독립성

by 예담


20대 초반에는 그저 풍덩 빠져들었다. 이것저것 재어 본들 사랑에 빠지면 꿈처럼 아득해졌다. 한여름 더위에 취해서 일단은 시원한 계곡에 첨벙 빠져들고 이단은 땡볕에 엉거주춤 젖은 옷을 말리든, 여벌의 옷을 챙기지 못했음을 후회하든, 그러거나 말거나 발개진 얼굴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던, 젊음의 무모함이란 길지 않아 더욱 달았다. 사랑의 독립성을 몰랐을 때 나는 종종 나를 잃어버리곤 했다. 원 플러스 원이 당장은 좋아 보여도 실은 한 개씩 따로 놓여있어도 당당한 물건이 더 값어치 있는 건데 말이다.


세상에! 드라마에 나올법한 말을 이별할 때 내뱉은 적도 있다. '네가 없음 살 수 없다고.'

오글거리지만 진심이었고 진부하지만 시간이 약이었다.




사랑을 하면 풍경을 진하게 보는 시인이 되고 시간 속에서 부자가 된다. 마른나무에 잎이 돋고 그 잎에 새가 와서 앉는다. 그렇다고 찬란한 날들만 만나게 되지는 않겠지만 전반부에는 요상한 것들이 요상하게 와서 충돌한다. 누굴 좋아한다는 건, 기분 좋은 어느 맑은 날이 가슴에 한가득 들어와 있는 상태다. [이병률 산문집]




드라마에 감흥이 없어져 보지 않은지가 언제부터였더라? 몰입해서 보았던 마지막 드라마는 미스터 선샤인이었던 것 같다. 슬기로운 의사생활도 띄엄띄엄 몇 화 보다가 말았다. 드라마를 끌고 가는 여러 요소가 있겠지만 연애가 스토리의 주가 되면 어쩐지 시시해졌다. 미스터 선샤인이나 슬기로운 의사생활처럼 (공감이 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나오는 드라마는 감정의 흐름을 좇고 싶어 진다.


예컨대 결혼을 하고 나선 가족에 대한 사랑, 타인에 대한 연민, 혹은 역사를 엿볼 수 있는 드라마에 흥미가 갔다. 당당한 여성이 자신의 삶을 마주하는 스토리를 좋아하지만 오그라드는 설정은 너무나 한결같아서 뭔가 사이다처럼 목젖을 탁 치는 상쾌함이 없었다.


그런데 사랑이 전부인 한 프로그램을 보고 있다. '환승 연애'라는 프로그램을 보며 눈물이 나는 내가 생경하게 느껴졌다. 청춘들의 연애 예능이었을 뿐인데 그들의 이별에 덩달아 슬펐고, 꽁냥 대며 장난치는 시시콜콜한 시간이 부러워지기도 했다. 당연히 조금의 연출은 있겠으나 거의 날것의 펄떡대는 마음들은 한여름의 계곡처럼 뜨겁고 차가움이 공존했다. 재고 따지는 속도보다 빠르고도 느린 마음을 따라잡을 수가 없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다시 웃고, 모든 연애는 사실 그러했다.



사랑에 빠진 이들은 예쁘다. 지상에서 제일 힘이 센 사람들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다.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깊은 친밀감과 마법 같은 일체감. 사람이 긴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사랑의 감정이 있기 때문일 터. 사랑하지 않는 순간은 손해다. 설령 사랑 때문에 아프게 될지라도 사랑에 빠지는 것이 남는 장사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엄격한 정적을 훌쩍 뛰어넘는다. 잘 감동하고 잘 동화된다.
그들은 경계 없이 노닌다. [시인 김선우 산문]



좋아함의 크기 차에 의해 갑과 을로 나뉘는 연애의 희비는 사실 누구의 잘못도 아님에도 사랑하고 원망할 수밖에 없다. 내가 을이었을 때의 연애는 매 순간이 설레고, 조심스럽고, 소중하고, 애틋하고, 이 행복이 다할까 두렵기도 한 기쁨이라면 갑일 때의 연애는 달라진다. 행복인 줄도 모르게 조용히 행복하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설렘과 편안함을 느낀다.


시절 인연이라고 했던가, 결혼은 정말이지 연애와는 별개다. 영원히 식지 않을 것처럼 뜨거웠던 마음을 뒤로 한채 두 손의 온기에 의지해서 다른 마음을 동글동글 빚어내기도 한다.






이 사람이 아니면 죽을 것 같던 사랑은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을 야금야금 갉아먹다 종국엔 파사삭 부서지고 만다. 강약 조절이 안 되는 사랑은 초바늘의 속도만큼 지치게 마련이다. 사랑을 담보로 의지해서 그러했다. 단단하지 못한 마음을 가졌기에 사랑이 집이 되어버리고 아늑해진 집속에서 마음을 뉘었다. 몇 번의 계절이 지나며 단단하고 빛났던 집에 물이 새고 벽지의 색이 바래질 때쯤 담보는 더 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어진다.


문을 열고 함께 나가면 참으로 바람직하겠으나 어디 마음의 일이 그렇게 딱딱 맞아떨어질 수가 있나. 떠나는 이의 마음도 유감이겠지만 ( 떠나는 이처럼, 유감이라는 단어는 뭔가 냉정해 보여. ) 남아있는 이의 마음은 사라진 아늑함을 쫓아가서 내 담보를 돌려달라고 울고 싶은 심정이 된다. 새로운 집에서 다른 아늑함을 느끼며 살고 있는 우리는 그렇게 사랑의 빚이 어느 정도씩 있다.


뭉근하게 좋은 사람을 만나 단단하고 독립적인 연애를 하면 담보 없는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그의 옆이 아니라 나의 자리에 서 있을 때, 함께라 좋지만 혼자여도 괜찮을 때, 서로의 독립성을 존중해줄 때, 그런 사람과 결혼을 했다. 그와 연애를 할 때 따로 친구와 해외여행을 다녀오기도 하고, 황금 같은 휴일에 데이트 시간을 반으로 쪼개어서 각자의 지인을 따로 만나기도 했다. 연애가 최고의 기쁨이었으나 연애가 전부는 아니었다. 마음을 꽉 쥐고 놓지 않으려 힘을 주지 마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럴수록 더욱 무거워만 지니까.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은 침대가 아니라 멘탈에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