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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담 Sep 11. 2019

명절은 멀미와 함께 오고 갔다.

좋음과 싫음을 넘어선 무수한 감정의 멀미들. 


멀미 : 
1. 차, 배, 비행기 따위의 흔들림을 받아 메스껍고 어지러워짐. 또는 그런 증세.
2. 진저리가 나도록 싫어짐. 또는 그런 증세.
3. 어떤 분위기에 깊이 몰입하거나 흠뻑 취했을 때 느끼는 현기증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어렸을 때의 명절은 1번의 멀미로 시작했다. 경남 진해에서 출발하여 부산 광안리에 있는 큰집을 갈 때마다 멀미가 심한 나는 웩웩 구토를 해댔다. 늘 있는 일이니 엄마는 태연하게 봉지를 준비했었고 나는 어김없이 전쟁을 치렀다. 외갓집은 굳이 명절이 아니어도 주말마다 오가는 같은 진해였기에 멀미가 없었다. 


외갓집은 익숙했고, 큰집은 어색했다. 그것이 단지 외면적인 느낌이었다는 것을 안 것은 한참 자라고 난 뒤였다.  익숙하지만 불편한 마음이 있고 어색하지만 편한 마음이 있다. 그런 마음들은 허공에 둥둥 떠서 손을 아무리 뻗어도 잡히지 않았다. 


부잣집이었던 외갓집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안에 집이 다시 3개였다가 4개였다가 5개로 불어났다. 

넓디넓었던 우리 할머니 집. 학교 마치고 집에 가기 싫은 날, 용돈 다 쓴 날은 버스를 타고 할머니 집으로 갔었다. 그 시절 어른들이 다 그렇듯 할머니도 남자인 내 동생을 더 예뻐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정말 괜찮았다. 아귀찜을 즐기셨던, 미더덕을 와그작와그작 씹으시던 나의 외할머니가 있었고, 나에게 존경이라는 마음을 처음 심어주었던 작은 외숙모가 있었던 외갓집은 참 따뜻한 곳인데 명절만 되면 색이 변질되었다.


고려대 나온 큰외삼촌은 할아버지에게 큰 건물과 평생 먹고살만한 재산을 받았지만  외할머니는 모시지 않았고,  (큰외삼촌의 사위, 즉 사촌언니는 카이스트 연구원과 결혼했다. 대머리다. 대머리를 비하하는 게 아닌, 학력에 대한 집착을 웃음으로 승화시킨다고 해주자. ) 국민대 나온 작은 외삼촌이 외할머니와 함께 살고 계셨다. 우리 작은 외숙모는 날개 없는 천사였으니까.  우리 엄마만큼이나 호탕하고 강한 성격인 이모도 함께 그들이 다 모이면 골치가 아팠다. 


큰외삼촌은 학벌로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이모는 밝음과 명랑함을 줄곧 강요했다.

작은 외숙모는 다 괜찮다고 했고 늘 무언가를 주섬주섬 챙겨주었다. 작은 외삼촌은 공부와 성적에 대해 묻고 또 물었다. 몇 분 안 되는 순간들이 모이면 어김없이 나는 위축되었다. 

하나같이 강한 사람들 사이에서 웃으며 농담을 할 만큼의 넉살도 없었거니와 내 작은 말을 가만히 들어줄 만큼의 고요도 없었다. 왁자지껄하게 웃음이 오갔지만 나는 웃음이 안 났다.




어른이 되고도 한참이 지난 뒤에서 야 나는 그 꼬맹이의 마음을 만져주었다. 아주 우연이었다. 

엄마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손녀(내 딸)에게 웃으라고 예쁘게  웃으라고 자꾸만 이야기했던 날이었다. 

종종 있었던 일이었는데 그날 확 뒤틀렸다. (왜냐면 웃으라는 말에 내 딸이 정말 웃었기 때문이다.)

"엄마! 웃고 싶을 때 웃는 거잖아요. 인형도 아니고 어떻게 계속 웃고만 있어요? 애들도 감정이 있는데. 애들도 찡그리고 싶으면 찡그리는 거지요. 예쁜 표정만 짓는 것도 가식 아니에요? 안 웃으면 어때서 "


터지기까지는 백만 년이었는데 터지고 나니 물길을 잡을 수가 없었다. 별말 아닌데 뭘 그렇게 참아? 라고 느낄 누군가도 있겠지만 그냥 그런 아이였다. 부모의 말을 거스르지 않는, 어른의 말에 토달지 않는, 작은 아이. 


엄마 그리고 나는 어렸을 때 이모가 자꾸만 웃으라고, 사진 찍는다고 웃으라고, 이를 보이게 크게 웃어야 더 예쁘다, 모여서 밥 먹을 때면 더 먹으라고 팍팍 많이 먹으라고 잘 먹어야 예쁘다,라고 하고 외삼촌이 공부 얘기만 할 때마다 진저리가 났다고.  엄마는 몰랐겠지만 나는 대궐 같았던 부잣집 외할머니댁 보다 멀미를 일삼으며 힘들게 갔었던 불편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었던 큰집이 차라리 나았다고.  나는 이모보다 큰엄마와 작은 외숙모가 훨씬 더 좋았다고. 


왜냐면 그들은 나에게 예의를 갖추고 존중해주었고, 있는 그대로를 예쁘다고 해주었으니까! 


그래서 익숙함보다 어색함이 더 따뜻했던 거였다. 

나도 모르게 뱉었다. (와... 드디어... 몇십 년 묶은 말을 뱉어내니 이렇게 시원할 수가...) 시원하긴 한데, 겁이 났다. 멍... 어쩌지. '이제 죽었다' 싶었는데 엄마가 그런다.  "아이고 ㅎㅎㅎㅎㅎ 말도 잘한다 그랬어? " 


엄마의 큰 웃음에 뱉어낸 말이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역시. 우리 엄마는 고수다. 


 




어른이 되어서의 명절은 구토 없는 멀미가 났다. 감정은 달라졌으나 결은 마찬가지였다. 만삭의 배로 자세를 바꿔가며 전을 부칠 때, 소파에서 티브이 보던 아가씨가 얄미웠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태연한 모두의 태도가 놀라웠었다. "왜 도우라고 안 할까?" 생각하다가 생각을 접었다. 그것 역시 나만 보이는 허공에 떠있던 마음이었으니까. 그리고, 우리 아가씨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는 도왔다. 전을 부치던 뭘 하던 손을 거든다. 출산과 엄마로서의 삶, 시간이 절로 그렇게 만들었을까. 


우리는 모두 동전처럼 양면이 존재하니까. 뒤집혀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올케이자 시누이다. 두 번 생각하면 그 동전은 내 것이 됨을 알았다.






딸로 살아가고 엄마가 되며 할머니도 될 것이 자명함에도 되지 않았을 때는 결코 모르는 고이 접힌 마음이 있다. 짠하고 눈물 나지 않아도 먹먹하다. 어쩌면 그 먹먹함은 켜켜이 쌓인 나의 모자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활달하고 강하며 사교적이고 언제 어디서든 호탕하게 잘 웃었다. 학교 운영위원회장에 부녀회장 그리고 지금 이 나이까지 자원봉사회장이다. 뭐든 리더가 되어 이끌며 중심에 있기를 즐겼던 엄마, 발표조차 굳이 손들어하기 싫었던 나는 그런 엄마와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그런 생각을 할 때면 한없이 움츠러들었다. 


엄마는 언제나 빛났고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했고 아이는 그저 소박한 사랑이 고팠다. 엄마의 느린 시간과 허점에 기대어 졸고 싶었으나 그녀는 완벽했고 바빴다. 


엄마가 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엄마를 이해함과 동시에 이해하기 싫었다. 나도 내가 되고 싶었으므로 나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었으므로. 온몸에 힘이 플린 채 누워 아이를 낳고 머리카락이 풀린지도 모른 채 뛰어서 아이를 등원시키는 엄마이자 한 여자로서의 일상을 견디며 비로소 알게 되는 것.

나의 엄마가 치열하게 그 모든 것을 해내며 시시한 나의 도시락도 매일 정성스럽게 싸주었던 기억.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으며 매사에 정성을 들이던 마음. 그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마음 말이다. 


명절에 큰집을 가기 전 검은 봉지부터 챙기던 엄마의 뒷모습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도착해서 앉을새도 없이 종일 명절음식을 하던 엄마의 노고는 보고 또 보아도 하릴 없었다. 기가 하늘을 찌르던 외갓집을 다녀오면 늘 아빠눈치를 보곤 했던 엄마의 마음은 어떤 색이었을까. 외갓집에만 가면 작아졌던 나처럼 엄마도 그런 뒷면이 있었을까. 


나는 아직도 모른다. 엄마는 나에게 뒷면을 보인적이 없으니. 

그러니 아직도 한참을  멀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전화가 왔다.

시댁 가기전 애들 머리 깔끔하게 잘라서 예쁘게 하고 가라는 마알쓰음! 



안 잘랐다. 

자연스러운게 좋은 거니까. 

나의 아이의 유년의 기억속 명절은 자연스러웠으면 좋겠다. 

부산스럽지 않고 물 흐르듯 편하길. 


자르지 않은 덥수룩한 머리를 보자마자 엄마는 잔소리를 하겠지. 나는 다만 생기있는 그 잔소리를 오래오래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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