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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이 필요한 이유

몰입이 주는 행복감.

by 예담


[몇 년 전 여름방학에 썼던 글을 수정하여 재발행합니다.]



바야흐로 여름방학이다. 매미가 목청을 높여 맴맴 울고 잠자리가 분주하게 날아다니며 아이들의 천진함과 어우러진다.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놀수록 지치기는커녕 에너지가 샘솟는 아이들은 여름과 친하다. 긴 하루 덕분에 더 많이 놀 수 있고, 방학이라 생긴 취침시간의 유연함 덕분에 늦은 밤에도 책을 실컷 읽을 수 있다.


늦게 지는 해는 즐거움을 오래 갖도록 해준다. 방문을 열어두고 이불을 걷어차고 잠드는 자유로움은 여름밤의 또 다른 매력이다. 한여름엔 거실에 에어컨을 켜 두고 다 같이 잠들기도 한다. 여행 온 것 같다며 아이들이 환호를 보내는 거실 취침은 방학과 함께 시작되는 루틴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어제는 두배로 데이! 무슨 날인가 하면 책을 두배로 빌릴 수 있는 날이다.


어김없이 큰아이는 창작영재학교에 등교하고 작은아이와 근처 도서관에 가서 책 30권을 대출했다. 책을 짊어지고 근처 스벅으로 왔다. 우리의 또 하나의 루틴. 어깨가 빠질 것 같아 가방끈을 여러 번 매만지며 메는 일도 익숙하고, 든든한 기분도 익히 알고 있던 배부른 마음이다. 큰아이의 수업이 끝날 때까지 작은 아이와 둘이서 시간을 보낸다. 실컷 책을 읽으며 음료와 케이크를 먹는 즐거움은 도서관과는 다른 일탈을 준다.


에어컨 바람에 머리가 지끈 거리면 우리는 근처 공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위엄을 뽐내고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읽다만 책을 펼쳤다. 걸어오는 동안 송송 맺혔던 땀방울이 불어오는 한 줌의 바람에 날려가며 서늘해지고 몸의 열기를 식혀주면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푸르른 입사귀와 바람을 거스르며 달리고 달리는 아이를 번갈아보며 웃었다. 최고의 행복을 만났던 푸르른 날로 기억한다. 우리는 준비를 하고 행복을 찾으러 향하지만 그 친구는 우연한 만남을 좋아하여 기가 막힌 타이밍에 모퉁이를 돌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목적지를 향해 걷느라 보지 못하고 지나친 행복이 많았다는 것을 이제는 얼핏 안다.


집 근처의 도서관 두 군데를 주로 이용하며 자주 가는 지역의 도서관도 알차게 이용하고 있다. 상호대차와 희망도서도 신청하지만 그럼에도 없는 책들은 여러 곳의 도서관을 다니며 찾아 읽고 대출해 온다. 영재수업이 있는 날은 그 근처의 도서관을 이용한다. 매달 마지막 주 수, 금은 두배로 데이이다. 책을 두배로 대출할 수 있으니 우리 셋이 가면 30권을 빌려올 수 있다. (공공도서관은 2주 동안 일인 최대 5권 대출 가능하며 상호대차는 2권 신청 가능하다. 희망도서 신청은 10일 간격으로 3권씩 가능하다.)


도서관의 이점은 이럴 때 폭발한다. 서점에 가면 꼭 읽고 싶은 책을 몇 권 골라야 하기에 자신의 취향이 반영된 책을 고르게 된다. 편식하지 않고 두루두루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아이가 읽고 싶어서 가져온 '다소 흥미위주의' 책을 부모가 원하는 '바람직한 추천 도서' 같은 책으로 굳이 바꾸고 싶진 않다.


모든 책은 나름의 이유가 있고, 당장 얻는 결과물이 아닌 마중물이라고 생각한다.

쌓이고 쌓인 책들이 결국 수많은 길들로 이끌어줄 거라고. 펼쳐져있는 길들 속에서 헤매는 시행착오를 통해 멋진 길이 아닌 가고 싶은 길을 찾아내었으면 좋겠다.


아무튼, 도서관에 가면 편중되었던 독서취향이 조금씩 개선된다. 예컨대 아이들이 주로 머무는 서가가 있다. 아이들의 취향이 담긴 서가에서 3권, 발길이 닿지 않았던 서가에서 3권, 또 다른 서가에서 3권, 이런 식으로 책을 고르는 습관을 가지게 한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빠르게 몰입하여 습득하는 기술이 있다.


"엄마, 표지를 보니까 재미없을 것 같았던 책인데 읽어보니 새롭고 재미있어! 진작에 읽어볼걸."

"엄마, 글이 작아서 어려울 것 같았던 책인데 재미있고 쉬워. 시시하지도 않고 흥미진진해."


많은 아이들이 도서관에 가서 다양한 책들을 접하며 스스로 고를 수 있었으면 한다. 읽는 즐거움 이전에 책을 고르는 설렘을 먼저 느끼면 읽으며 더욱 빠져들게 된다. 스스로 고른 책을 읽는 아이들은 책을 조심해서 다룬다. 마음에 쏙 드는 내용과 눈이 번쩍 뜨이는 지식을 만나면 책에 반하기도 한다. 한 권의 책에 빠져서 몇 번씩 읽고 들고 다니는 아이들이 적지 않은 것도 비슷한 연유일 것이다. (도서관에서 읽고 반한 책은 대부분 서점에 가서 소장용으로 구입을 하지만, 막상 서점에 가면 또 신간 코너에서 새로운 책에 마음을 빼앗기고... 화려한 마케팅의 노예가 되어 띠지로 멋을 부린 잘생긴 책을 들고 온다. )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도서관으로 향한다. 아이들이 책을 더욱 부지런히 읽는 이유는 반납을 해야 새책을 빌릴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감이 있으면 집중력을 끌어올릴 수 있기에 종이에 책의 제목과 반납일자를 적어 거실의 중간에 붙여놓는다. 반납일을 연장할 수 있지만 다 읽지 못한 책은 어김없이 반납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혼자 읽는 책이 아니기 때문에 기일을 지키는 것은 약속이라고 말해주었다. 물론 연장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지만 책을 기다리는 다른 사람을 헤아릴 줄도 알아야 하며, 2주는 충분한 시간이다. 그 시간에 읽지 못한 책은 며칠이 지난다 해도 손이 가지 않을 것이니 욕심을 버리고 반납하자 한다. 미뤄두고 읽지 않은 책을 반납한 날에 학교를 다녀온 딸아이가 하필 그 책을 찾아 헤맨 적이 있었다.


2주 동안 거들떠도 보지 않더니 참 묘했다. 기한이 되어 반납을 하고 왔다고 했더니, 시간이 없어서 못 읽었는데 오늘 읽으려고 했었다고 아쉬움을 표한다. 거실에 떡하니 붙여둔 날짜를 스스로 확인하지 못한 불찰이기에 어쩔 수 없다. 이틀뒤 도서관에 가서 미련이 남은 그 책을 다시 빌려온 아이는 하루 만에 책을 다 읽고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몰입은 가치 있는 경험이자 행복을 가져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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