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하고 비밀스러운 기쁨
학교를 마치고 학원차를 기다리는 아이들 사이로 우리 아이가 걸어온다.
우리의 행선지는 어김없이 동네도서관이다.
새로운 생각, 새로운 말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가 있는 곳에서 새로운 사람이 태어난다고 했다.
도서관으로 걸어가며 아이는 쉬지 않고 말했다. 급식반찬과 학교에서의 소소한 에피소드를 쏟아내며 들뜬 기색이다. 신나게 걸으며 혈액이 순환되어 생기가 가득해진 분홍빛 얼굴로 가뿐 숨을 내쉰다.
도서관에 가면 조용히 해야 하는 것을 알기에 길목마다의 횡단보도에 이르면 발걸음을 멈추고 새로운 이야기를 더해갔다. 폭염과 장마 때는 땀과 비로 흠뻑 젖은 채 책만 젖지 않으면 된다고 낄낄거리며 고생을 사서 했다. 찝찝한 것을 견디는 힘이 부족했던 둘째는 그 나이에 맞게 징징대었지만 꽤 잘 따라다녔다. 아이러니하게도 고학년이 된 아이는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었던 한여름에 도서관 가던 길이 가장 기억에 남고 좋았다고 한다.
연유는 엄마가 정말 더운 날 도서관 가는 길에 허락해 주었던 얼음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더워서 헥헥 숨도 쉬기 힘들 때, 얼음아이스크림을 쏙쏙 털어 입에 집어넣고 오드득 오드득 씹어먹으면 온몸이 시원해지고 입안이 청량해지면서 기분이 좋아진다나 뭐라나. 게다가 양도 많단다.
한여름이 주었던 무더위보다 순간의 시원하고 달았던 기억이 더 강렬하게 남았고 그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면 언제든 도서관 가는 골목골목이 모두 떠오른다고 했다. 추억이란 그런 것이다. 아이스크림처럼 언제나 꺼내어먹을 수 있는 나만의 비밀스러운 기쁨.
살면서 어느 외롭고 힘든 순간에 하나씩 꺼내어 먹으며 마음을 녹이기를 바란다.
나의 유년시절도 책과 얽힌 아이스크림 같은 추억이 있다. 마흔이 넘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는 나의 비밀스러운 기쁨은 가나초콜릿 하나를 사 와서 초콜릿공장의 비밀책을 읽으며, 천천히 한 피스씩 똑똑 잘라서 음미하며 먹는 것이었다. 그리고 엄마한테 퇴마록 신간이 나오기 무섭게 사달라고 조르고 침대구석에 기대어 퇴마록을 읽으며 두려움과 재미에 빠져들었던 기억도 고작 국민학생 때였다.
엄마는 도서관 가는 길을 생각하면 봄. 봄이 생각나.
학교 앞에 가서 아이들을 기다리며 벚꽃사진을 찍었다. 꽃망울이 톡톡 터지며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들이 얼마나 예쁜지, 한참을 취해서 바라보고 있다가 종이 울리면 저만치에서 뛰어나오는 아이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백 미터도 넘는 거리에서 뛰어나오는 수많은 아이들 속에서 내 아이를 발견했을 때의 희열이 무엇인지 부모들은 알 것이다.
가방에 넣어 온 간식을 입에 쏙쏙 넣어 오물거리며 도서관으로 걸어가는 길은 따스하고 충만했다. 오늘 무사히 학교를 다녀온 것에 감사하고 지금 내가 너희들과 함께 도서관으로 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더할 나위 없이 호사스러웠다. 걷다가 만난 벚꽃나무 앞에서 사진도 찍고 날리는 벚꽃을 잡으려 뒤뚱거리며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를 보이며 웃었다. 하여 봄에는 스치는 하루가 아쉬워 더 열심히 도서관으로 걸었다.
도서관에 가는 길은 나를 다정하게 만들었다. 작은 것에도 감탄하여 쓰고 싶은 마음이 동하여 보고 느낀 것들을 소중하게 담았다.
도서관카드로 한 번에 5권이 대출가능하다. 온 가족의 카드로 20권을 빌려올 수 있기에 도서관 가방을 두 개씩 들고 다녔다. 신간도서의 서가가 따로 있는 도서관의 경우에는 도착하자마자 신간서가로 향했다. 읽고 싶은 책을 한가득 품에 안고 자리에 앉아서 도서관에서 읽을 책과 집에 가져갈 책들을 분류했다. 아이들도 똑같이 한다.
아이들은 각 7권씩 14권, 나는 6권, 합하여 20권을 빌려야 하기에 권수를 정해 놓는다.
빌리고 싶은 책이 더 많다 해도 엄마가 물러서지 않음을 아이들은 안다. 엄마도 빌리고 싶은 책이 6권이 넘기에 늘 고군분투하며 고르는 것을 익히 알기 때문이다.
책은 스스로 고른다. 권장도서를 골라서 아이 앞에 내미는 수동적인 독서를 지양했다. 능동적으로 독서를 즐기기 하여 스스로 책을 고르고 선별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는 물론 존재했다.
먼저 책에 익숙하지 않았던 둘째 아이는 7권을 채워서 고르기도 힘들어했다. 2권을 골라놓고 학습만화 보기에 열중하고 있는 아이에게 5권을 채우라고 말하지 않았다.
땡큐다. 내 책을 더해서 골랐다.
집에 온 아이가 왜 내 책은 개수가 왜 작냐고 묻길래 고른 만큼 빌려오는 것이고, 더 읽고 싶으면 언제든지 다시 가서 빌리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대신 또 빌리고 싶으면 지금 빌려온 책들을 다 읽고 반납해야 함을 강조했다.
바짝 약이 오른 아이는 이틀 만에 빌려온 책을 다 읽어버리고 도서관으로 가자고 했다. 덕분에 나도 서둘러 책을 읽었다. 비장한 마음으로 도서관에 당도한 아들이 야심 차게 책을 골랐는데 권수가 다 차서 대출불가라면 낭패가 아닌가. 덕분에 나도 이틀 동안 꼬박 책에 몰두하여 3권을 읽어내었다.
읽고 싶은 책을 책상 위에 놓고 각자의 시간을 갖는다. 먼저 분류작업.
책표지와 프롤로그, 그리고 뒷면을 보면 이 책의 대략적인 내용과 의도, 중심문장이 나온다. 그것을 보고 꼭 집에 가져가서 천천히 읽고 싶은 책을 우선순위로 뽑아둔다. 우선순위에 있는 책들이 권수를 초과하면 목차를 읽고, 그중에 한 챕터를 골라서 읽어본 뒤 마음에 동하는 것을 고른다.
학습만화, 단편소설이나 짧은 동화, 인물만화 같은 책들은 금세 읽을 수 있기에 도서관에서 읽고 간다. 읽고 싶은 만화책을 최대한 누리고 가려면 빠져들 수밖에 없다. 천방지축 둘째 아들은 마법천자문과 수학도둑을 끼고 꿈적도 하지 않았다.
아들을 데리고 처음 도서관에 갔을 때, 글을 모르던 늑대소년이었다. 첫째는 5세 때 글을 읽고 6세 때부터 일기와 짧은 글을 쓰는 것을 즐겨했지만 딱히 무엇을 시켜서가 아니었다. 책벌레였던 아이에게 많은 책을 접하게 해 주었고 아이는 그 속에 빠져서 나올 줄을 몰랐다.
반면 둘째는 책을 좋아하기는 했으나 누나처럼 빠져들 줄은 몰랐다. 더 확실하게 좋은 것이 있었으니 도파민이 세로토닌을 이겼다. 베이블레이드라는 팽이가 책 보다 훨씬 재미있는 아들의 마음을 존중하고 십분 이해했다. 아들은 우리가 책을 읽을 때 팽이를 돌리고 팽이이름을 외우고 심지어 색종이로 팽이를 접었다.
코로나가 터져서 마스크를 사려고 약국에 줄을 서도 구할 수 없었던 그때, 아들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입학식도 없이 대면수업도 아닌 줌수업으로 친구와 선생님을 만나며 학교생활이 시작되었고 가만히 앉아서 화면만 바라보아야 하는 학교수업이 1학년 아이에게는 반갑지도 흥미롭지도 않았다.
학교를 가지 못하고 코로나로 외출이 힘들었던 시절, 아이는 책을 읽었다. 한글을 유창하게 읽지 못해도 더듬더듬 단어를 읽고 그림을 보면서 내용을 유추했다. 엄마가 항상 책을 읽어줘야 한다는 편견을 버리면 아이도 자유로워진다. 나는 밤마다 책을 읽어주는 엄마가 아니었다. 어떤 날은 그림을 보고 아이에게 이야기를 만들어 읽어달라고 했으며 또 어떤 날은 그림책의 내용을 내가 각색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또 다른 날은 내가 읽었던 소설의 이야기를 바꾸어서 들려주기도 했다. 그야말로 우리만의 이야기였고 밤의 도서관이었다.
추천 도서라 해서 모든 사람에게 울림을 주지는 않듯이, 권장도서라 하여 반드시 아이에게 읽힐 것도 아니다. 세상의 수없이 많은 책들 속에 알려지지 않은 보석 같은 책을 우리 아이가 가장 먼저 발견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유일한 종족인 인류가 멸망직전에 있다 해도 도서관은 불을 환히 밝히고 고독하게, 그리고 무한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소중하고 쓸모없으며 썩지 않고 비밀스러운 책들을 구비하고서 영원히 존속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바벨의 도서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