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미국식 발음만이 살길인가?

by Claire Kim

1. 절대로 사랑 할 수 없는 나의 영어 발음.

영어를 꽤 잘하는 사람들 중에도 (중급 이상의 자유자재로 구사한다고 할 수 있는), 한국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영어 발음을 '혐오'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인들이 자신의 영어 발음을 싫어하는 이유 중의 대부분은 가장 익숙하고 '정통'이라 알고 있는 '미국식 억양 또는 발음'과 너무나 차이가 나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서 "I go to school."이란 문장을 읽으면 '아 이 고 투 스 쿨' 딱 6번의 음절로 명확하게 떨어지는 한국어식 발음에 비해 성절음(syllable sound)기준으로 미국식 억양으로 읽으면 4번의 음절이 떨어지게 된다. 이는 연음과 더불어 '음악'처럼 매끄럽게 떨어지는 원어민 발음에 비해 평생 노력해도 절!대!로! 고쳐지지 않는 '촌스럽다고 느껴지는' 한국어식 발음의 현실이다.



2. 이 쯤 되면, 집착 수준?

사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가 미국이란 나라에 대한 동경, 특수한 의존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대조언어학적인 관점에서이든, 비즈니스 실무 영어 관점에서든, 교육적 목적에서든 38년간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밥벌이하는 입장에서 보면 유독 '미국식 발음'에 집착하는 한국 사람들의 고정 관념은 가히 경악할만하다. 한국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에게 의도적으로 영국식, 호주식 발음을 들려주며 영어 태교를 하는 엄마가 거의 없다는 것은, 이미 출발선에서부터 '미국식 발음'이 '표준'이자 '정답'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셈이다. 토익이나 텝스 등에서 호주식, 영국식 발음이 섞인 Listening Test 를 시작한지가 10년이 넘었지만 유튜브 같은 SNS, 소셜미디어, 넷플릭스, 영화등 각종 다른 매체에서 접하는 각 국의 다양한 억양이 섞인 영어는 '내가 배워야할 영어'로 취급하지 않는 것도 같은 얘기이다.


사실 한국인의 머릿속에 '영어발음 = 영어 실력'이란 고정관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반기문 전 UN사무총장의 연설을 두고 한국인과 영어 원어민들이 얼마나 엇갈린 평가를 내놓았는가에 대한 실험(2013년, EBS)이다. 독학으로 영어를 배운 반기문 전 총장의 영어 연설은 원어민들 사이에서는 '완벽'에 가까운 영어실력이라 평가를 받은 반면에 한국인 피실험자들의 반응은 대부분 '발음'이 너무 정확하지 않다, 초급 수준의 실력일 것 같다(연설의 영상이 아니라 반기문 총장의 목소리만 들려준 실험)의 평가 일색이었던 것이다. 한국인들이 반기문 전 총장의 영어 실력을 폄하하게 된 이유는 그의 한국식 영어 발음이 실력까지 '후져보이게'했기 때문이다. 정확하고 적절한 어휘, 상황에 맞아 떨어지는 비유, 오류 없는 문법, 자연스러운 문장등의 요소는 한국인들이 영어 실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아닌 것이다.


특히 나 같은 경우 '교육용 목적'의 영상이나 오디오물에 영어 내레이션, 광고 작업등을 할 때, (저는 상품, 브랜드 바이럴 비디오, 공공기관의 홍보 영상물등의 한국어, 영어 성우로 활동 중입니다.) 매번 '완벽한 미국식 발음', '미국식 발음 원어민'을 고집하는 고객들 때문에 황당할 때가 많았다. 이미 녹음 샘플을 보내서 컨펌을 받았는데 정작 녹음하는 당일, 클라이언트가 녹음 스튜디오에서 퇴짜를 놓고 원어민 성우를 쓰기로 했다며, 녹음비를 지불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황당해하는 나에게 녹음실 PD가, 엊그제 영국인 성우도 같은 이유로 퇴짜를 놨다며 덧붙이는 말이 위로 아닌 위로로 다가와 뒷 맛이 엄청 씁슬 했던 기억이 있다. 그 뒤로도 '스웨덴 같은 유럽 출신의 다른 외국인 성우와 이미 작업을 했는데 유럽 억양의 발음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의 샘플을 채택했다'며 '미국식 발음'에 최대한 가깝게 녹음해달라는 식의 요청은 계속 이어졌다.


나의 영어 발음은 앞선 글("영어, 포기 할 수 있으면 포기해라?"https://brunch.co.kr/@ddamang/7)에서 밝혔듯이 12살까지 미국의 표준 발음을 담고 있는 텍스트만 접했기 때문에 북미 표준 억양에 가장 가깝지만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내가 완벽한 원어민 발음을 구사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다. 하지만 얼마나 매끄러운 미국식 억양을 구사하는가가 일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것은 다국적, 다문화를 논하는 지금 이 시대에 참 부끄럽고 민망한 수준의 집착인 셈이다. 학습, 교육용 어플이나 영상에 '가장 익숙하고 잘 알려진' 억양이라 미국식 억양을 채택하는 이유 외에 실제로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영어를 대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미국식 발음의 집착을 버려야할 '상식적이고', '실제적인' 이유를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3. 정작 미국인은 없다고요!!!!!!

나는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비즈니스' 전쟁터에서 철저하게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이는 영어를 6년간 쓰면서 '미국식 영어'의 무효용성에 대해 뼛속 깊이 느끼게 되었다.

대기업(S전자) 홍보팀에서 전 세계 각지의 손님들을 맞아 회사를 PR하고, 응대하는 일부터 시작해 해외 마케팅으로 이직하고나서는 말레이시아에 법인을 세우고 현지 인력을 채용하고 세무, 법률에 얽힌 각종 이해관계자들과 의사소통하는 '도구'로 영어를 오롯이 쓰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이직한 국제기구는 아세안 10개국과 그야말로 '교류증진'을 위해 세워진 곳이었다. 거기서도 무역/투자 쪽 협업을 담당한 나는 8개월후 퇴사할 때쯤 온갖 동남아시아 언어의 억양에 영어만 입힌 '동남아시아 영어'에 통달해서 싱가폴 영어와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영어 억양의 뉘앙스까지 구별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6년간 밤낮으로 전 세계 각지에서 모인 이해관계자들과 영어로 컨퍼런스 콜하고, 전화하고 이메일 쓰고, 출장가서 담판을 짓는 동안 정작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미국, 영국, 호주 이런 나라 출신의 원어민들과는 엮일 일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S전자 근무 시절, 미국 IT 기자단이 방문하는 1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그런 경우 외에는 그 뒤로 내가 직접 책임을 지고 프로젝트를 완수해야 하는 '실제적'인 업무에서 만난 해외 파트너들은 대부분 '개발 도상국', 즉 중국, 동남아시아, 중앙 아시아 등의 지역에서 온 이들이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수순인 것이, 실제 사업 기회가 존재하는 곳은 물가와 인건비가 비싸고 이미 산업구조가 빡빡하게 자리잡은 선진국이 아니라 중국, 동남아시아 등과 같은 개발 도상국이다. 산업 영역과 하는 일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한국의 기술을 전파한다든지, 자본을 투자한다든지 할 수 있는 곳은 미국, 영국, 유럽같은 선진국에서 벌어질 성격의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영어 학습자들은 실제적인 '의사소통'수단으로 영어를 써야하는 진짜 글로벌한 환경에 노출되기 전까지 토익 같은 시험 점수를 위한 영어(미국식 억양에 세뇌된)만 공부하다가 유학을 가거나 취업해서 해외 마케팅 같은 일을 하게 되면 , 미국식 억양이 아닌 대부분의 다른 나라 억양을 접하고는 멘붕에 이르게 된다.


해외 여행도 손쉽게 가고, 유튜브나 다른 매체의 발달로 다양한 '영어 억양'에 노출될 기회는 더 많아졌지만 정작 미국에 가서 살더라도 다인종, 다문화로 이뤄진 미국 사회에서 (특히 다국적기업)미국식 억양만 듣고 말할 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실제로 지인들 중에 미국이나 영국회사에 취업했는데 자기 팀에 8개의 다른 국적을 가진 동료들과 일한다면서(팀원이 10명인데 말이다), 억양이 다 제각각이라 알아듣기가 힘들다고 호소하는 이들도 많았다.



4. '후진' 발음은 없어요. '틀린'발음만 있을 뿐.


대조언어학적으로 모국어인 제 1언어가 아닌 제 2 언어(외국어)의 발음을 완벽하게 '습득'할 수 있는 시기는 9세에서 최대 12세까지라고 본다. 12살이라는 임계기를 넘어서서 접하게 되는 외국어는 제 1언어인 모국어의 발음 습관의 '간섭'으로 한국인은 '한국어'발음이 우세한 영어를, 중국인은 '중국어' 억양이 들리는 영어를, 인도인은 '힌두어'억양에 단어만 영어로 바꾼 듯한 영어를 구사하게 되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마께~띵', '껌퓨떠'같은 된소리가 섞인듯한 동남아시아식 영어 발음을 듣게 되면 '후지다'라고 느끼지만 영국의 식민지 시절부터 영어를 공용어로 오래 써온 인도인들의 영어는 문법적으로 완벽하고, 고급 어휘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경우가 많다. 억양만 걷어내고 문장을 써서 본다면 아마 한국인들은 흉내도 내지 못할 수준의 실력일 것이다.


이쯤에서 '영어 실력이 뛰어나다'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번 묻고 싶다.


한국사람들에게 '영어 실력이 뛰어 나다'는 말은, '의사소통'을 완벽하게, 즉 골치 아픈 협상자리에서 협상 상대를 쥐락펴락하며 최대 이윤을 이끌어 낼 만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문장, 어휘, 문법 모든게 초등학생 수준이지만 발음은 '모태 뉴요커'인 것을 말하는 것인지?


베트남 등지에서 오랫동안 건설 회사 법인의 영업 부장 같은 직책으로 일해 온 분들의 영어를 들으면 '산업 역군'의 '한국식 생존 영어'가 너무나 생생해서 귓속으로 국어책의 단어가 쏟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때가 있다. 그런데, 오랜 현장 경험으로 다져진 그분들의 영어는 현지인들과 의사소통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뿐더러 특유의 '문제해결능력'으로 어떻게든 돌발상황을 타개하며 프로젝트를 완수해나간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 글로벌 회사들의 상황도 똑같다. 미국 회사이든 영국회사이든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경험 많은 다문화권의 중역들을 채용한다. 글로벌 프로젝트가 예전엔, 3개국만 참여하는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통신, 인프라등의 발달로 더 많은 나라의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하게 된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영어 발음이 '미국식 억양'이 아니라서 말하기가 꺼려진다는 건 정말 민망하고 창피한 일이다. 아울러, 같은 잣대로 동남아시아 영어를 평가 절하한다거나, 미국식 억양을 구사하는 외국인의 영어 실력이 더 뛰어나다고 느끼는 것도 잘 못된 것이다.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영어를 배우고 잘하고 싶다면, 주어 동사가 제대로 자리 잡은 문장 하나를 만드는게 더 중요할까, 아니면 좋아하는 미드의 배우처럼 똑같은 억양을 구사하는게 더 중요할까?


앞서 말했듯이 외국어를 '습득'(어린아이들이 놀면서 영어를 '체득')하는 시기를 지났다면 모국어의 억양이 여실히 묻어나는 영어를 구사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억양이 문제가 아니라 발음 자체가 틀린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영어 원어민 화자이든 나와 똑같이 영어를 제2외국어로 쓰는 화자이든 유독 내 영어 발음을 알아듣기 힘들어 한다면, 한국어 기반의 '모음'발음으로 완전히 틀린 발음을 하는 경우라서 그럴 수도 있다. 영어는 한국어와 완전히 다른 성질의 언어군에 속하기 때문에 자음, 모음이 한국어의 자음 모음과 완벽하게 대칭 되는 발음이 없다고 볼 수 있는데, 사실 이 사실을 인지하고 영어 발음을 제대로 배운다는게 현재 한국의 교육 시스템에서는 거의 불가능 하다. 한국인들은 자신의 알파벳발음이 사실 거의 다 틀렸다는걸 인지하지 못하고 미드섀도잉으로 발음정복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는 셈이다. 영어의 모음, 특히 성절음을 정확히 구사한다거나, 입술 모양을 연구한다거나 하는 식의 '더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는 데 노력을 쏟을 수 는 있지만, 미국식 영어 발음에 집착해서는 영어를 잘 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뀌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식 영어의 '효용성'에 대해 가까운 지인들에겐 나의 의견을 여러번 피력했지만, 결국 미국식 억양을 완벽하게 '마스터'해주는 학원에 자신의 자녀를 보낸다거나, 영어 발음 잘 하라고(굴리라고) 어릴 때 엄마가 설소대를 잘라줬는데 유독 R발음만 이상하게 구사하던 후배를 만난다거나 할 때에는 자괴감이 들때가 많다.


원칙적으로는 네가 하는 말에 동의하지만 그래도 내 자녀는 제일 좋은 것 (미국식 영어 발음)을 했으면 하는 바람, 여러개의 선택지(영어의 여러가지 영역)중에 '발음'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관성등이 작용했을 터이다. 하지만 작은 바람이 있다면,이 글을 읽은 이들이 어떤 결정을 하든지, 같은 잣대로 다른 나라 사람들의 발음을 판단하지만 않게 되더라도 무척 고무적인 계기가 될 것 같다.



-윗 글의 내용으로 만든 영상입니다.

https://youtu.be/VyAqKWXcAmc

-사진: Brett Sayles

https://www.pexels.com/photo/silhouette-of-people-beside-usa-flag-1046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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