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여행기 11일
2023.12.06.수요일
새벽 일찍 눈이 떠졌다. 일출을 보고 싶었는데 마침 잘 되었다. 비치 타올과 물병을 챙겨서 해변가로 나갔다. 늘어선 선베드 중에서 입구 쪽 가까운 곳에 비치타올과 물병을 던져두고 해변을 좀 거닐었다. 일출은 늘 해가 뜰 듯 말 듯하면서 애간장을 태운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해가 얼굴을 내민다. 오늘은 구름이 낮게 깔려서 바다 위로 뜨는 해를 보지 못하려나 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바다와 구름 사이로 해가 떠올랐다. 전세계 어디서나 아침 해는 밀당의 고수로구나. 이렇게 쿠바에서도 일출을 보았다. 소원성취했다. 쿠바를 여행하는 동안 늦게 일어나거나 일출 볼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아서 못 보았다. 그런데 이렇게 바다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보았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이제 여행의 남은 일정만 무사히 마무리하면 되겠다.
선베드의 자리 확보를 위해 아까 던져둔 비치타올과 물병은 그대로 두고 아침을 먹으러 부페 식당으로 갔다. 접시를 집어 들면서 본능적으로 사람들이 선 줄에 합류했다. 역시 사람들이 줄을 선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즉석에서 만들어주는 오믈렛 코너다. 요리사가 계란 몇 개, 무엇무엇을 넣을지를 묻는다. 대부분 계란은 2개, 햄이나 양파 등을 선택한다. 나도 계란 2개, 야채는 몽땅 다 넣어달라고 했다. 따끈한 오믈렛, 빵과 샐러드 등으로 푸짐한 아침을 먹었다. 자리를 잡고 않으니까 종업원이 커피와 티 중에 선택한 것을 따라준다. 서비스 굿!
든든하게 아침을 먹고 해변으로 나와서 산책을 하다가 미리 찜한 선베드에 와서 쉬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여기서 놀 것이다. 그야말로 느긋한 휴식이다. 주변 사람들도 구경하고 파도멍도 했다. 하지만 이내 심심해졌다. 역시 나는 가만히 있는 성격이 못 된다. 이럴 때를 위해서 책을 가져왔어야 하는데 부피와 무게 때문에 포기했다. 지금은 후회가 된다. 노트북을 빼고 책을 가져왔어야 하나? 아니야. 그러면 게임을 못하지. 옷을 줄이고 책을 가져왔어야 하나? 그럴 걸 그랬다. 옷은 빨아서 입으면 되는데...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파도가 많이 심해서 안전요원이 바다에 들어가는 것을 통제하고 있다. 하늘과 바다 색깔은 예술이다. 하지만 파도는 엄청 세다. 아름다운 것에는 늘 위험이 따른다. 그런가? 아닌가? 사람들이 하나 둘 선베드로 나와 일광욕을 즐긴다. 한적하던 해변이 좀 북적여질 때쯤 안전 요원으로 보이는 사람들 몇 명이 노란 깃발 옆으로 나란히 서더니 스트레칭을 시작한다고 외친다. 하루 두 번 요가 혹은 스트레칭이 있다더니 그걸 지금 하나보다. 희망자는 그 앞에 가서 따라하기만 하면 된다. 때마침 서양 관광객 몇 명이 따라하길래 나도 얼른 가서 합류했다. 그런데 짧게 끝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랫동안 한다. 덕분에 제대로 운동했다. 혼자 하는 동작도 있고 옆 사람과 짝을 이루어 하는 동작도 있다. 처음 보는 사람과 짝을 이루어 스트레칭을 했다. 뒤늦게 합류하는 사람들까지 있어서 규모가 제법 커졌다. 끝날 때는 다함께 손을 모으고 파이팅을 외쳤다. 뜻밖의 즐거운 운동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바다에 들어가지 못할 것 같다. 파도가 수그러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들어가지도 못할 바다보다는 차라리 수영장이 나을 듯하다. 산책하면서 슬쩍 수영장 쪽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선베드가 이미 다 찼다. 수영장 바에서 모히또를 한 잔 받아서 홀짝거리면서 빈 선베드를 찾아 다녔다. 몇 바퀴 돌다가 포기하고 바베규장으로 향했다. 역시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어제보다 줄이 더 길다. 접시를 들고 잽싸게 합류했다. 닭고기, 소고기, 돼지고기를 골고루 하나씩 받아들었다. 바베규장 옆에는 간이 부페도 있어서 야채, 빵, 면 등도 함께 먹을 수 있다. 해변 바에서 모히또를 한잔 더 받았다. 모히또를 만드는 방식이 바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해변쪽이 더 맛있게 만드는 것 같다. 역시 술은 낮술이 최고다.
수영장 쪽에 선베드를 찾아 기웃거리고 있으려니까 어떤 사람들이 철수하면서 여기 오라고 손짓을 한다. 땡큐다. 선베드에 누워서 일광욕을 하고 있는데 한국사람 두 명이 지나간다. 어떻게 알았냐고? 한국말이 귀에 쏘옥 들어와서 알았다. 여기서 한국사람은 처음 본다. 그들은 캐나다의 몬트리올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있는 학생들인데 쿠바의 여러 곳을 다닐 시간은 안되어서 이곳 바라데로에서만 짧은 휴가를 보내고 갈 거란다. 좋은 시간 보내라고 서로 덕담 인사를 나누었다.
수영장에서 잠시 수영을 즐겼다. 아니 물 속을 걸었다. 나는 수영을 못한다. 1년이나 배웠지만 결국 포기했다. 내 신체는 오직 걷기에만 특화되어 있는 것 같다. 1년동안 나를 가르치던 수영 강사 선생님이 그랬다. 물에 뜨려고 애쓰지 말고 이렇게 물 속에서 걷기만 해도 좋은 운동이라고... 수영장을 몇 바퀴 걸으니까 운동이 되어서 좋다. 다시 일광욕을 했다. 보통은 태양을 피해 그늘을 찾아다니지만 오늘은 일광욕이다. 어차피 여기저기 다녀서 까맣게 탔다. 그런데 옷을 입은 부분과 노출된 부분의 차이가 너무 극명하다. 그럴 바에는 다 태우는게 나을 것 같다.
선베드에 누워 수영장을 바라보니 문득 수영장이 매우 파랗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새파랗구나. 수영장 바닥의 타일색이 파래서 그렇게 느껴진 것 같다. 물색이 아니라 타일의 색이 파랗다. 그러면 바다는? 아까 본 바다는 물색이 푸르다. 멀어질수록 바다의 색은 짙푸른 색을 변해간다. 푸른 바다와 파란 수영장! 그러고 보니까 푸르다와 파랗다는 색 표현이 참으로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파란 바다와 푸른 수영장은 좀 어색한 것 같다.
사전을 찾아보니까 '푸르다'는 맑은 가을 하늘이나 깊은 바다, 풀의 빛깔과 같이 밝고 선명하다는 의미이고 '파랗다'는 맑은 가을 하늘이나 깊은 바다, 새싹과 같이 밝고 선명하게 푸르다는 의미란다. 차이가 느껴지는가? 사전을 보니까 오히려 헛갈린다. 이것저것 검색해보니까 '푸르다'와 '파랗다'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해설이 난무한다.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혼동한다는 반증이겠지? '푸르다'의 어원은 '풀'이고 '파랗다'는 어원이 불분명하나 '푸르다'와 연관성을 가진다, '파랗다'는 언어의 근간을 따라 가보면 '하늘'과 관련된다, '푸르다'에 비해 '파랗다'는 좀더 넓은 색 표현의 폭을 가진다, '푸르다'에 비해 '파랗다는 좀더 밝은 색을 표현하는데 사용한다 등등 여러가지 글들이 분분하다.
글쎄다. 내가 보기에 다 맞는 말이다. 언어는 생물이라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사용자와 상호작용한다. 그러니 너무 따지고 들지 말자. 지금 나와 상호작용하는 것은 푸른 바다와 파란 수영장이다. 아! 그런데 잊고 있었다. 하늘은? 오늘 하늘은 파랑이다. 수영장 색깔과 비슷한 파란 색인데 그냥 파란 색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그야말로 오늘 하늘은 파랑이다. 꼭 물없는 수영장같다. 하늘에서 수영하면 나도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앗! 따가. 이런저런 검색하면서 너무 오래 일광욕을 했더니 피부가 따갑다. 뭐 껍질이 벗겨질 정도는 아니지만 더 이상 여기 있으면 안되겠다. 그러고 보니까 어느새 주변이 한산해졌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수영장은 좀 쓸쓸하다. 내 방으로 가서 씻고 나오니까 해가 지려고 한다. 해가 건물 너머로 지기 때문에 일몰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주차장 쪽으로 나가 보았으나 마찬가지다. 일몰 감상은 포기해야겠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빈 선베드를 차지하고 있는 개를 보았다. 너도 일광욕을 즐기고 싶었니?
밥 먹으러 가는 길에 어제 만났던 독일 노부부를 보았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이미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가는 길이란다. 그들이 로비 옆의 바에서 마신 다이끼리가 맛있었다고 해서 얼른 가서 한 잔 받아왔다. 그런데 다이끼리는 원래 하얀색이 아닌가? 여기서는 아주 붉은 색의 다이끼리를 주었다. 어쨌든 색깔도 예쁘고 맛도 있다.
밥을 먹고 로비 쪽으로 다시 나갔다. 예상대로 저녁이 되자 조명이 켜지고 또다시 라이브 공연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나와서 춤도 춘다. 오, 댄스 타임! 부부끼리 춤을 주기도 하고 아버지와 딸이 나와서 춤을 추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아주머니가 갑자기 나와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른다. 술에 취한 것 같지는 않고 그냥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 노래 솜씨는 별로지만 흥은 최고다. 다들 유쾌하게 음악과 춤을 즐겼다. 나는? 나는 수영도 잘 못하지만 춤도 잘 못춘다. 내 몸뚱아리는 걷는 용도로만 특화되어 있다니까. 그래도 흥겹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음악과 춤을 즐겼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까딱까딱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