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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Oct 13. 2024

놀고 먹는 바라데로

쿠바 여행기 10일

2023.12.05.화요일

산타 클라라를 떠나는 날이다. 친절한 숙소 주인과 작별인사를 하고 나왔다. 버스터미널까지 40분 정도 걸어서 왔다. 걷기는 언제나 자신이 있다. 다만 트렁크를 끌고 걸어야 해서 불편했다. 길이 그다지 고른 편이 아니라 더욱 힘들었다. 내 트렁크의 바퀴가 튼튼해서 다행이다.

버스터미널에 와보니까 사람들이 제법 많다. 오늘의 목적지는 바라데로인데 8시 35분에 버스를 타서 12시 45분에 도착한다. 대략 4시간정도 걸린다. 버스에 올라타니까 이미 승객들로 꽉 차 있다. 그런데 승객들의 상태가 별로 좋아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이 버스가 쿠바의 남동쪽 끝에서 어제 출발해서 밤새 달려온 나이트 버스이기 때문이다. 이곳 산타 클라라는 교통의 요충지라서 쿠바의 사방으로 이동하기 위한 밤버스가 지나다니는 기점이다. 내가 처음 쿠바 여행 계획을 세울 때 욕심을 부려 나이트 버스를 타고 쿠바의 남동쪽 끝인 관타나모나 산티아고 데 쿠바까지 가려고 했다. 그런데 검색해보니까 쿠바의 나이트 버스는 침대처럼 생긴 버스를 운영하는게 아니라 이런 일반버스로 밤새 달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포기했다. 옛날 같으면 도전했겠지만 이제는 이런 버스에서 밤새 달리면 다음날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았다. 지금 여기 승객들의 상태를 보니 정말 그럴 것 같다.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인다.



버스를 타고 한참 달리니 색깔이 예쁜 주택단지도 지나고 교회와 묘지도 지났다. 너른 들판도 지나고 한적한 시골 마을도 지났다. 너른 들판에는 소나 염소, 말 등이 방목되고 있었다. 이 나라는 높은 산이 거의 없고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진다. 얕은 언덕이 펼쳐진 구릉지도 있으나 그리 높지는 않다. 옥수수밭이나 사탕수수밭으로 보이는 곳도 있는데 내가 농작물을 잘 몰라서 확실치는 않다. 그냥 수수밭일수도 있다. 밭들이 엄청나게 넓게 펼쳐져 있다.

주워 들은 바로는 제국주의 시절에 침략자들은 쿠바를 비롯한 중남미 일대에 사탕수수 농장이나 옥수수 농장을 대규모로 만들어 아프리카 노예들을 데려다가 일을 시켰다고 한다. 이들은 쿠바에서 다른 농작물을 싹다 밀어버리고 오직 사탕수수만을 심었다. 그로 인해 쿠바는 세계에서 가장 사탕수수를 많이 재배하는 나라가 되었는데 쿠바의 럼주가 유명한 이유는 럼주가 사탕을 주 원료로 하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의 작물만 재배하는 것은 국가 산업의 불균형을 초래했고 지금도 쿠바는 이를 해결하려고 산업 다변화를 위해 애쓰고 있단다. 

그런데 침략자들이 미친 영향은 그것뿐이 아니다. 쿠바의 인종 분포도도 달라졌단다. 유럽인들이 몰고 온 전염병 때문에 이곳에 살던 많은 원주민들이 병에 걸려 죽었다.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침략자들은 아프리카 사람들을 잡아다가 강제로 이주시킨다. 인간이 인간을 인간 이하로 취급한 결과다. 이로 인해 쿠바를 비롯한 중남미에는 아프리카계 사람들이 인구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단다. 제국주의의 침략이 주권 침탈과 자원 수탈을 넘어서서 한 나라의 인종, 산업, 삶, 문화를 송두리째 바꾸어 버린 것이다. 아니 바꾸었다기 보다는 빼앗아 버린 것이라고 봐야겠지?

눈 앞에 펼쳐진 너른 들판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그 경치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역사의 잔인함에 씁쓸함을 느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바라데로에 가까워지고 있다. 길이 제법 잘 닦여져 있는 걸보니 쿠바 제1의 관광지에 가까워지는게 맞는 거 같다. 그런데 잘 뚫린 길을 따라 버스가 달리는데 그 옆을 당당하게 지나가는 마차를 보았다. 그리고 형형색색의 올드카도 달린다. 때로는 오토바이와 자전거도 달린다. 정말 다양한 교통 수단들이 다니는구나. 그런 점에서는 인도랑 닮았다. 인도에도 버스, 오토바이 릭샤, 자전거 릭샤, 마차 등이 거리에서 함께 다녔다. 나중에 세계의 탈 것들을 따로 정리해봐도 재밌을 것 같다. 하늘이 아주 푸르고 날씨가 좋다. 오늘 가려는 곳이 휴양지라서 날씨가 좋으면 더 좋을 것 같다.



드디어 바라데로에 도착했다. 버스 터미널에서 내가 예약한 숙소까지는 10킬로나 떨어져있다. 이것은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택시를 20달러에 흥정해서 타고 갔다. 비싸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특히 내가 선택한 호텔이 바라데로의 가장 끝에 위치하고 있어서 더 깎을 수가 없다.

바라데로는 쿠바의 북쪽에 있는 길게 삐져나온 만인데 이곳에는 해변을 중심으로 올인클루시브 호텔이 20여 개 늘어서 있다. 캐나다 항공을 타고 쿠바로 들어오면 이곳 바라데로로 오게 된다. 여기가 쿠바의 대표적인 휴양지이기 때문이다. 올인클루시브란 숙박비를 내면 그곳에서 삼시세끼는 물론 술, 음료 등을 무한제공받을 수 있고 수영장, 각종 엑티비티 등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형태의 서비스를 말한다. 나는 이런 형태의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번쯤은 해보고 싶었다. 그동안 빡세게 여기저기 다녔으므로 지금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말고 놀고 먹자. 



아직 채크인 시간이 안되어서 내 방에 들어갈 수는 없다. 하지만 리셉션에서는 예약을 확인하고는 바로 내 팔목에 이곳 숙박객임을 알려주는 팔찌를 채워준다. 즉, 이제부터 마음껏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야호. 신난다. 짐을 로비에 맡기고 바로 바닷가로 나갔다. 전체적으로 한바퀴 훑어보고는 바닷가 근처의 바에서 피나콜라다부터 한 잔 받아들었다. 때마침 그 근처의 바베큐 코너에서 지글지글 고기를 굽기 시작하길래 남들 따라서 잽싸게 줄을 섰다. 완벽한 타이밍이다. 신나게 바베큐와 칵테일을 즐기고는 다시 호텔 탐방을 했다. 바닷가에는 선베드가 쭈욱 늘어서 있고 숙소 쪽에는 커다란 수영장도 있다. 여기저기 다니다가 아침, 점심, 저녁 3번 부페를 먹을 수 있는 메인 식당에 도착했다. 마침 점심 부페가 오픈되었길래 어떤 메뉴들인지 한번 쓰윽 보았다. 처음에는 그냥 보기만 하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접시에 손이 가고 음식을 담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내가 자리에 앉자 직원이 와서 어떤 음료를 하겠냐고 묻는다. 레드와인과 함께 2차 식사를 즐겼다. 우와. 내가 이렇게 많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인 것을 처음 알았다. 미쳤구나.



배가 너무 불러서 한번 더 산책을 하고는 로비 근처의 바에 앉아서 쉬고 있는데 옆 자리의 독일 노부부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들은 나에게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왔다니까 굉장히 반가워한다. 왜냐하면 이 독일 할아버지가 한국에 가본 경험이 있단다. 판문점에도 갔었고 금강산에도 가보았단다. 독일의 외교부 직원 그런 것이었다는 것 같다. 할아버지는 한국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서 한국 이야기를 여러번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할머니는 자연스럽게 자녀들 이야기를 했다. 자신의 자녀들은 20,30대인데 아직 결혼하지 않고 있는데 요즘 애들의 생각을 도통 모르겠단다. 나는 한국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세대 차이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나의 영어실력을 감안해서 쉽고 천천히 이야기해주었고 나도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지고 이야기를 했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한 보람이 있군.

즐거운 스몰 토크를 나누고 나서 드디어 방을 배정받아서 짐을 풀었다. 그런데 뭔가 일이 쉽게 풀리면 잘 안되는 일도 생기는 법인가보다. 방은 카드를 대면 자동으로 열리고 잠기는 문인데 바닷가 근처라서 그런지 녹슬어서 좀 불안해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막상 짐을 정리하고 나서 나가려니까 문이 잠기질 않는다. 한참 낑낑대다가 결국 로비에 전화해서 상황을 설명했더니 사람을 보내주겠단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사람이 오지 않는다. 다시 전화해서 항의하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사람이 왔다. 그러더니 잠금장치가 고장났다면서 교체해주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지 교체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이런 불편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숙소 자체는 만족스러웠다. 엄청나게 넓은 공간이 마음에 든다. 책상도 있어서 노트북을 펼치기도 좋고 소파도 따로 있어서 짐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화장실도 큼직하고 베란다도 따로 있어서 밖으로 나갈 수 있어서 좋다. 베란다가 있어서 빨래를 널기 너무 좋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까 벌써 저녁이다. 저녁 식사는 이탈리안식 레스토랑에서 먹고 싶었는데 미리 예약해야 한단다. 별수 없이 아까의 그 부페 식당으로 갔다. 점심 메뉴와는 구성이 약간 달라졌다. 배가 아직 꺼지지 않아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또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늦은 밤까지 사람들은 수영장에서 수영도 하고 바에서 놀고 있다. 해가 지니까 물에 들어가기는 좀 서늘한 것 같은데 다들 물놀이를 엄청 좋아하나보다. 

아까 채크인 했던 로비 쪽이 소란스러워져서 와보니까 때마침 라이브 공연이 펼쳐진다. 오예! 로비 근처의 바에서 피냐콜라다를 받아 와서 공연 구경을 했다. 아는 노래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음악은 흥겨웠다. 늦은 시간까지 라이브 공연도 감상하고 술도 마시고 놀았다. 그래도 안전하고 또 숙소가 바로 코앞이라 너무 좋다. 라이브 공연이 끝날 때까지 놀다가 숙소로 들어와 바로 뻗었다. 윽. 피냐콜라다를 너무 많이 마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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