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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Oct 12. 2024

쿠바노처럼 거닐기

쿠바 여행기 9일

2023.12.04.월요일

아침에 일어나 중심지 근처의 맛집을 찾아갔는데 아직 안 열었다. 시간이 많이 남아서 슬슬 걸어서 근처의 볼거리를 찾아 나섰다. 길거리에 예쁜 벽화들도 보고, 무슨 광장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냥 방치된 폐허도 보았다. 도시 한복판에 폐허라니 좀 어색하다. 그리고 엄청나게 큰 차들도 보았다. 무슨 트럭 같은 것을 개조한 것으로 보이는데 많은 사람들이 쭈욱 줄을 서서 타고 있다. 추측하건대 큰 공장이나 회사의 통근버스인 것 같다. 이런 종류의 차가 여러대 서 있다가 거의 동시에 출발한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는 진풍경이다.



예쁜 성당도 보았다. 어제 보았던 그 성당은 아니다. 도시가 커서 그런지 성당이 여러 곳에 있다. 여기도 문이 닫혀 있어서 안에 들어가보지는 못했다. 생각해보니까 여러 나라들을 다니면서 다양한 분위기의 성당을 보았다. 언젠가 한 번 성당 사진들만 모아서 한꺼번에 살펴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성당 근처에는 학생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근처에 학교가 있나 보다. 

성당을 뒤로 하고 동쪽으로 큰 길을 따라 가다보니까 기념비가 나온다. 여기는 체 게바라와 혁명군이 처음으로 정부군을 이긴 전투 장소란다. 열차로 오는 수백명의 정부군을 단 18명의 혁명군이 물리쳤단다. 여기서의 승리를 기점으로 쿠바 혁명의 성공 발판을 다졌다고 한다. 체 게바라의 묘가 이곳 산타 클라라에 위치하게 된 것은 첫 승리의 장소이자 혁명 성공의 전환점이 된 곳이기 때문이란다. 



기념비에서 조금만 더 가면 체 게바라의 동상이 있다. 여기는 산타 클라라 시청 건물의 앞이다. 체가 아이를 안고 어디론가 걸어가는 모습인데 곳곳에 그의 혁명 동지들이나 상징들이 숨겨져 있다고 한다. 그의 오른손에는 평소 즐기던 시가가 들려있고, 벨트에는 볼리비아에서 총살될 때 함께 했던 볼리비아 혁명군이 새겨져있다. 베레모의 별은 군 사령관의 지위를 상징한단다. 그밖에 말을 탄 남자, 염소를 탄 소년 등이 곳곳에 새겨져 있는데 그의 삶과 관련된 것들이란다. 이런 정보들은 대부분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알아낸 것이다. 동상 근처에 이런 상징들을 설명해주는 안내문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인상적인 장면 하나. 내가 이 동상의 앞과 뒤를 열심히 찍고 있는데 10살쯤 되어 보이는 한 소녀가 엄마 손을 잡고 와서 꽃 한 송이를 동상의 발치에 놓는다. 그리고 잠시 기도하고 간다. 아직도 체 게바라가 쿠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쿠바에 와서 거리를 걷다보면 체 게바라의 사진이나 그림을 엄청나게 자주 보게 된다. 관광객들에게 파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많다. 액자, 냉장고 자석, 티셔츠, 컵 등에 체 게바라의 사진이나 그림이 넘쳐난다. 지나친 상업화에 다소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런데 그런 상품 말고 길가의 평범한 집들에서도 체의 그림이나 사진이 걸려져 있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그것은 팔기 위해 그린 그림이나 사진이 아니다. 그냥 쿠바노들이 자신의 집을 그의 사진이나 그림으로 장식함으로써 우리는 체를 기억하고 사랑하고 있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체의 동상에 바쳐진 작은 꽃을 보면서 이러한 쿠바노들의 마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다시 아까의 그 맛집에 가기 위해 시내로 돌아왔다. 오는 길을 달리 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선 풍경이 펼쳐진다. 하나의 줄은 물품을 배급하는 줄이고 다른 하나는 빵을 배급하는 줄이다. 사람들이 뒤엉켜 있고 그 사이로 차들이 지나가고 좀 정신이 없다. 평소 다닐 때는 못 느끼지만 이런 장면을 보면 여기가 사회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공산주의 국가임을 실감하게 된다. 



그런데 애써 찾아간 맛집이 아직 열지 않았다. 알고 보니까 내가 시간을 잘못 읽고 간 것이다. 나의 덤벙댐은 해외에 와서도 여전하구나. 문을 열려면 좀더 기다려야 하는데 나는 발길을 돌렸다. 아까 오면서 우연히 길가에서 파는 음식을 보았는데 그게 맛있어 보였다. 쿠바노들이 모여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구글맵의 평가가 높은 집도 좋겠지만 이렇게 길가에서 우연히 만나는 현지 음식도 좋지. 다시 가보니까 주변에 10여 명이 서 있는데 줄이 명확하지 않다. 드디어 그 말을 써 먹을 때다. '울띠모(마지막 사람)'하고 외치니까 어떤 아저씨가 손을 든다. 그렇다면면 저 아저씨 다음이 내 순서다. 쿠바에서는 사람들이 줄을 명확하게 서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마지막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의 다음이 내 순서임을 확인해야 한다. 

한참 기다리면서 만드는 방법을 지켜보았다. 훈연된 것을 보이는 돼지고기의 살코기를 뜯어서 빵 사이에 넣는다. 그리고 양상추, 토마토, 오이를 넣고 소금, 후추, 토마토 소스를 뿌려서 준다. 굉장히 단순한 조합인데 맛은 기대 이상으로 좋다. 기름기가 쏙 빠졌으나 부드러운 돼지고기와 야채의 조화가 제법 어울린다. 단돈 200쿠바페소로 즐기는 맛있는 간식이다.  



서서히 더워지길래 숙소로 돌아와 씻고 잠시 쉬었다. 오늘 오후 일정과 내일 일정을 점검하다가 갑자기 깨달았다. 윽. 큰일날 뻔했다. 내일 버스가 10시 출발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10시가 아니라 8시 출발이다. 어휴. 확인 안했으면 내일 버스를 놓칠 뻔했다. 나는 숫자에 유독 약하다. 숫자는 나에게는 그냥 그림처럼 느껴진다. 숫자를 틀려서 당황한 적이 많아서 강박증까지 가지고 있다. 무서운 꿈을 꾸면 더 그렇다. 예를 들면 불이 나서 빨리 119에 전화해야 하는데 나는 자꾸 다른 번호를 누르는 꿈을 꾸기도 한다. 

숙소의 복도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서 일기도 쓰고 이것저것 검색하고 있으려니까 숙소 주인의 손녀가 작은 자전거를 타고 왔다갔다 한다. 6살 정도 되어 보이는 귀여운 아이다. 영어로 인사하니까 자기네 나라 말로 인사한다. 마침 연필 몇 자루를 가지고 있는게 있어서 선물로 주었다. 캐나다에서 열심히 공부하려고 왕창 구입한 연필들인데 쿠바 여행하면서 아이들을 보면 주려고 가지고 왔다. 연필을 주니까 아이는 자기 할머니에게 뛰어간다. 숙소 주인이 고맙다고 인사하라고 시키는데 아이는 부끄러워하면서 할머니의 치마 속으로 숨는다. 아이, 귀여워.

뜨거운 햇살을 피해 쉬다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눈여겨둔 일몰 장소로 간다. 로마 델 카피로라는 언덕이다. 유명 관광지는 아니지만 산타 클라라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란다. 숙소에서 20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가는 길에 시내 외곽의 좁은 골목들을 탐험할 수 있어서 재밌었다. 구불구불한 좁은 언덕길을 따라 올라갔다. 그야말로 현지 사람들의 삶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골목길이다. 어떤 집에서는 아주 커다란 텔레비젼이 보인다. 거실 크기에 비해 텔레비젼이 너무 큰거 아닌가 싶다. 눈 버리면 어쩌려고... 골목길을 따라 얕은 언덕의 위로 올라가니까 갑자기 말이 나타난다. 뜬금없이 어인 말? 여기는 현지인들이 말을 데려와 방목하는  곳인가보다. 말들이 여기저기서 풀을 뜯고 있고 주변에 말을 돌보는 아이들이 보인다. 근데 말이 왜 필요하지? 산타 클라라는 참 재밌는 도시로구나.



언덕의 위쪽을 향해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까 정상에는 전투 기념비가 있다. 혁명군의 승리를 기념하는 기념비다. 근처에는 혁명군들이 주변을 지켜보려고 만든 구조물도 있다. 이곳은 산타 클라라에서 일몰을 보기 좋은 장소로 알려져 있다. 한쪽에는 동네 청년들 한 무리가 일몰을 보려고 모여서 노닥거리고 있고 가족 단위로 놀러온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서양 관광객들도 몇 명이 보인다. 산타 클라라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시원한 전망과 아름다운 노을이 멋진 장소다. 햇볕을 피할 곳이 별로 없으므로 한낮보다는 일몰 시간에 오는게 좋을 것 같다. 

일몰 사진을 실컷 찍었다. 붉게 내려 앉는 해와 구름이 아름답다. 오늘도 태양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저 멀리 지평선 너머 어디론가 사라진다. 서서히 어두워지는 시내의 모습이 아련해진다. 일몰도 감상하고 일몰을 감상하는 사람들도 감상했다. 어떤 서양 커플은 일몰을 배경으로 점프샷을 찍느라고 난리다. 지나가면서 엄지척을 해주었다. 



언덕을 내려와서 아까 예약해둔 햄버거 집으로 갔다. 오전부터 시도했던 그 맛집은 중간에 브레이크 타임까지 걸려서 아예 포기했다. 나와 인연이 아닌 듯하다. 대신 내 숙소와 언덕 사이에 있는 햄버거 집에 들러서 저녁을 예약했다. 이 햄버거 집을 찾을 때의 작은 에피소드. 구글맵을 따라 가니까 엉뚱하게도 햄버거 집의 뒤편에 있는 에어비엔비로 안내가 된다. 아무리 봐도 식당이 아닌데 싶지만 일단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아저씨가 와서 거기는 자신의 에어비엔비인데 혹시 숙박하려고 하냐고 묻는다. 내가 햄버거 가게 이미지를 보여주니까 자신의 집 뒤쪽이라면서 따라오란다. 그리고 친절하게 그 집 바로 앞까지 안내해준다. 내가 고맙다고 하니까 그 햄버거 가게 주인이 자신의 친구란다. 그리고 여기 음식이 참 맛있단다. 참 친절한 사람이고 좋은 친구다. 

저녁으로 먹을 햄버거를 미리 예약하고 일몰을 보러 갔다. 보니까 이 집도 에어비엔비를 겸하고 있는 듯하다. 한 무리의 서양 관광객들이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예약한 시간에 식당에 도착하여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까 햄버거가 나온다. 와우! 햄버거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너무너무 두꺼운 패티 때문에 한 입에 먹기는 불편했지만 아주 맛있었다. 빵은 좀 퍼석했지만 그래도 패티와 속재료가 매우 훌륭해서 만족스러웠다. 별다른 소스도 없는 것 같은데 다진 고기로 만든 패티의 육즙이 열일을 하고 있다. 너무나 행복하게 식사를 마쳤다.



원래 계획은 저녁 먹고 바에 가서 한잔 하려고 했는데 햄버거가 생각보다 양이 많아서 배가 터질 것 같다. 결국 바는 포기했다. 아무래도 좀 걸어다니면서 소화를 시켜야겠다. 밤이 늦었지만 시내는 돌아다니기에 안전하다. 어제 갔던 중심지 공원에 가서 몇 바퀴 돌았다. 해가 지니까 산책하기 딱 알맞은 기온이다. 저녁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 귀가하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노부부가 다정하게 산책을 하기도 하고 연인으로 보이는 청춘남녀가 한쪽에서 꽁냥꽁냥거리고 있다. 

공원을 이리저리 걷고 있으려니까 문득 한국 나의 집 근처에 있는 공원을 산책하는 것 같다. 물론 사방의 건물들이 다른 모습이고 들려오는 언어도 다른 나라 말이다. 하지만 가족 단위로, 연인들이나 친구들끼리 이리저리 산책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니까 나도 여기 사는 쿠바노 같다. 느긋하게 쿠바노처럼 저녁 산책을 즐기다가 사람들이 조금 한산해져서 숙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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