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여행기 13일
2023.12.08.금요일
새벽 6시에 일어나 버스 터미널로 갔다. 숙소에서 터미널까지는 걸어서 5분이다. 이른 시간이지만 터미널 앞은 오가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몇 번 왔다갔다 해서 그런지 이 터미널은 이제 익숙하다. 비냘레스로 가는 버스는 7시 20분에 출발했다.
비냘레스(Vinales)는 아바나의 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인데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곳이다. 쿠바의 유명 관광지들은 대체로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서쪽에 있는 비냘레스를 여행 일정에 포함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다른 도시에서 비냘레스로 곧바로 가는 버스는 없다. 오직 아바나를 통해서만 갈 수 있다. 게다가 비냘레스행 버스는 아바나에서 아침 7시 20분 딱 한 대뿐이다. 이런 어려운 조건 때문에 많은 여행객들이 비냘레스를 포기한다. 하지만 나는 구글맵에서 비냘레스의 사진을 보고는 반해서 꼭 가보리라 마음 먹었다. 과연 내가 기대하고 있는 그런 경치일까? 궁금하다. 이 버스는 중간에 휴게소에도 들른다. 그동안 쿠바를 여행하면서 간이 휴게소는 보았지만 이렇게 큰 휴게소는 처음 본다. 간단한 식사도 가능하고 화장실 이용도 가능하다. 화장실은 유료인데 시외 버스터미널의 화장실 이용료가 5쿠바페소라면 이런 곳은 50쿠바페소다.
11시에 비냘레스에 도착했다. 여기는 작은 마을이라서 버스 터미널이 따로 없다. 버스는 성당 앞의 도로에 정차한다. 중심 도로가 하나뿐이고 그 도로의 주변으로 대부분의 식당과 숙소가 위치하고 있다. 정말정말 작은 마을이다. 내 숙소는 도로에서 한블럭 뒤로 들어가면 있는 곳이다. 구글맵과 호텔스닷컴에서 평가가 좋은 곳이라 이 숙소를 선택했다. 주인도 친절하고 옥상에서 보는 뷰도 좋단다. 채크인을 하고 옥상에 올라가보니까 정말 아름다운 산과 들판이 보이는 뷰다. 주변의 다른 숙소들에도 이렇게 옥상에 선베드, 식탁 공간이 설치되어 있다. 이 숙소는 옥상 외에도 집안 곳곳에 예쁜 휴식 공간이 있는데 특히 텃밭으로 이어지는 휴식 공간이 제일 좋았다. 거기에는 해먹도 있고 앵무새도 있다. 여기 식사의 채소들은 저 텃밭에서 나온다고 한다.
이 숙소에서는 여러 체험 코스를 추천해주고 연결도 해준다. 나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사진에서 본 아름다운 경치를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이 근처를 돌아보는 방법으로 말타기, 마차타기, 택시, 투어버스 등이 있다. 나는 반나절 말타기(4시간 20달러)를 선택했다. 마차와 택시는 사람을 모아서 타야 하고 투어버스는 오늘 이용하기에는 늦었다.
결론적으로 말타기를 선택한 것은 아주 잘 한 것이었다. 택시나 투어버스는 근처의 널리 알려진 관광코스를 중심으로 돌아다닌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저 아름다운 들판을 거닐어 보는 것이었다. 실제로 말을 타고 가니까 이 시골마을의 들판 한가운데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만약 택시나 버스를 탔다면 이렇게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차도 마찬가지로 들어갈 수가 없는 길이다. 길이 대부분 비포장이고 매우 좁고 거칠다. 말을 타고 가야만 곳곳을 돌아다닐 수 있다.
말이 생각보다 높아서 처음에는 무서웠다. 가이드가 오르고 내릴 때 도와주어서 간신히 탈 수 있었다. 말타기는 힘들었지만 경치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여기는 사방으로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분지같은 곳이다. 곳곳에 담배농장, 커피농장들이 있고 얕은 개울들이 흐르고 있다. 둘러싼 산들이 비냘레스 계곡을 보호하고 있는 듯하다.
중간에 휴식겸 커피 농장에 들렀다. 아라비카 커피란다. 커알못(커피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아라비카는 어디선가 들어봤다. 커피 농장주의 자부심이 아주 가득하다. 하지만 나는 커피보다 주변을 돌아다니는 돼지들과 닭들에게 더 흥미가 갔다. 자유분방하게 다니는 돼지 삼형제가 너무 귀엽다. 그 중 일부는 내가 음료를 마시며 쉬고 있는 공간까지 들어와서 돌아다녔다. 돼지와 닭들이 자꾸 내가 있는 공간으로 들어오니까 나중에는 주인이 와서 그들을 구출(?)해 갔다.
잠시 쉬고 나서 다시 말을 타고 들판을 돌아다녔다. 어딜 가도 사진을 찍고 싶은 경치다. 너무나 아름답다. 가이들의 말에 따르면 이곳의 땅 색깔이 유독 붉은 이유는 철분과 미네랄 성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서 그렇단다. 덕분에 여기의 커피와 시가 품질이 최고로 좋단다. 붉은 흙, 푸른 들판, 낮게 누운 산들, 그리고 파랗게 펼쳐진 하늘. 아름다운 경치에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문득 저 붉은 길에서 우리나라의 남도 풍경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굉장히 오래된 영화이긴 하지만 '서편제'에서 본 한 장면이 떠오른다. 낮은 담으로 길게 이어진 붉은 황토길을 세 명의 주인공들은 아리랑을 신명나게 부르면서 걸어갔다. 그런데 그 신명나게 부르는 노래가 구슬프게 느껴진 것은 얕은 담으로 이어진 구불구불한 길, 그 붉은 황토길 때문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뭐 뚜렷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저 아름다운 길을 따라 떠돌아 다녀야 하는 사람들의 운명이 슬프게 느껴졌기 때문이랄까?
또다시 휴식시간. 이번에는 담배 농장이다. 커피농장과 담배농장에 들르는 것은 이런 투어의 필수 코스란다. 여러 사람들이 그룹지어 신청했다면 가이드에게 떨어지는 것이 많겠지만 나는 혼자라서 이익이 별로 없을 것 같다. 가이드의 체면을 보아 선물용으로 조금씩 구매해 주었다.
이 농장주도 시가 품질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즉석에서 시가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곳의 담배잎이 세계에서 제일 좋은 품질이란다. 말린 담배잎을 커다란 담배잎으로 감싸서 끝부분에 꿀을 발라 붙이면 시가가 만들어진다. 다른 물질은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는다. 커피와 마찬가지로 담알못(담배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쿠바 시가가 유명하다고는 들어봤다.
끝으로 담배농장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동굴에 올라가 보았다. 자연 동굴이라는데 옛날에 여기서 홍수가 난 적이 있는데 이곳으로 피신했던 사람들은 살 수 있었단다. 꽤 오랜 기간 여기서 사람이 살았던 듯하다. 바닥을 잘 다져두었다. 한쪽으로는 지금 박쥐가 살고 있단다. 박쥐 구경은 사양했다. 배트맨이 되고 싶지는 않다. 동굴의 깊은 안쪽으로 들어가니까 반대편 전망대가 나온다. 거기서 바라보는 경치가 또한 절경이다. 해가 지는 방향이 조금 어긋나서 일몰을 보지 못해서 아쉽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충분히 만족한다. 여기서 더 원하면 욕심쟁이다.
말타기를 끝내고 마을로 돌아왔다. 아이고 내 다리, 내 엉덩이, 내 허벅지! 돌아다닐 때는 너무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서 정신없이 다녔다. 하지만 숙소로 돌아오면서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왔다. 다른 곳에서도 말을 타 보았지만 이렇게까지 길게 타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탄 말의 안장은 여기 안장보다는 푹신했던 거 같다. 방에 와서 확인해보니까 허벅지 양쪽에 어마무시한 멍이 들어 있고 엉덩이는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엉망진창이다. 엉덩이가 까져서 샤워할 때 너무나 쓰라리다. 연고를 가지고 와서 다행이지만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제대로 앉지 도 똑바로 서지도 못하겠다. 아이고, 아이고 소리가 나도 모르게 나온다.
씻고 나서 잠시 쉬었다가 저녁 시간에 맞추어 옥상으로 올라갔다. 아까 채크인하면서 저녁식사(랑고스타 정식, 15달러)를 부탁해두었다. 오늘 이 숙소에는 나 혼자만 투숙해 있단다. 내심 저녁에 다른 투숙객들과 대화를 나눌 것을 기대했는데 어쩔 수 없지. 그런데 차려진 저녁을 보니까 너무나 근사하다. 맛도 너무 좋다. 랑고스타는 신선하고 소스도 너무 맛있다. 곁들여 나온 스프와 과일도 훌륭하다. 물론 배가 고파서 더 맛있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아! 행복해. 아이고, 엉덩이야. 아! 맛있다. 아이고 허벅지야. 사람이 행복과 고통을 동시에 느낄 수도 있는거구나. 그렇게 엉거주춤하게 앉았다 일어났다 하면서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