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여행기 15일
2023.12.10.일요일
이제 비냘레스를 떠나는 날이다. 나의 엉덩이와 허벅지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버스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서 옥상에 올라가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1층으로 내려와서 텃밭과 해먹이 있는 예쁜 공간의 사진도 찍었다. 해먹에 잠시 누워도 보고 앵무새와 노닥거리기도 했다. 주인이 와서 앵무새를 새장에서 꺼내어 먹을 것을 주면서 재주 부리기를 시킨다. 앵무새가 매일 먹이를 주는 자신을 알아보고 귀여움을 받으려고 이러는 거란다. 새장 밖으로 나왔는데도 날아가지 않고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다. 이 텃밭은 자신들이 가꾸는 것인데 숙소에서 제공하는 음식들의 채소나 과일은 여기서 나오는 것이 많단다. 내가 보기에 텃밭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좀 큰 듯하다. 아침부터 물을 주는 아저씨가 호스를 끌고 다니며 부지런히 물을 주고 있다. 주인은 텃밭 쪽으로 가더니 나무가지에 통째로 매달아 놓은 바나나 더미(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바나나가 수십개 달려있는 큰 덩어리)에서 바나나를 하나 뚝 따더니 나에게 먹으라고 준다. 그러더니 버스가 몇시냐고 묻는다. 11시50분이라고 하니까 그러면 잠시만 기다리면 자기가 간단한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겠다고 한다. 헉. 조식을 신청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준단다. 너무 고마운 말이다. 잠시 후에 방금 구운 따끈한 파니니 빵 사이에 치즈가 들어간 샌드위치와 커피를 준다. 아마도 내가 아침 식사를 하지 않고 갈 것 같아서 준 것 같다. 정말 좋은 사람이다.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데 주변에 커다란 새들이 날아다닌다. 독수리란다. 먹이들을 찾아서 주변을 도는 거란다. 숙소 가까이에 왔길래 열심히 찍었더니 멋진 사진을 몇 장 건졌다. 우와, 큰 새가 텃밭 근처까지 내려왔다가 가버린다. 문득 앵무새가 위협을 느끼지 않을까 싶어서 관찰해보니까 그냥 자기 깃털 정리하기 바쁘다. 하긴 새장안에 있으니까 안전할 것이다.
채크아웃을 하고 나와서 중심도로의 광장에 왔다. 어제 확인해 둔 비아술 사무소에 가서 버스채크인을 했다. 짐을 받아줄 줄 알았는데 그냥 가지고 있다가 버스에 탈 때 직접 부치란다. 나는 짐을 부치고 자유롭게 근처를 둘러보려 했는데 작전 실패다. 그냥 광장에 앉아서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는데 성당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나온다. 아! 오늘 일요일이지. 미사가 있는 날이다. 사람들이 나오고 나서 살짝 성당 안을 보았다. 짐이 있어서 그냥 밖에서만 보았다. 트렁크를 드르륵 끌면서 들어가는 것은 예의가 아닐 것 같았다. 성당 규모는 작아서 밖에서도 한눈에 다 보인다. 아기자기한 성당이다. 항상 오가면서 성당 문이 닫혀서 아쉬웠는데 떠나기 직전에 이렇게 내부를 보여주는구나. 나이스 타이밍이다. 역시 비냘레스는 나와 뭔가 맞는 것 같다.
버스가 오기를 한참 기다렸다. 버스 채크인을 한 시간 전에 하라는 이유를 모르겠다. 하물며 여기는 터미널도 없는데 말이다. 광장에 트렁크나 배낭 등을 가진 여행객들이 가득 차고 나서야 마침내 버스가 왔다. 짐칸이 열리고 사람이 와서 짐을 실으면서 확인증을 준다. 그런데 돈을 내란다. 내참, 어이가 없다. 전에도 돈내라는 놈이 있었는데 그래도 그때는 미리 짐을 받고 지들이 수레에 끌고 와서 버스 짐칸에 실어주었다. 그러니까 팁이려니 하고 잔돈을 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버스 짐칸까지 승객들이 짐을 가져와서 지들은 싣기만 하는데도 돈을 내란다. 어이가 없다. 50페소 내라는데 그냥 나는 가진 것이 5페소 뿐이라서 그것만 주고 왔다. 보니까 잔돈이 있는 사람들은 50페소나 20, 10페소 등을 낸다. 잔돈이 없는 사람들은 100페소를 내기도 했다.
11시 50분에 출발한 버스는 3시 10분이 되어 아바나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휴게소에 서지 않았다. 버스 기사와 보조가 내키는대로 정차 여부를 결정하는 것 같다. 쿠바의 시외버스에는 기사와 기사보조가 타는데 내 추측에는 이들이 부업을 하는 것 같다. 버스가 길가에 서 있는 현지인을 태우고 가다가 슬쩍 내려주기도 한다. 이들은 서로 아는 사이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어떤 때는 갑자기 버스를 길 옆에 세우고 보조가 어디론가 뛰어가서 물건들을 받아온다. 일종의 택배 부업을 하는 것 같다. 그동안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이런 장면을 여러 차례 보았다.
드디어 아바나에 도착했다. 이번에 세번째 오는 아바나의 시외버스 터미널이다. 이제는 눈감고도 다닐 수 있겠다. 버스에서 내려서 오토바이 택시를 흥정했다. 10달러를 부르는데 나에게는 5달러뿐이다. 보여주었더니 고개를 흔들다가 내가 그냥 가려고 하니까 타라고 한다. 솔직히 거리에 비해 10달러는 너무한 요금이다.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마지막 숙소로 왔다. 나는 내일 비행기를 타고 쿠바를 떠난다. 그래서 마지막 숙소는 아껴두었던 곳으로 정했다. 말레꼰 해변을 베란다에서 바라볼 수 있는 말레꼰 해변가의 숙소를 잡았다. 그런데 숙소에 도착해서 방을 확인하는데 내 방은 베란다가 없는 안쪽 방이다. 내가 베란다가 왜 없냐, 사진과 다르다고 했더니 방에서 복도를 따라 나오면 공용 베란다가 있는데 베란다 옆방 손님과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란다. 내 방에 딸린 것이 아니라 실망했다. 그런 내용은 미리 안내되어야 하지 않을까? 치잇. 사진빨에 속았다.
일단 채크인을 하고 짐을 정리한 후 밖으로 나왔다. 오늘이 쿠바의 마지막 밤이다. 그동안 망설였던 쇼핑을 할까 하고 카드 사용이 가능하다는 기념품가게를 찾아갔다. 그런데 구글맵이 틀렸다. 그 자리에 가게가 없다. 맵스미에도 나오지 않는다. 주변을 빙글빙글 돌다가 내가 돌아버리겠어서 포기했다. 대신 안가봤던 길들을 산책한다는 마음으로 주변을 돌아다녔다.
다니다보니까 미국 국기로 모양의 바지를 입은 할아버지가 지나간다. 패션 감각이 매우 독특한 분이다. 근처 박물관 입구에서 단체로 춤 연습하는 청소년들도 보았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박물관 문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춤 연습이 한창이다. 이런 장면을 보면 여기가 쿠바인지 미국의 길거리인지 잘 모르겠다.
무슨 박물관 앞에 책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 조각을 보았다. 뭔가 유명한 사람인가보다. 뉘신지 찾아보았으나 검색 실패다. 쿠바는 이런 것에 대한 안내문이 너무 부족하다. 관광 산업으로 먹고 산다는데 이런 것에 좀 신경써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문득 깨달았다. 많은 상점들이 오늘은 일요일이라서 문을 닫았다. 요일감각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장사가 잘되는 일요일에 문을 닫는 것이 자본주의에 물든 나의 생각에는 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쨌든 오늘은 일요일이다.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았다. 즉, 기념품 쇼핑은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혹시나 해서 쿠바에 도착한 첫날 우연히 발견한 벼룩시장같은 곳을 찾아갔다. 여기도 절반 정도만 문을 열었다. 둘러보다가 체 게바라가 새겨진 작은 자석 공예품을 하나 샀다.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숙소에 돌아와 맥주를 들고 베란다로 갔다. 옆방에 투숙한 중국여행객이 저녁 식사 중이었는데 나는 그 옆에서 맥주를 마셨다. 아까 오는 길에 사온 길거리 햄버거(정확히 말하면 돼지고기 버거)를 안주삼아 먹었다. 지난번 산타클라라에서 발견했던, 훈제된 돼지고기 살코기를 즉석에서 발라내어 빵 사이에 끼워주는, 그런 노점을 발견해서 신나서 두 개나 샀다. 산타클라라에서는 200쿠바페소였는데 여기서는 250쿠바페소다. 이곳 아바나의 버거는 좀더 짭짤해서 술안주로 아주 딱이다.
맥주를 마시면서 노트북을 켜고 이것저것 보고 있는데 숙소 주인의 딸이 와서 기웃거린다. 그러더니 자신의 게임기를 가져와서 내 옆에 앉아 게임을 한다. 아이가 이런 게임기를 가지고 놀 수 있다니 이 집은 부잣집인 것 같다. 게다가 아이가 하고 있는 게임은 마인 크래프트(어린이용 버전)다. 그런데 얘는 이 게임이 무엇을 하는 게임인지 모르는 것 같다. 마인 크래프트는 건축과 전투가 중심인데 그런 기능은 모르고 그냥 폭탄 쌓아서 터트리면서 좋아한다. 안되겠다. 마인 크래프트 게임의 매니아로서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내 노트북으로 마인 크래프트를 플레이시켜서 집을 짓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난리가 났다. 자신이 해보고 싶어하는 것 같길래 키보드와 마우스 작동방법을 알려주었더니 금방 익혀서 게임을 한다. 역시 애들은 이런 것에 적응이 빠르다. 이렇게 해서 본의 아니게 쿠바의 어린이 한 명을 게임의 신세계로 인도했다. 이게 잘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아이는 한참동안 게임을 하다가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어 들어갔다. 나는 한동안 맥주를 마시면서 말레꼰 해변을 내려다보았다. 늦은 시간까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낮에는 너무 더우니까 시원한 밤에 사람들이 더 많이 나오는 것 같다. 바다는 어둠이 내려 앉아 칠흑같이 어둡다. 좀 무서울 정도로 어둡다. 그런 바다와 달리 인간의 영역은 밝다. 쿠바의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아서 모든 가로등이 불을 밝힌 것은 아니지만 차도와 도심 쪽은 불빛으로 환하다. 자연계와 인간계가 너무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리고 파도 소리가 끝없이 들리지만 지나가는 차 소리도 끝없이 들린다. 산책하면서 떠드는 사람들 소리도 끝없이 들린다. 내가 기대했던 차분한 밤바다 풍경과는 많이 다르다.
그래도 어쨌든 여기는 쿠바다. 말레꼰이다. 정열의 나라, 올드카의 나라, 체 게바라의 나라다. 내가 이곳을 여행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꿈만 같다. 약간 비현실적인 순간들이 순식간에 지나간 것 같다. 이런 저런 감회에 젖어 있는데 바람 소리가 점점 거세진다.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불고 파도가 자주 방파제를 넘어 들이친다. 사람들도 서둘러 철수하고 있다. 주인이 달려와서 활짝 열었던 베란다의 문을 닫아 잠근다. 그리고는 거대한 나무 판대기를 가로로 걸쳐서 문을 단단하게 고정을 시킨다. 나와 중국여행객이 그 작업을 도왔다. 여기는 바다 바람을 직접적으로 맞는 곳이라서 이렇게 해야 한단다. 나무 판대기를 걸어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이 덜컹거리는게 당장이라도 문짝이 날라갈 것 같다. 내 방이 저 안쪽인 것이 다행이다. 베란다 옆방은 아마도 밤새도록 저 덜컹거리는 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이런 것을 전화위복이라고 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