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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Oct 20. 2024

그래! 이거야.

쿠바 여행기 14일

2023.12.09.토요일

윽.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첫째, 나의 허벅지와 엉덩이가 너무 상태가 안좋아서 제대로 앉지도 눕지도 못했다. 어떤 자세를 취해도 아프다. 둘째, 숙소 근처의 바에서 밤새도록 들려온 음악과 고성방가로 인해 잘 수가 없었다. 나는 어지간한 소음에도 잠을 잘 자는 편인데도 어제의 소음은 너무 심했다. 두 가지 원인이 겹치니까 정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결국 새벽 3시 음악이 멈추고, 너무나 피곤해서 아픔을 잊을 만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아침에 숙소 주인에게 밤새 들려온 소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니까 놀란다. 이런 일은 거의 없었다면서 무슨 행사가 있었는지 알아보겠단다. 나중에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누군가의 생일이라고 파티를 했단다. 오늘 밤에는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한다. 다행이다. 

아침 식사는 숙소 조식(5달러)을 신청해서 먹었다. 이 숙소는 음식이 맛있다는 평이 많아서 어제 저녁과 오늘 아침을 모두 먹어 보았는데 너무너무 만족스럽다. 아침에는 빵, 비스켓, 치즈와 햄, 오믈렛, 과일 등이 나왔다. 나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 아닌가 싶다. 음식을 남기면 안될 것 같아서 남은 빵에 치즈와 햄을 넣은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따로 챙겼다. 이것은 점심에 먹으면 될 것 같다. 아침을 먹고 1층으로 내려와 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주인이 아이스크림을 준다. 어제 저녁 먹고 나서 너무 배도 부르고 엉덩이도 아파서 후식을 사양했었다. 그걸 지금이라도 주겠단다. 지금도 배가 부르지만 신기하게도 아이스크림 먹을 배는 따로 있나보다. 쫀득쫀득한 아이스크림이 너무 맛있다. 



원래 오늘은 관광 셔틀버스를 타고 근처의 유명하다는 곳들을 다녀볼까 했다. 티켓을 사면 하루 종일 이용할 수 있는데 대략 한시간에 한번 오는 버스를 중간중간에 타고 내릴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나의 엉덩이 상태로는 덜컹거리는 버스 타기는 불가능하다. 오늘은 그 어떠한 탈 것도 탈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걷기다. 역시 나는 한국에서도, 쿠바에서도 걷는다. 비냘레스의 중심가 뒷쪽으로 가보니 작은 주택 단지가 있다. 그 길을 따라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가는 길이 국도인데 인도가 없는 구간도 있어서 걷기는 좀 위험하지만 차가 아주 드물게 다녀서 그럭저럭 걸을 만했다. 한시간 정도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니까 목적지의 이정표가 보인다. 중간에 차가 다니는 도로 옆으로 난 작은 숲길이 있어서 그쪽으로 걸었다. 이름 모를 꽃들이 많이 피어있다. 적도 부근이라 그런지 꽃들이 강렬하다. 사람들도 열정이 넘치는데 꽃들도 그런 것 같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기 고급 호텔 옆에 있는 전망대가 비냘레스에서 가장 유명하다. 바로 구글맵의 비냘레스 소개 사진을 찍은 장소이기도 하다. 호텔은 시설이 낡았지만 쿠바에서는 제법 고급진 호텔이다. 수영장도 딸려있다. 전망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경치를 구경하고 있다. 관광 셔틀버스 노선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이다. 그런데 전망대 앞에서 아주 늘어지게 낮잠을 자는 개님이 있다. 엄청 시끄러운데 참 잘도 잔다. 잠자는 개님 앞을 지나 전망대에 올라섰다. 



바로 이거다! 이 풍경! 이 모습을 보려고 내가 여기에 왔다. 아! 카메라는 현실을 다 담아내지는 못한다. 실제로 보면 더더 예쁘다. 내 눈 앞에 이런 풍경이 펼쳐지다니...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동안 나는 많은 곳을 여행하면서 경치에 감탄했었다. 그랜드 캐년은 무서울 정도로 비현실적인 경치였고, 마추픽추는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경치였고, 안나푸르나는 하늘에 맞닿은 것 같은 고혹적인 경치였다. 제각각 아름다움의 느낌이 다르다.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이 모습은 지상 낙원이라는 말이 딱 떠오르는 경치다. 초록으로 뒤덮인 들판과 들판을 둘러싼 부드러운 능선의 산들, 마냥 평화로울 것 같은 풍경이다. 이걸 보기 위해 나는 여기까지 온 것이다. 여기 온 보람이 있다.



전망대에서 오랫동안 경치를 감상하고 나서 다시 시내로 향했다. 이번에는 작은 오솔길을 따라 내려갔다. 이 길은 가파른 산길이라 올라올 때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아까 빙 돌아서 도로를 따라 올라온 것이다. 예상대로 산길이 가파르다. 올라오려면 힘들 것 같다. 그런데 이 길을 자전거를 짊어지고 올라오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그들은 전망대를 보고 나서 아까 내가 올라온 도로를 따라 자전거 타고 내려갈 생각인가 보다. 하긴 오르막 도로를 자전거 타고 가기는 힘들지. 그런데 산길에 가까운 이 길을 자전거를 매고 올라가는 것도 힘들지 않나?

가파른 산길을 내려오고 나니 들판길로 접어든다. 황량한 들판도 지나고 남의 농장 옆도 지나갔다. 어느 곳에서는 농가에 아이들이 놀고 있어서 나는 시내로 가는 길을 물었다. 다운타운이라는 단어를 용케 알아 들은 아이들이 손짓발짓으로 길을 알려준다. 혹시나 해서 들고 다니던 연필들을 아이들에게 주었다. 아이들은 선물을 받고 좋아하면서 엄마가 있는 곳으로 자랑하면서 달려간다. 귀여운 아이들이다. 

사람도 만나고 염소, 소, 말 등의 동물들도 만났다. 다들 나를 신기하게 쳐다본다. 나도 그들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특히 소는 생각보다 덩치가 커서 근처를 지나갈 때는 좀 무서웠다. 그런데 중간에 길을 잃었다. 구글맵도, 맵스미도 다 틀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길이 변했다. 흔적으로 보건대 예전에 길이 있던 곳이 이제는 수풀이 무성해져서 길이 없어졌다. 결국 남의 밭과 농장을 통과해서 겨우겨우 큰 길로 나왔다. 



너른 들판을 지나면서 흙먼지를 엄청 뒤집어 썼다. 숙소로 돌아와 씻고 내친 김에 빨래까지 해서 옥상에 널었다. 우와... 햇살이 엄청 강해서 빨래가 소독되다시피 하면서 잘 마른다. 빨래를 널어 놓고 나와서 중심도로의 성당 앞 공원에서 사람들 구경도 했다. 오랜만의 사람구경이다. 여행 온 것으로 보이는 노년의 부부, 우루루 몰려 다니는 동네 청년들, 의도가 의심스러운 삐끼들, 어? 동양사람도 있다. 느낌으로는 일본 사람인 듯하다. 오랜만에 보는 동양사람이다.

어떤 여자가 나에게 오더니 자기는 요가와 살사를 가르치는 사람인데 내일 무료 클래스가 있다고 한다. 나는 내일 이 도시를 떠난다고 하니까 안타까워한다. 그런데 솔직히 시간이 맞는다 해도 지금의 엉덩이와 허벅지 상태로는 요가나 살사는 엄두를 낼 수가 없다. 말타기의 후유증이 심하다. 그나마 시간이 약이라고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서 다행이다. 

중심도로에서 아주 작은 기념품 시장도 보았다. 각종 기념품부터 생활용품까지 다양하게 팔고 있다. 아주아주 작은 시장이지만 뜻밖의 장소에서 기대하지 못했던 것이라 즐겁게 구경했다. 



빨래가 마르기를 기다리면서 이제는 나의 최애 공간이 된 숙소의 옥상에서 간단하게 샌드위치를 먹고 게임도 하면서 놀았다. 그랬더니 숙소 주인이 이번에는 색다른 간식을 갖다 준다. 코코넛과 치즈를 섞은 시원한 디저트다. 자신의 집에서 만드는 특별 디저트란다. 달콤한 코코넛과 짭짤한 치즈가 주는 단짠의 묘미가 기가막히다. 숙소 주인이 레시피를 알려주는데 만드는 것 자체는 간단해 보인다. 나중에 집에서 만들어 먹어봐야겠다. 숙소 주인과 잠시 담소를 나누었다. 오늘도 손님은 나 혼자란다. 내가 오기 전에 손님이 있었고 내가 간 후에 손님들이 온단다. 뭐니? 다들 짰니? 나 혼자 즐기라고? 주인에게 이곳 경치가 너무 좋다고 하니까 자기도 여기가 좋단다. 일몰 위치가 절기에 따라 바뀌는데 지금은 마을 뒤로 해가 지지만 점차 해의 위치가 산쪽으로 옮겨 간단다. 자기는 산 뒤로 해가 지는 때가 더 예뻐서 좋단다. 그럴 것 같다. 

이렇게 해서 비냘레스의 마지막 밤이 깊어간다. 지금까지의 쿠바 여행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코 비냘레스다. 아름다운 경치는 정말 환상이다. 그리고 느긋하게 흘러가는 이곳의 일상도 마음에 든다. 더하여 친절한 숙소 주인도 이곳을 좋아하게 만들었다. 쿠바의 마지막 여행지로 비냘레스를 선택한 것은 너무 잘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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