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보다 친구

여기 온 목적은?

by 바람

나는 8월12일(토)부터 8월19일(토)까지 캐나다 동부를 여행했다. 도깨비를 찾아서 올드 퀘백의 거리를 걸었고, 빨강머리 앤을 찾아서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의 해변을 산책했다. 긴 여행을 마치고 다시 밴쿠버로 돌아오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숙사의 내 방이 이제는 한국의 집처럼 편하게 느껴진다.


2023.08.21. 월요일 [밀린 공부 달리기]

오랜만에 도시락을 싸서 학원에 간다. 출근 아니 등교하는 기분이 상쾌하다. 많은 멤버들이 바뀌어 있을 것이다. 어떤 친구들을 만나게 될까? 내 친구 '루시'는 그대로 있겠지라고 생각하는데 내 등을 살짝 치고 인사하는 '루시'! 전에도 몇 번 등교길에 마주쳤는데 오늘 또 이렇게 만났다. 이 정도면 우리 인연도 보통이 아니다. '루시'는 나에게 여행 잘 다녀왔냐며 오래 기다렸다고 했다.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 봤다면서 여행 얘기해달란다. 즐겁게 이야기 꽃을 피우며 학원에 도착했는데 낯익은 친구들과 계속 마추쳤다. 여러 친구들과 'Long time no see.'를 외치며 인사를 나누었다. 이래저래 여기가 나의 홈그라운드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푸근해진다.

문법 수업은 그동안 진도를 쭈욱 뽑았단다. '루시'가 그동안 진도 나간 부분을 짚어주면서 리뷰 시험지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구간의 연습 문제를 내가 풀고 나면 답을 보여주겠단다. 너무 고맙다. 역시 '루시'는 나의 베프다. 다행히 문법 수업의 학생들은 많이 바뀌지 않았다. 친구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문법교사 '스튜어트'도 반가워하며 어디어디 다녀왔냐고 묻는다. 퀘백과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PEI)에 다녀왔다니까 놀란다. PEI 사람들은 여기 밴쿠버 사람들과 다르게 생기지 않았냐고 묻는다. 농담이긴 하지만 너무 먼 곳이라서 여러 가지 면에서 동떨어진 곳이라고 느끼는 것 같다. 참고로 이곳 밴쿠버는 캐나다의 서쪽 끝이고 PEI는 캐나다의 동쪽 끝이다. 비행기를 타더라도 한번에 갈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다.

여행 이야기를 한바탕 나눈 후에 진도를 나갔다. 지난 주에 배웠던 내용들은 나중에 공부해야겠다.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나마 새로 진도를 나가는 단원부터는 설명을 이해하고 연습 문제도 풀 수 있었다. 이제 교사의 설명을 예습하지 않고서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스스로 뿌듯함을 느낀다. 이제부터는 예습보다는 복습에 집중해야겠다.

듣기수업은 학생의 절반 정도가 바뀌었다. 그나마 조금 남아있는 익숙한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교사 '아민'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 '아민'은 재밌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교실 한가운데 칠판을 등진 의자를 하나 놓더니 자원자를 한 명 받는다. 친구들이 신입생인 터키 학생을 지목하니까 그가 흔쾌히 나가서 의자에 앉았다. 그는 아주 유쾌하고 적극적인 학생이다. '아민'은 칠판에 friends라고 쓰고 우리에게 이 단어를 말하지 말고 영어로 설명하란다. 여기저기서 서툰 설명이 쏟아진다. 너는 이 사람과 함께 놀러간다, 매일 같이 나간다, 함께 게임한다 등등의 설명을 했다. 그는 스포츠? 게임? 헛갈려 한다. 그래서 사람 명사라고 말해주었다. 가까스로 친구를 맞추었다.

한 명 더 해보자며 자원자를 찾길래 내가 용감하게 나섰다. 평소의 나는 이런 때에 결코 자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는 영어 연습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으면 열심히 자원한다. 내가 의자에 앉고 교사가 단어를 쓰고 나니까 여기저기서 설명이 쏟아지려 하길래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잠깐, 사람이야? 물건이야? 그랬더니 사람이란다. 오케이. 설명해봐. 그랬더니 터키 학생이 예를 들겠다면서 자기가 아빠고 앞에 한 친구를 지목하고 그가 엄마고 그 옆에 친구가 동생이란다. 가족이구나. 맞단다. 내가 너무 빨리 맞추니까 '아민'이 재미없어한다. 아, 좀 모르는 척했어야 재밌는 건데 내가 눈치가 너무 없었구나.

읽기와 쓰기 수업도 학생들이 많이 바뀌지 않았다. 새로 진도를 나가기 시작했나보다. 교사가 학습자료를 주었는데 단어 부분은 이미 배웠나 보다. 이것도 열나게 따라 잡아야겠다. Dog가 사진 모델로 활동하는 이야기를 읽고 내용을 퀴즈로 풀어 보았다. 내용은 별로 어렵지 않다. 어려운 것은 늘 그렇듯이 단어와 품사다. 이번 주 수요일에 내용에 대한 퀴즈를 풀거란다. 이제 시작이구나. 월말이 다가와서 테스트와 퀴즈의 시즌이 시작되었다. 참 좋은 시기에 복귀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회화수업을 함께 듣는 일본 친구 '코즈에'와 수다를 떨었다. 워킹홀리데이로 이곳에 온 그녀는 일본에서 유치원교사였단다. 여기서 공부를 하면서 일자리를 구하고 좀더 나아가서 캐나다 시민권을 받으려고 한단다. 그녀는 2주 후에 '빅토리아'라는 도시로 옮겨서 그쪽에서 일자리를 찾아볼거란다. '빅토리아'는 밴쿠버 인근의 섬에 있는 도시인데 여기보다 덜 혼잡한 도시라고 한다. 차분한 성품의 그녀에게 어울리는 도시일 것 같다. 우리는 그동안 회화수업과 보충수업을 함께 들으면서 많이 친해졌는데 아쉽다.

회화 수업까지 마치고 도서관에 가서 숙제와 복습을 했다. 문법 진도가 많이 나가서 한꺼번에 다 복습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조금씩 나눠서 이번 주 안으로 끝내야겠다. 그리고 어제부터 시작한 영시를 마저 번역했다. 지난 주말에 여행 짐을 풀고 나서 도서관에 와서 앞으로의 공부 계획을 세웠다. 그 중 하나가 영시 번역하기다. 새로운 단어도 배우고 작문 연습도 할 겸해서 시작했다. 이곳에 온 초반에는 영어 소설을 번역하면서 공부하려고 했는데 너무 길어서 포기했다. 대신 청소년을 위한 단편시 모음집을 발견해서 거기 있는 시를 한 편씩 번역해보기로 했다. 시는 비유와 상징이 있어서 어려우나 대신 분량은 짧다. 얕은 꼼수를 부려본 것이다. 예쁜 공책을 사서 정성껏 옮겨쓰고 열심히 번역해 보았다. 그런데 처음부터 너무 어려운 시를 선택했다. '셰익스피어'의 '폭풍으로부터'라는 시인데 희곡 '폭풍'에 나온 대목이다. 내용이 어려워서 낑낑대면서 겨우겨우 한 편을 마쳤다. 다음에는 쉬운 것을 선택해야겠다.

오늘도 보람찬 하루를 보냈다. 해야할 공부의 양이 너무 많지만 그래도 목표를 조금씩 이루어가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제부터 신발끈을 동여매고 달려보자.


2023.08.22. 화요일 [해킹의 심각성]

'루시'가 지난번에 인스타그램이 해킹 당했는데 이번에는 페북이 해킹 당했단다. 누군가가 그녀의 페북으로 지금 유럽에 여행갔다, 물건을 팔거니까 메시지 보내라 등의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단다. 그런데 지금 페북의 이메일 계정이 바뀌어서 '루시'는 자신의 계정에 접근을 할 수가 없다. 지난번 인스타그램이 해킹 당했을 때 모든 비번을 바꾸었고 인스타와 페북 연동도 해지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지 모르겠단다. 페북에 신고하고 도와달라고 했는데 그들은 계정 이메일이 바뀌어서 자신들이 어떻게 해줄 수 없다고 했단다. 내가 검색해보니까 이런 경우 경찰에 신고하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단다. 지금 해외에 나와 있어서 대응이 더욱 어렵단다. 해킹이 정말 무서운 거구나. 나도 이중보안을 해놓고 좀더 신경써서 점검해야겠다.

듣기 시간에 그동안 배운 형용사를 활용해서 자신의 친구나 가족을 소개하는 활동을 했다. 너그러운, 사려깊은, 신중한, 까다로운, 다투기 좋아하는 등의 형용사들을 배웠다. 이런 성격을 가진 가족이나 친구를 떠올리고 파트너에게 소개하는 활동을 했다. 그런데 나는 이 활동을 하면서 과연 나 자신은 어떤 형용사로 표현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나에게 어울리는 형용사는 무엇일까? 기왕이면 사려깊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이런 형용사가 어울리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지?

점심을 먹고 숙제를 하는데 너무 졸리다. 잠을 충분히 잤는데도 왜 자도자도 졸린 것일까? 좋지 않은 머리를 너무 많이 사용해서 그런가보다. 요즘 뇌를 용량 초과로 굴리고 있다.

회화수업 시간에는 어제에 이어서 위치에 대한 활동을 했다. 오늘 배운 것 중에 재밌는 내용이 있다. in front of와 in the front of의 차이다. 'The man is in front of the bus.'는 '남자가 버스 앞에 있다.'는 의미이다. 'The man is in the front of the bus.'는 '남자가 버스 안의 앞쪽에 있다.'는 의미이다. 한끗차이로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우리나라 말에도 그런 것이 있다. '너를 사랑해'와 '너만 사랑해'처럼 조사 하나만 바꾸었을 뿐인데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말이란 것은 다 그런 거 같다. 작고 미묘한 부분에서 큰 차이가 생겨난다. 그래서 말은 참 조심스러운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extra 수업을 듣는다. '마리아나'가 진심으로 반갑게 맞아 주는게 느껴졌다. 여행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그 사이에 많은 학생들이 떠나고 오늘은 일본 친구 '코즈에'와 새로 등장한 브라질 학생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의 학생만이 보충수업을 들었다. 오늘의 주제는 쇼핑인데 옹기종기 모여서 다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브라질 학생은 중년의 남자인데 쇼핑을 좋아하지 않는단다. 주로 아내가 쇼핑을 한단다. 그러나 전자제품 구경하는 것은 좋단다. 어디서 쇼핑하는지, 현금과 카드 중 어느 것을 선호하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즘은 대부분 카드를 사용한다. 심지어 브라질 학생은 카드조차 들고 다니지 않고 스마트 워치로 다 해결한단다. 일본은 도시에서는 주로 카드를 이용하지만 아직까지 시골에 가면 카드를 사용하지 않는 곳이 많단다. 수업이 끝나고 나오는데 '마리아나'가 나에게 다시 한번 돌아와서 참 기쁘다고 말해주었다. 나도 이 수업에 돌아와서 참 기쁘다고 대답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기숙사에 도착하자마자 인스타그램의 메신저로 멕시코 배우 친구 '깔라'에게 답장을 썼다. 내가 학원에 간 사이에 그녀는 비행기를 타러 간다고 인스타로 작별인사를 보내왔다. '깔라'는 10월까지 이곳에서 영어를 공부할 계획이었는데 갑자기 터키에서 촬영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단다. 이번 주말에 가는 줄 알고 금요일에 기숙사 친구들과 작별파티를 하기로 했는데 비행기표가 갑자기 바뀌었단다. 그녀는 나에게 꼭 멕시코로 놀러오고 멕시코에 오면 자기 집에 머물러야 한다고 했다. 나를 위해 손님방을 준비해두겠다고 한다. 나는 멕시코에 놀러가면 '루시오'의 집에도 가야하고 '깔라'의 집에도 가야한다. 신난다. 멕시코 여행을 꼭 가야겠군.


2023.08.23. 수요일 [아닌 밤중에 대청소]

문법 수업 중 교재에 소개되었던 김연아 선수의 우승 장면을 함께 감상했다. 전에도 봤던 것인데 여전히 아름답다. '스튜어트'는 나에게 요즘 김연아 선수가 무엇을 하고 있냐고 묻는다. 나는 친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걸 내가 어찌 알겠소. 사실 나는 유명 연예인이나 선수들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K-팝이나 드라마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는 외국 친구들에게 뭐라 해줄 말이 없다. 오히려 내가 그들로부터 요즘 어느 한국가수가 뜨고 있는지, 어떤 드라마가 유행하는지 정보를 듣고 있을 정도다.

새로 배우는 단원은 동사구인데 이건 거의 문법이 아니라 단어 공부 수준이다. '스튜어트'도 이것은 문법 영역이라고 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루시'와 나는 연습문제를 함께 풀면서 둘다 엄청 헛갈려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동시에 헛갈린 적은 없었다. 그동안 연습문제를 풀 때 내가 혼동하면 '루시'가 바로 잡고 '루시'가 혼동하면 내가 바로 잡아주었다. '루시'는 어휘에 강하고 나는 맥락 달리 말하면 눈치에 강하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푸는 문제들은 거뜬히 해결했는데 오늘은 둘다 손을 들었다. 전체적으로 글의 맥락은 물론 어휘의 숨은 의미까지 고려해야 해서 더욱 어려웠다. 우리는 혀를 내두르면서 더 많이 연습해야 한다고 했다.

듣기 수업과 읽기 수업 모두 작은 테스트를 보았는데 자신있게 보았던 시험에서 생각보다 점수가 나오지 않았다. 세부적인 것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도 있고 방심했던 것도 있다. 그리고 단어와 문제의 수준이 조금씩 더 어려워진 점도 있다. 자만하지 말고 어려운 단어를 더 많이 공부해야겠다.

회화 수업은 위치를 설명하고 길을 찾는 활동을 했다. 그런데 교사 '캐서린'이 기운이 없어 보인다. 그녀의 제일 친한 친구 '캔디스'는 나의 읽기와 쓰기 수업 교사이다. 아마도 '캔디스'가 이번 달까지만 근무하고 떠나기 때문에 슬퍼하는 것 같다. 늘 명랑하고 활기차던 '캐서린'이 기운빠진 걸 보니까 안타깝다. 단짝 친구를 떠나보낸 경험이 있는 나는 그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럴 때는 바쁜게 좋다. 나는 일부러 '캐서린'에게 이것저것 질문했다. 그녀는 특유의 손짓발짓으로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extra 수업을 듣고 나오는데 대만 친구 '제니스'가 여행 어땠냐며 말을 붙여왔다. 그녀와 함께 걸어가면서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제니스'는 나에게 요리에 대한 고민이 있는데 도와달라고 했다. 전에 내가 만든 도시락들을 맛나게 먹어서 요리를 되게 잘하는 줄 알고 있다. 내가 요리를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들어보기로 했다. 그녀가 어떤 빵을 샀는데 그게 예상했던게 아니란다. 사진을 보여주는데 타르트를 만들 수 있는 기본빵을 산 것 같다. 그녀는 블루베리나 딸기를 잔뜩 얹은 타르트를 만들려고 했는데 실패했단다. 사실 여기까지 이해하는 과정이 굉장히 어려웠다. 내가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고 그녀는 말을 엄청 빠르게 했다. 내가 고개를 갸오뚱하니까 그녀는 번역기를 이용해서 접착제라는 단어를 보여주었다. 추측하건대 타르트빵 위에 과일을 올렸을 때 그게 빵에 잘 달라붙어 있지 않고 따로 놀아서 문제인 것 같다. 이때 내 머리를 스치는 아이디어! 나는 꿀이나 메이플시럽을 발라봐, 혹은 잼이나 땅콩버터도 가능할거 같다고 말해주었다. 그녀는 감탄하면서 좋은 아이디어라고 고맙단다. 소가 뒷걸음치다 쥐잡은 것 같지만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

오늘은 MeetUp의 '밴쿠버 한영언어교환' 모임이 있는 날이다. 전철을 타고 모임 장소로 갔다. 오늘도 사람들이 바글거린다. 몇 명은 그 사이 안면을 익혀서 인사를 나누었다. 지난주에 왜 오지 않았냐고 물어서 여행 다녀왔다고 했다. 퀘백과 앤섬에 다녀왔다니까 다들 놀란다. 오늘도 폭풍같은 2시간이 지났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 틈에서 좀 따라잡기 버거웠지만 그래도 열심히 들으려고 노력했고 말도 열심히 했다. 그룹을 몇 번 바꾸면서 조금씩 말이 유창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까 그룹에서 말했던 주제를 한번 더 말하려고 노력해서 그런 거 같다. 2시간을 열심히 듣고 열심히 말했더니 진이 다 빠진다.

집에 돌아오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겼다. 멕시코 친구 '룰라'와 일본 친구 '유카'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녀들은 나를 보자마자 기숙사에서 보낸 이메일을 확인해 보라고 한다. 얼른 확인해보니까 경고 이메일이 와 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멕시코 배우 친구 '깔라'가 터키로 떠나면서 자기가 쓰던 여러가지 물건들을 친구들에게 필요하면 사용하라고 싱크대와 식탁에 올려두고 갔다. 휴지나 키친타올은 모두 다 같이 쓰라고 싱크대 위에 올려두었고 커피와 과자류, 티 박스 등은 누구누구에게 선물로 남긴다는 메모를 붙여서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문제는 이런 저런 것들이 엄청 너저분하게 여기저기 널려있었다는 점이다.

학생들이 이사를 나가면 하우스키퍼들이 와서 그 방을 다시 청소하고 새로운 학생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학생들은 이사를 나가면서 자기 짐을 깨끗하게 치우고 냉장고와 싱크대 서랍도 싸악 비우고 나가야 한다. 그런데 '깔라'는 냉장고와 싱크대 서랍을 그대로 두고 갔다. 그래서 하우스키퍼들이 너저분한 주방과 식탁, 냉장고의 사진을 찍었고 그것을 우리 모두에게 경고로 보낸 것이다. 경고 내용이 어마무시하다. 이것은 마지막 경고이고 계약 조항에 따라 내일까지 치우지 않고 이렇게 지저분하게 두면 벌금을 물리겠다고 한다. 왜? 우리에게?

그들이 보낸 사진은 어제의 오후 상황이었다. 나는 어제 저녁에 와서 그녀가 남긴 메모와 물건들을 보고 각자 선물 받은 것들을 가져가도록 했고 공동으로 선물받은 것은 가지런히 주방 옆 공간에 정리해 두었다. 그런데 오늘 와보니까 공동으로 선물받은 것들을 모조리 가져가버렸다. 주방에는 기숙사측에서 제공한 공용물품 외에는 아무것도 올려두면 안된단다. 이 상황이 당황스러워서 어떻게 할까 난감했다. 일단 우리는 각자 이메일로 항의하기로 했다. 우리가 하지 않은 행위에 대한 경고는 옳지 않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긴 공동 선물을 가져간 것은 무례하다. 지금 깨끗하게 치워진 공간의 사진도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이메일로 항의는 하더라도 우리는 '깔라'가 남기고 간 물건들은 치워주자고 했다. 그녀가 자신의 뒷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냉장고의 그녀 칸을 치우지 않았고 그녀에게 할당된 서랍도 너저분하다. 우선 냉장고의 음식 중에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은 각자 자기 칸으로 옮기고 버릴 것은 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깔라'의 지정 서랍에 남아있는 것들도 치웠다. 이참에 이것저것 오래전 학생들이 남기고 간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도 한꺼번에 버렸다. 한바탕 한밤중의 대청소를 마치고 각자 항의 메일을 보냈다. 그러고 나니까 거의 자정이 다 되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이게 뭔 난리인지 모르겠다. 오늘도 길고 긴 하루를 보내고 있다.


2023.08.24. 목요일 [여기 온 목적은?]

문법 수업 시작 전에 '루시'와 나는 늘 그렇듯이 숙제를 함께 채크했다. 그녀는 나에게 여행간 동안 진도 나간 부분 복습했냐고 묻는다. 다 했으면 답을 알려주겠단다. 어제 도서관에서 푼 문제의 답을 '루시'가 확인해주었다. '루시'는 내 영어 코치같다. 그녀는 내가 함께 레벨 Up을 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녀는 나보다 더 잘하기 때문에 그건 어려울 것 같다. 나는 아직 그 정도는 안된다고 했더니 너는 할 수 있다고 부추긴다. 일단 노력은 해볼께라고 답했다.

오늘은 동사구를 배우면서 아마존에 대한 글을 읽었다. 그런데 글을 읽기 전에 '스튜어트'는 누가 아마존에 가본적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별생각없이 가봤다고 말했다. 사실 그동안 나왔던 소재들 중에 히말라야, 인도, 중국, 페루 등 많은 곳을 이미 나는 여행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얘기에 나서면 너무 튀는 것 같아서 조용히 있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의식적으로 가봤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스튜어트'는 눈을 반짝이면서 어느 나라, 어느 지역, 무엇을 타고 갔는지 묻는다. 그리고는 우리가 다음 주에는 레벨 테스트를 하고 나서 시간이 남는데 그때 아마존 프리젠테이션을 하면 어떻겠냐고 한다. 허걱! 이럴 것 같아서 조용히 있으려고 한 것인데. '스튜어트'는 내가 원하지 않으면 안해도 되지만 우리는 다음 주에 시간이 아주 많이 남는단다. 그 말이 더 얄밉다. 그래. 발표할께. 지난번 발표 때에 힘들었지만 영어 실력에 늘어나는데 꽤 도움이 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하겠다고 했다. 에휴. 또 나는 일을 만든다. 이러니 내가 내 신상을 볶는거지.

듣기 수업 시간에 '아민'이 플래시카드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단어를 암기하기 위해 만드는 작은 카드를 플래시카드라고 하는데 그 옛날 우리가 만들던 단어암기장과 같은 것이다. 요즘은 어플 중에 플래시카드 어플이 있단다. '아민'은 수업 방법도 새롭고 유익한 어플이나 웹 사이트로 많이 알려준다. 원래 듣기 수업의 교사인 '윌'은 유쾌하고 재미있게 수업한다는 점에서 좋은 교사이고 보강교사인 '아민'은 다양한 방법과 새로운 정보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좋은 교사다.

점심 시간에는 예전에 월마트에 함께 갔던 일본 중학생 친구 '하나'가 오늘 저녁에 약속이 있냐고 묻는다. 이 친구는 이번 주까지 학원에 다니고 다음 주에 인근의 다른 지역으로 가서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단다. 내가 저녁에 별일이 없다니까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한다. 내일이 마지막 날이라서 작별인사로 함께 식사를 하고 싶단다. 여러모로 소극적인 '하나'가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은 굉장히 용기를 낸 것이다. 그래. 그러자. 같이 저녁 먹자. 마침 함께 있던 일본 친구 '코즈에'도 같이 가기로 했다. '하나'가 옮겨갈 지역은 아주 작은 시골 동네라서 일본 식당이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일본 식당에 갈까 물었더니 한국 음식을 먹어보고 싶단다. 그래서 근처의 한국 식당 중에 평점이 좋은 곳을 골라 보여주니까 매우 좋아한다. 특히 김치볶음밥을 좋아한단다.

회화 수업은 아주 재밌는 방법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캐서린'은 칠판에 이 근처의 길을 그리고 우리 학원이 있는 블럭을 둘러싼 거리의 이름을 알려준다. 지금부터 파트너와 함께 나가서 우리 학원 근처의 어느 건물이나 상점, 장소 중에서 한 곳을 선택해 오란다. 중요한 것은 다른 팀에게 거기까지 가는 방법을 영어로 알려주어야 하므로 설명할 것을 잘 생각하면서 다녀오란다. 일종의 야외 활동이다. 나는 일본 친구 '코즈에'와 파트너가 되었다. 우리는 슬슬 학원이 있는 블럭을 돌아보다가 YWCA를 발견하고 거기를 설명하기로 했다.

교실로 돌아오니까 각자 선택한 장소는 탑 시크릿이란다. 쉿! 다른 친구들이 그곳을 찾아낼 수 있도록 설명글을 쓰란다. 쉽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설명하려니까 그게 마냥 쉬운 것은 아니다. 학원 건물을 나가서 우회전해서 길 끝에서 또 우회전해서 한 블럭을 간다. 그리고 다시 우회전을 해서 반블럭을 간다. 거기서 길을 건넌다. 목적지는 어느 호텔 옆에 있다. 그런데 그 호텔의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설명하기가 어렵다. 무엇과 무엇 사이라고 하면 쉽겠는데 옆 건물에 이름이 없어서 그 표현을 사용할 수가 없다. 편법같지만 주소를 말해주기로 했다. 한참 문장을 만들고 나니까 시간이 다 갔다. 비밀 장소를 찾아가는 것은 내일 하기로 했다. 즉, 내일도 야외수업이다. 신난다.

extra 수업 시간에는 어제의 멤버에다가 칠레 학생이 한 명 합류했다. 오늘은 요리에 관련된 단어들을 배웠다. 이런 저런 단어를 가르치고 나서 '마리아나'는 우리에게 다같이 최고의 오믈렛 레시피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계란을 깨고 섞는다.'라고 말하니까 '마리아나'는 무엇을 넣고 섞을 거냐고 묻는다. 그렇지, 뭔가 넣어야지. 양파, 토마토, 베이컨 등을 넣기로 했다. 재료들을 썰고 치즈도 갈아 넣기로 했다. 아, 최고의 오믈렛이라면 버섯도 넣어야지 버섯을 씻고 자른다. 그리고 후라이팬에 붓는다. 얼마나 오래 요리할 것인가? 2~3분. 살짝 부드럽게 익히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멋진 레시피가 만들어졌다. '마리아나'는 최고의 팀이라고 매우 흡족해했고 학생들도 모두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수업을 모두 마치고 '하나', '코즈에'와 함께 한국식당에 갔다. 김치볶음밥, 떡볶이, 치킨을 시켜서 먹었다. 아주 맵싸한 떡볶이와 치킨의 조화가 환상이다. 김치볶음밥도 오랜만에 먹으니까 맛나다. 나는 서툰 영어로 '하나'에게 새로운 장소에 가서 좋은 친구를 많이 사귀라고 덕담을 해주었다. 수줍음이 많은 '하나'가 계속 친구가 없이 혼자 밥을 먹고 혼자 다녀서 마음이 쓰였다. 아주 조금씩 안면을 익혀서 이제 겨우 몇 명과 친해진 것 같은데 또 새로운 장소로 간다. 아마도 또다시 엄청난 시간이 지나야 겨우 친구가 생길 것 같다. 함께 간 '코즈에'도 유치원교사였기에 내가 '하나'를 걱정하는 마음을 깊이 공감하고 함께 걱정해주었다. 우리는 이심전심 선생님의 마음으로 '하나'를 바라보았다. 부디 이 친구가 새로운 학교에서 잘 적응하고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기를 바란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왔다. 이제부터 숙제와 복습 타임이다. 끝없는 공부, 그리고 다양한 친구들. 지금 나는 공부와 친구 이 두가지 속에서 살고 있다. 영어공부는 이 어학연수의 본 목적이다. 하지만 친구를 사귀게 되는 것도 매우 중요해졌다. 이번 어학연수가 끝나고 나면 영어와 친구 두 가지가 나에게 남을 것 같다. 어쩌면 영어보다는 친구가 더 소중하게 남겠구나. 친구들과의 소중한 추억을 매일매일 잘 기록하고 간직해야겠다.


2023.08.25. 금요일 [보드게임 배우기]

오늘은 문법 복습의 날이다. 지난번 동사구 리뷰 문제를 확인하는데 많이 틀렸다. '루시'와 내가 힘을 합쳐도 안된다. 역시 동사구는 그냥 많이 외워야 하겠다. 예전에 배웠던 단원으로 돌아가서 복습도 했는데 역시 시제는 어렵다. 예전에 배웠던 내용인데도 새롭게 느껴진다. '스튜어트'는 월요일에 시험이 있으나 시험 따위는 신경쓰지 말고 주말을 즐겁게 보내라고 한다. 요즘 '스튜어트'의 말을 제법 알아듣게 되니까 그의 말이 살짝 얄밉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스튜어트'가 싫다는 것은 아니다. 유머와 위트가 넘친다는 뜻이다.

'루시'와 주말에 뭘 할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MeetUp의 보드게임 모임에 또 함께 가기로 했다. 보드게임 매니아인 '루시'는 밴쿠버에 와서도 보드게임 가게를 찾아내서 벌써 몇 개를 샀단다. 나도 보드게임을 하나 사고 싶다니까 이따가 수업 끝나고 같이 가잖다. 좋아. 그래. 시험은 시험이고 노는건 노는거다. '스튜어트'도 주말을 즐겁게 보내라고 했쟎아? 선생님 말을 잘 들어야지.

듣기 수업에서는 사람을 표현하는 형용사를 계속 연습했는데 몇 번 본 단어들은 제법 익숙해졌다. 하지만 방송을 듣고 빈칸 메꾸기를 할 때 대부분의 학생들이 또 우왕좌왕 난리가 났다. 도대체 짧은 순간에 어떻게 저렇게 많은 단어를 말했다는 건지 도무지 잡아낼 수가 없다. 그런데 역시 신기한 것은 답을 알고 다시 들으면 그 말들이 대부분 들린다는 마법같은 상황이 되풀이 된다. 문법은 공부하면 해결될 것 같은데 듣기는 공부만으로 해결될 것 같지 않다. 오직 실전 연습만이 살 길이다.

오늘의 읽기와 쓰기 수업은 최악이었다. 보강교사가 들어왔는데 다큐멘터리 영상을 거의 30분이나 보여주었다. 그리고 영상에 관련된 활동지를 나눠주고 내용 확인 문제를 풀란다. 본문이 길어서 도저히 남은 시간 내에 다 풀 수 없다. 끝날 시간이 되니까 나머지는 숙제로 해오란다. 지금까지의 수업 중에 최악이었다.

점심 시간에 학생 라운지 여기저기서 졸업하는 학생들이 사진을 찍고 작별인사말을 서로 써주고 난리다. 내 친구들도 떠나기 때문에 작별인사말을 써 주었다. 학생들이 깃발에 자기네 나라말로 인삿말을 쓰길래 나도 한국말로 써주었다. 또박또박 써주어서 구글번역기로 번역이 가능하도록 해주었다. 친구들 깃발에 인삿말을 쓰고 있는데 대만 친구 '제니스'가 왔다. '제니스'에게 너의 타르트가 성공했냐고 물으니까 성공했단다. 빵에 블루베리잼을 바르고 블루베리를 얹고 위쪽에 시럽을 뿌리고 구웠더니 아주 맛있는 타르트가 되었단다. 우와, 엄청 달겠구나. 다음 주에 나에게도 맛 보여주겠다고 한다.

회화 수업은 어제 팀별로 정한 비밀장소를 찾아가는 활동을 했다. 어제 작성해둔 안내문을 그룹별로 서로 바꾸어 받았다. 그걸 들고 해당 장소를 찾아가서 그곳의 이름을 적어오는 활동을 했다. 다들 신나서 떠들면서 나갔다. 우리가 받은 안내문에 따라 가보니까 어떤 은행이다. 다들 비밀장소를 찾아서 돌아왔다. 우리가 선택한 장소도 다른 친구들이 맞추었다. 모든 팀들이 서로 다 맞추었다.

수업이 끝난 후 '루시'와 함께 보드게임 가게를 찾아갔다. 학원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쇼핑몰 안에 있는 가게다. 거기에는 '루시'가 몹시 좋아하는 고양이 카페도 있어서 함께 구경도 했다. 보드게임 가게에서 한참 이것저것 '루시'가 추천해주는 게임들의 설명을 들었다. 솔직히 다 알아듣지는 못했다. 비교적 초보자가 입문하기 쉬운 것을 하나 선택해서 샀다. 그녀도 자기 남친을 위해 하나 또 샀다. 내가 이 게임의 규칙을 저녁에 공부해 보겠다니까 '루시'는 혼자 알아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면서 지금 자기가 좀 알려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근처 카페에 가서 차를 마시면서 게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드에 여러가지 그림이 있는데 자신의 카드와 바닥에 놓인 카드의 그림 중에 일치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가져오거나 그 옆에 카드를 놓는 게임이다. 그녀의 설명을 들어서 어떻게 하는 게임인지 이해했다. 집에 와서 설명서를 보니까 너무 불친절하다. 정말 이게 뭔말인가 싶다. 만약 '루시'가 알려주지 않았으면 나는 이 밤을 새더라도 무슨 게임인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다. 아마도 보드게임의 설명서가 불친절하다는 것을 '루시'가 알고 있던 것 같다.


2023.08.26. 토요일 [여러 이별]

오늘은 기숙사의 친구 '룰라'가 떠나는 날이다. 그동안 '룰라'와 정이 많이 들었다. 나이들면 잠이 없어서 그런지 우리는 이른 아침 비슷한 시간대에 일어났다. 아침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평일 저녁 때는 그녀와 나만 집에 있는 날이 많았다. 자주 마주쳐서 그런지 서로 좀더 편하게 대화를 나누었고 쇼핑도 같이 다녔다. 이제 그녀가 떠나면 저녁 시간이나 이른 아침 시간에 나는 허전함을 느낄 것 같다.

'룰라'와 함께 방을 사용했던 일본 친구 '유카'도 아쉬워하면서 '룰라'가 짐을 싸는 것을 도와주었다. 우리는 '룰라'가 부른 우버가 올 때까지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나와 대화한 시간이 너무 좋았다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멕시코에 꼭 놀러오라고 하면서 자기 집에는 손님용 방이 2개나 있으니까 친구와 함께 와도 좋다고 한다. 그리고 주중에는 자기가 일해야 하지만 주말에는 여기저기 안내해줄 수 있단다. 너무 고마운 말이다. 이로써 나는 멕시코에 가서 머물 수 있는 곳이 세 군데나 생겼다. 우버가 도착해서 우리는 함께 짐을 들고 내려갔다. '룰라'는 우버를 탈 때 결국 눈시울을 적셨다. 잘 가. 친구야. 내가 멕시코 여행가면 꼭 연락할께.

친구를 보내고 나서 청소를 하고 시민회관의 회화모임에 나갈 준비를 했다. 시민회관에서 여름에 한시적으로 5회 진행하는 영어회화모임이다. 나는 첫번째, 두번째 모임에 나갔고 이후 2회의 모임은 여행 때문에 불참했다. 벌써 오늘이 마지막 모임이다. 역시 푸근하고 밝은 미소의 '테레사'가 나를 맞아주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함께 했던 대만 가족 '진', '가와', '카나'가 여전히 참여하고 있었다. 다들 너무 반갑게 맞아주어서 마음이 뭉클했다. '가와'는 내 여행 사진을 인스타에서 보았다면서 자신도 그런 멋진 곳에 가고 싶단다. '카나'는 빨랑머리 앤을 몰랐는데 오빠가 알려주었단다. 집에 가면 빨강머리 앤을 꼭 읽어볼거란다. 처음 보는 이란 부부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나의 여행이야기를 한동안 나눈 후, 각자 밴쿠버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도 몰랐던 여러 장소들을 알게 되어서 매우 유익했다. 끝날 때 다들 이 모임이 계속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쉬워했다. '테레사'는 내년 여름에도 이 모임은 계속 된다면서 내년에 다시 만나자고 했다. 다 함께 사진을 찍고 연락처를 주고 받았다. 오늘은 여러 사람들과 이별하는 날이구나.

집에 와서 다음 주에 있을 시험공부를 했다. 이번 달에 레벨 업을 할 수는 없겠지만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점수는 받아야겠지? 공부를 하고 나서 보드게임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선셋비치로 향했다. 좀 일찍 도착했다 싶었는데 마침 내 친구 '루시'가 보였다. 우리는 함께 보드게임 모임을 찾아갔다. 오늘은 나이든 사람들이 모임을 주도하고 있다. 이미 한 그룹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 모임 주최자는 동시에 도착한 사람들을 모아서 새로운 그룹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어제 내가 산 보드게임으로 몇 가지 유형의 게임을 했고 사람들이 더 늘어나서는 다른 게임을 하기로 했다. '루시'가 초보자들에게 쉬운 게임을 추천해달라고 해서 모임 주최자가 재밌는 게임을 알려주었다. 굴을 파서(카드를 연결해서) 황금이 있는 카드까지 도착하는 게임이다. 처음에 각자 역할 카드를 받는데 그 중에는 방해꾼이 2명 있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은근히 굴을 파는 것을 방해해야 한다. 일종의 마피아 게임인 것이다. 처음 판에서 나는 방해꾼이 되었는데 너무 티가 나서 금방 견제를 받았다. 첫판은 시민이 승리했다. 두번째 판에서는 방해꾼이 승리했다. 알고 보니 '루시'가 방해꾼이었는데 모두가 깜쪽같이 속았다. 방해꾼 한 사람은 티가 나서 다들 짐작했지만 나머지 한 명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추측했지만 아무도 찾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방해꾼의 승리로 결판이 난 후 '루시'가 자신이 방해꾼임을 밝혔다. 게임에 이긴 '루시'의 표정이 아주 의기양양하다. 역시 내 친구다!

그밖에 굉장히 큰 카드로 하는 일종의 원카드 게임, 같은 카드를 이용해서 재산을 모으는 부자놀이 게임 등을 했다. 2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오늘 보드게임 모임은 지난번 젊은이가 주최했을 때보다 훨씬 재밌었다. 그 젊은이는 게임에 대해 설명하다 말고 가버렸는데 이번 주최자들은 영어로 하는 설명을 우리가 잘 이해했는지 확인하면서 아주 친절하게 게임을 진행했다. 그리고 끝까지 함께 게임을 했다. 나이든 사람들의 노련함과 여유가 느껴졌다. 이 사람들이 계속 주최한다면 나는 이 모임에 끝까지 나오고 싶다. '루시'도 같은 생각이라면서 저분들이 계속 주최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2023.08.27. 일요일 [마음을 위로해주는 시 구절]

일요일이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 아마존 발표 준비를 했다. 이런 저런 사진을 선택하고 스토리라인을 잡아 보았다. 이걸 영어로 어떻게 설명하지.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간단한 대본을 짜 보았다. 동시에 세탁기와 건조기를 돌렸다. 우리 집에는 공용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어서 학생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서 좋다. 오전은 빨래와 발표 준비로 다 지나갔다.

오후에는 도서관으로 출동해서 문법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그동안 배운 문법 설명 중에서 어려운 것들을 골라서 예문을 한번씩 만들어 보았다. 이제 2달이 되어 공부한 부분이 제법 많다. 1달만 더 공부하면 이 책을 끝낸다. 그때쯤이면 레벨 up이 가능할까? 시험은 여전히 자신이 없다.

문법 공부를 어느 정도 하고 나서 시집에서 시 한 편을 찾아 읽었다. 영국의 유명한 시인 '바이런'의 시를 골랐다. '길없는 숲에는 기쁨이 있다'는 제목의 시인데 연작시란다. 그럭저럭 번역을 했는데 영 풀리지 않는 구절이 있어서 검색해 보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지만 고독의 욕구도 있다는 그런 내용이란다. 다른 부분은 어찌어찌 은유적 표현으로 이해가 되는데 '내가 훔친 인터뷰'라는 부분은 해설을 읽고도 영 풀리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을 훔쳤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사람의 마음을 엿보았다는 의미일까? 또는 둘 다일까?

이렇게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마음에 드는 부분도 있다. '나는 사람을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우연히 만난 이 구절이 복잡한 내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사실 나는 요 며칠 우울했다. 나라꼴이 절망스러운데 나는 여기서 무얼하고 있는가 싶었다. 문득 이 구절을 보면서 '나는 우리나라를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더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해 보았다. 물론 자기합리화다. 하지만 내 진솔한 마음이기도 하다.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다운타운의 중심거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축제를 구경했다. 여름이라 여기저기서 행사가 많은데 오늘은 중심거리에서 축제를 한다. 노래 공연하는 곳도 있고 작은 가게들도 있다. 여기저기 음식 파는 곳도 있고 아이들의 체험활동할 수 있는 곳도 있다. 흥겨운 거리도 구경하고 음악도 잠시 감상했다.

집에 오니까 새로운 학생들이 이사를 왔다. 마침 저녁식사 시간이 겹쳐서 식탁에 둘러 앉아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오! 마이 갓!'이었다. 한 사람은 인도계 캐나다 사람이고 한 사람은 미국 사람이란다. 당연히 그들은 영어 원어민이다. 인도계 캐나다 학생은 애니메이션 공부, 미국인 학생은 메이크업 공부를 하기 위해 이곳에 왔단다. 그들은 모두 밴쿠버의 영화 컬리지에 다닌단다. 전에 얼핏 밴쿠버가 미국의 헐리우드만큼 영화 관련 산업이 발달한 곳이라고 들었다. 정말 그렇구나. 이들의 대화 내용은 나에게는 영어 리스닝 테스트같았다. 대화 속에서 각자 어디 출신인지, 지금 뭐 공부하는지 등에 대한 내용은 그럭저럭 알아들었다. 하지만 이들의 빠른 영어로 인해 대부분은 내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잘되었다. 아주 좋은 연습상대들이다. 앞으로 이들과 살아가면서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기대가 된다.

오늘은 무거운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고 영어 듣기 실습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여전히 엉킨 실뭉치처럼 마음은 무겁지만 언젠가는 풀어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인생이란 기대로 시작했다가 실망 혹은 절망을 거쳐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그 여정의 한 가운데 서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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