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시장에는 어떤 색상의 꽃이 유통될까? 나 혼자 비공식적으로 집계해 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 40% 빨간색, 분홍색
- 30% 하얀색
- 20% 주황색, 피치색, 노란색
- 10% 파란색, 보라색
그렇다면 손님들은 어떤 색상의 꽃다발을 주문할까? 나 혼자 비공식적으로 집계해 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표본집단은 우리 가게에 들어온 주문들이다)
- 60% 파란색, 보라색
- 20% 빨간색, 분홍색
- 10% 주황색, 피치색, 노란색
- 10% 하얀색
꽃 일을 하기 전까지 사람들이 블루톤, 퍼플톤 꽃다발을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줄 전혀 알지 못했다. 우리 가게의 신조 중 하나는 ‘해달라는 대로 해준다’인데, 꽃 색상을 지정한 주문의 절대다수는 푸른색 혹은 보라색 꽃을 메인으로 해달라는 요청이다. 매장에 항상 모든 종류의 꽃을 갖춰놓지는 못하기 때문에 사정의 여의치 않을 때는 양해를 구한 뒤 포장지만 파란색이나 보라색으로 싸서 드리기도 한다. 이럴 때도 다행스럽게 손님은 너무 마음에 들어 하신다.
이런 모습을 몇 번 마주한 뒤로는 매장에 꼭 푸른 계통이나 보라색 꽃을 갖춰 놓으려 한다. 그러나 앞선 통계에서 알 수 있듯이 파란색과 보라색 꽃은 애초에 꽃시장에서 귀하다. 여러 가지를 사놓고 싶어도 종류가 몇 없어서 난처하다. 이런 사정의 꽃팔이에게 ‘야. 내가 있잖아. 안심해.”라는 듯 쨍한 보랏빛을 뽐내는 꽃은 바로 아이리스다. 보라색 꽃이 있는지 눈에 불을 켜고 꽃시장을 누비다가 아이리스를 발견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보라색 불모지의 꽃시장에서 반가운 얼굴을 가진 아이리스는 꽃말조차 ‘좋은 소식’이다. 그래. 아이리스가 있다니. 정말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좋은 소식이란 어떤 것일까? 누군가에게 ‘어머, 참 좋은 소식이다!’라고 말하는 상황을 떠올려 본다.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에게 행복한 일이 생겼을 때, 원하던 대로 일이 잘 풀렸을 때, 새롭고 좋은 변화가 생겼을 때. 그럴. 때 함께 마주 웃으며 좋은 소식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런데 내 기억 속 대화에서 좋은 소식의 당사자는 대부분 상대방이었다.
상대방에게나 좋은 소식이지 나와는 별로 관계없는 보통 소식일 뿐이라는 생각을 한동안 했었더랬다. 상투적인 표현, 작위적인 사회생활처럼 보이기도 하는 좋은 소식이라는 표현에는 진정성이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얼마간 벅차오른 기쁨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라고 말하지 않던 시기가 있었다. 축하해, 잘됐다와 같은 함께 어울릴만한 서술어도 내 안에서 검열하고 아껴가며 사용했다.
- 있잖아. 그 소식이 정말 객관적으로 좋은 소식이 맞아?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인류에게도 동물에게도 지구에게도 우주에게도 모두 좋은 소식이 맞아? 내가 축하해야 할 일이 맞아? 정말 잘된 일이 맞아?
날 선 질문들을 밖으로는 차마 뱉지 못하고 내 안으로 하나씩 던지며 마음을 베어내었다. 다 베어낸 마음으로는 마주 보고 있는 얼굴에 아무 말도 건넬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그렇구나. 정도? 중립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생각하며 참 쓸데없는 시절을 지냈다.
내가 당시의 시간이 쓸데없었다고 평하는 이유는 실제로 그런 대화가 무가치했기 때문이다. 중립의 언어라고 생각했던 말들은 실제로는 중립이 아니고 상대방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상처가 될 뿐이었다. 모두가 편안하고 다소간 즐거운 대화가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아는 것과 별개로 나는 근사한 어른이 아직 못 되었다. 여전히 상대방의 좋은 소식이 나에게는 별로 기쁘게 들리지 않을 때가 있다. 그래서 요즘은 좋은 소식 앞에 세 글자를 넣어서 말한다. 괄호 안에 넣어 묵음 처리까지 완료한 세 글자는, 너에게.
-(너에게) 좋은 소식이다!
소식을 전하는 상대방에게도, 그 소식이 딱히 썩 탐탁지는 않은 나에게도 편안한 기적 같은 말이다. 좀 더 멋진 어른이 되면 세 글자를 빼고도 말할 수 있을까. 아직은 괄호에 기댄 비겁한 문장이지만 나도 언젠가 아이리스처럼 곧은 얼굴로 다른 잡념 없이 정정당당하게 축하를 건넬 수 있길.
2025년 2월 14일
강원도 춘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