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는 어쩐지 나가서 달리기를 할 마음이 들었다. 옷차림을 어떻게 하고 나가야 적당할지 고민이 되는 걸 보니 환절기가 맞구나 싶었다. 이제는 점점 짧아지고 있다고 말하고, 체감상으로도 예전에 비해 찰나처럼 느껴지는 계절인 봄이 온 것이다. 봄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꽃은 아마 벚꽃이 아닐까. 아직은 벚꽃이 개화하지 않았지만 1~2주 사이에 내가 뛰었던 천변을 따라 흐드러진 벚꽃이 피어나겠지. 꽃구경을 나온 사람들로 복작거릴 도로를 생각하면 어쩐지 마음이 따스해진다. 연분홍빛 꽃잎으로 여럿의 시선을 끄는 벚꽃의 꽃말은 ‘삶의 아름다움’이다.
삶은 아름다울까? 글쎄. 그렇지 않다는 확신을 오래도록 가지고 지냈다. 삶은 고통이고 비극이다. 적어도 나의 삶은 그랬으며 이 생각이 바뀔 일이 없으리라는 것 또한 확신했다. 사람들과 대화하던 중에 어쩌다가 이런 주제로 화제가 흘러가서 내 생각을 말하면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흠칫부터 화들짝까지 반응의 범위는 다양했지만 하여튼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 한두 마디씩 걱정과 위로가 섞인 말들을 꺼냈다.
- 왜 그렇게 생각해?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네가 그렇게 생각할 일이 뭐가 있어?
진부했다. 삶이 아름다울 만한 요소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삶이 고통이라고 느끼는 내가 이상해 보였나 보다. 그런데 나는 ‘객관적 지표’라든지, ‘상대적 위치’라든지 하는 것들로 인해 인생이 살만해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중에는 한 줄 한 줄 설명하기도 피곤해져서 어느 순간부터 그냥 이런 말 자체를 안 하게 되었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나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나요? 이런 질문들에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것을 보면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난 그냥 이런 모양으로 태어났다.
생긴 대로 살던 중에, 나의 ‘객관적 지표’가 떨어지는 일을 겪었다. 전세 사기를 당했다. 그때 알았다.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해서 전세 대출을 갚지 못하면 집주인이 아니라 내가 빚쟁이가 된다는 사실을. 난 잘못한 것도 없이 하루아침에 빚더미에 올라앉아 버렸다. 백만 원 이백만 원도 아니고 수천만 원이나 되는 금액을 20대 사회 초년생이 도대체 무슨 수로 어떻게 갚나. 당시에 익숙한 사고 흐름은 죽음으로 모든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었다. 뭔가 인생이 뜻대로 잘 안 풀리면 죽지 뭐. 죽음을 농담처럼 소비하고 다녔다. 그런데 정작 빚더미가 생기고 나니 죽을 수도 없었다. 이거 다 갚아야 죽을 수 있었다. 내가 멋대로 죽으면 엄마 아빠한테 내 빚이 갈 테니까. 그건 또 안되지!
한 푼 두 푼 열심히 갚아가던 몇 년 전의 환절기였다. 일을 마치고 따릉이를 타고 한강을 따라 쭉 달렸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바람을 가르는 느낌이 좋았다. 가로등 주변에 꽃도 피어있고 살랑살랑 물결도 그날따라 참 예뻤다. 달은 내가 달리는 방향으로 떠 있고 도로를 따라 달리는 다른 자전거와 러닝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페달을 밟던 와중에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내 인생도 이만하면 괜찮은 것 같다. 기적 같은 착각의 순간이었다. 생명력의 계절인 봄에 내 삶이 어쩌면 아름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까.
그때 이후로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삶이 때때로 희극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딱히 그렇게까지는 죽고 싶지 않은 스스로가 어색했다. 사는 것은 여전히 별로이긴 하지만 재밌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미래의 특정한 날들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쌓여 오늘이 되었다. 사실 그동안 벚꽃이 피어날 때마다 내가 과연 다음 해의 벚꽃을 또 볼 수 있을까? 그 전에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혼자 속으로 했었다. 이제는 내년 벚꽃은 올해랑 비슷한 날짜에 피려나? 하는 생각을 한다. 여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다.
벚꽃에는 ‘삶의 아름다움’ 외에도 많은 꽃말들이 있다. 그중에서 ‘삶의 덧없음’이라는 꽃말이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삶은 덧없고 그래서 혹은 그럼에도 아름답다는 말일까? 가만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다. 삶은 절대로 아름답지 않다는 과거의 내 생각은 틀렸던 것 같다. 하지만 틀림을 알게 되는 여정에서 더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 있다. 나는 ‘객관적 지표’와 ‘상대적 위치’ 같은 덧없는 것들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다. 내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을 가졌고 앞으로도 계속 더 많이 가질 수 있을 것처럼 보였을 때보다, 많은 것을 잃었거나 내려놓은 지금 훨씬 더 살만하다고 느낀다. 앞으로도 덧없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내가 되련다.
2025년 3월 25일
서울 서교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