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23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페니쿰 : 애수

by 꽃팔이 Mar 04. 2025

  나는 스스로를 플로리스트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내 나름대로 보기 좋게 꽃을 포장해서 판매하는 꽃팔이일 뿐. 플로리스트는 뭔가 예술 점수가 한 스푼 들어간 직업 같달까. 난 사실 이공계 출신이라 예술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래도 매번 공산품 찍어내듯 똑같은 꽃다발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며, 나도 꽃 일이 꽤나 즐겁기 때문에 이런저런 새로운 시도를 해보곤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안 써본 소재를 꽃다발에 넣어보는 것이다. 오늘의 주인공 페니쿰도 이런 이유로 만나게 되었다.


  페니쿰의 생김새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폭죽’이다. 마치 연둣빛 폭죽을 터트린 것 같이 생겼다. 처음에는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어려웠는데 꽃다발의 측면 상단으로 배치하니 풍성한 느낌과 고급스러운 분위기까지 만들어주는, 이른바 효자 소재다. 우리 효자는 어떤 꽃말을 가졌을까? 생김새처럼 화려함을 뽐내는 꽃말이려나? 궁금함을 안고 페니쿰의 꽃말을 검색해 봤다. 내 예상은 완전히 틀렸다. 페니쿰의 꽃말은 ‘애수’다.


  애수는 가슴에 스며드는 슬픈 근심이나 시름이다. 내가 오랜 시간 해결하지 못한 채 끌어안고 있던 애수는 다름 아닌 존재였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견딜 수 없이 슬픈 시름이었다. 존재해서 슬프고 슬퍼서 존재하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인간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외로움이 있었다. 자우림의 노래 <샤이닝>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이유도 없는 외로움, 살아있다는 괴로움’. 샤이닝은 마치 나의 애수를 함축한 노래 같다. 존재에는 이유가 없다.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만 있을 뿐. 너무 자명해 더할 것도 덜어낼 것도 없는 이 명제가 살아온 내내 나를 외롭고 괴롭게 했다.


  그렇다고 평생을, 남은 생 전부를 존재의 고통 속에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슴에서 애수를 지우려 셀 수 없이 많은 시도를 했다. 그 덕분에 절망의 소용돌이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듯했던 날들도 있었고 고요한 망망대해에 놓여 모든 것이 없던 일처럼 느껴지던 날들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의 일기는 이런 문장을 담고 있다. ‘오래 공들여 켜켜이 쌓아온 다짐과 여러 장치들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고 순식간이었다. 원래부터 그렇게 태어난 것처럼 또다시 수도 없이 죽고 싶었다. 아니 딱 한 번만이라도 죽고 싶었다.’


  지겹고 지쳤던 간밤이 무색하게 아침은 다시 밝는다. 도돌이표처럼 언제나 무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존재의 의미를 찾아 헤맸다. 내가 왜 사는지 답을 찾지 못했고 그래서 사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꼈었다. 그러던 중에 영화 한 편을 봤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영화로부터 삶에 대해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내가 가치를 두는 바로 그것이 내 삶의 이유’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존재의 의미는 없다.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모두 똑같은 모양으로 살고 있을 테다. 그러나 애초에 삶의 의미라는 것은 없기 때문에 각자가 정하기 나름이다. 내가 한평생을 찾던 존재의 의미는 애초에 ‘의미 없음’이 답이었다.


  내 인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제야 마음껏 표류하기 시작했다. 두둥실 흘러 다니는 인생은 이전과 비교하자면 이루 말할 수 없이 편안하다. 내가 오랫동안 쥐고 있던 애수(哀愁)는 친수성, 즉 애수(愛水)였나보다. 어느샌가 슬며시 물에 녹아들어서 더 이상 날 힘들게 하지 않는다. 언젠가 다시 외로움과 괴로움이 찾아온다고 해도 크게 문제 될 것 없다. 드디어 삶의 중심을 잡는 법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 삶은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대상만이 의미를 갖는다는 것. 내가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 존재의 의미를 잃고 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존재하며 살고 있다.


2025년 3월 4일

서울 남가좌동에서

화요일 연재
이전 11화 아이리스 : 좋은 소식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