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목에서 만난 노래 - 김광석 '이등병의 편지'
햅쌀로 밥을 해 먹는데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쌀밥이 너무 맛있었다. 나는 단박에 신세 진 친구 두 명에게 쌀 한 말씩을 보냈다.
“너무 맛있어서 나 혼자 먹을 수 없어. 농부 동생이 지은 유기농 햅쌀이야.”
내 동생, 농부이며 목사님. 글도 쓰고 기타도 치고 농기계도 수리하고, 농막도 짓는 다재다능한 사람이다. 동생 내외나 조카들과 만나면 지나간 시간의 추억이며, 사는 이야기며 이야기꽃이 피지만 내게는 두 가지 이야기가 특히 맴맴 돈다.
80년대 5공 시절, S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동생이 경찰서에 갇혀 있다고 했다. 학교에서 시위를 하다 잡혔다는 것이다. 어머니와 나는 허겁지겁 경찰서로 달려갔다. 하룬가 이틀 동생이 집에 오지 않아 걱정하고 있던 차였다.
그때 동생은 대학 2학년이었다. 대학을 입학 하고 나서부터 사회과학 서적을 열심히 읽었고 써클(동아리)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예민한 양심을 지녔던 동생에게 당시의 정치 사회 상황은 무너뜨려야할 성벽 같았으리라. 그랬기에 앞서 시위에 참여했고, 주동자급으로 지목되어 잡혀 들어갔던 것이다.
당시엔 시위하다가 잡히면 남학생의 경우에 군대로 직행이었다. '강제징집'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다반사로 행해지던 시절이었다. 동생은 군목(군인목회자) 시험엔가 합격된 상태여서 대학 뒤 조금 편안하게 군대 생활을 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하는 게 자신이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에도 보탬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모든 것들은 물거품이 되고 단 하루만에 군대 징집이 결정된 것이다.
경찰서로 끌려가며 많이 맞았던가보다. 또 조사를 받으며 많이도 시달렸던가보다. 동생의 얼굴은 부석부석해져 있었다. 형사가 말했다. 내일 입대라고.
어머니와 나는 얼이 빠진 사람처럼 그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때 어머니 가슴은 무너지고, 바삭바삭 타들어갔을 것이다.)
다음 날 새벽, 나와 동생의 여자 친구가 동생을 배웅하러 경찰서 뜰에 섰다. 어머니는 뭘 가냐며 그냥 출근하셨다. 그 미어지는 슬픔을 혼자 가누시려고 그랬겠지.
동생은 검은 차에 실려 군대엘 갔다. 다른 사람들은 입영 열차를 타고 가건만 동생은 경찰의 검은 승용차에 실려 그야말로 군대로 '끌려'간 것이다.
이야기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승용차에 실려 가던 동생은 차의 뒷유리로 고개를 돌려 여자친구(지금은 그의 아내인)와 나를 보았다. 아아, 짧은 일별. 내가 살아온 인생의 길목에서 만난 가슴 저미는 장면들. 그 중 하나로 기억되는 동생의 그 얼굴.
나는 허탈함을 느끼며 서 있었다.
또 한 가지 일이 떠오른다. 오래 전 나는 학익동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동네를 자주 들렀었다. 철창 안에 갇힌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세상과 단절된 그곳에 살고 있던 그 사람은 바로 동생이었다.
동생이 어느 날인가 훌쩍 집을 떠나 몇 달 동안 연락이 없었다. 노동자가 되어 부평 쪽 어딘가에 있다고 했다. 강제 징집으로 군대에 갔다 와서 복학을 앞둔 얼마 뒤였다.
학기가 한참 지난 뒤에야 (학교에 다니라는 말을 할 수 없을 때가 되어서) 금형 노동자가 되어 일을 배우고 있노라며 연락을 했다.
얼마 뒤 동생이 경찰서에 끌려갔다는 연락이 왔다. 이미 노동조합과 관련되어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되었던 동생이 그 동네 다른 회사의 노동쟁의를 거들었다는 '3자 개입 금지조항' 위반 혐의로 끌려간 것이었다.
경찰서에 있다는 동생을 보러간 날, 나는 이른바 '구사대'의 각목에 맞아 팔이 뿌러진 채 철창 안에 있는 동생의 초췌한 모습을 보아야 했다. 동생은 구속 영장을 받고 학익동 구치소로 옮겨갔다.
노동조합 결성을 막느라 각목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을 고용한 사장은 무죄가 되고, 어린 여자 노동자들이 폭력 앞에서 떨고 있는 걸 보다 못해 끼어든 사람들은 죄인이 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 이후 몇 달 간 우리 가족의 울분은 가족만의 것이 아니었다. 동생을 면회하러 다니면서 나는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힘겹게 싸우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무료로 노동자의 변론을 맡아 하는 변호사를 만나기도 했고, 노동단체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들도 만났다. 죄인 아닌 죄인으로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도 알았다.
내 나름대로 할 일을 찾느라 여기 저기 노동단체를 찾아다니고, 노동자 신문에 글도 쓰고, 가족 이름의 호소문 비슷한 유인물도 만들어 여기저기 갖다 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에서 검문에 걸린 적이 있다. 이른바 불온 유인물(실은 가족의 호소문)을 잔뜩 갖고 있던 나는 버스에서 내려야 했고, 검문소인지 군대인지 잘 생각나지도 않는 곳에서 소위 계급장을 단 어떤 사람과 마주했다. 유인물과 내 얼굴을 번갈아 살펴보던 그 사람은 몇 마디 물어본 뒤 나를 보내라고 군인들에게 지시했다. 하찮은 일을 문제 삼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고, 젊은 군인이기에 뭔가 생각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후자였었다고 믿고 싶다.
동생이 재판 받던 날 가늘게 이어지던 어머니의 울음. 우리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일이 거의 없던 어머니. 기브스를 한 채 재판정에 나온 아들을 보며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셨을까. 어머니는 울기만 하지는 않으셨다. 그 재판정 여기저기 모여 앉아 있던 회사 사람들(가해자들)을 향한 분노의 끈도 늦추지 않으셨다.
가끔 나는 내 인생의 슬픈 순간들을 헤아리다 보면 가슴 미어지던 그 때 그날 일도 떠오른다. 철창 안의 동생에게 바깥 이야기 5분 동안 전해주려고 학익동 구치소 대기실에 앉아 있던 나의 그 여름도 생각난다.
그리고, 강제로 군대 끌려갔을 때 힘겨움을 내색하지 않고 최전방의 군대 생활을 전하던 동생의 편지 한 구절을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기억한다.
"누나, 결코 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던 봄이 최전방의 혹독한 겨울을 녹이고 있습니다. 나무에 물이 오르고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납니다. 산에는 어느덧 아지랑이가 아른대고 있습니다. 슬픈 땅가름만 없다면 그런대로 이 아름다움에 취할 수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 "
제목 사진: 픽사베이, HeungSoon님의 이미지
김광석 ‘이등병의 편지’
https://www.youtube.com/watch?v=EdIEZFrRlq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