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수많은 꿈이 있었지

삶의 길목에서 만난 노래 - 양희은 '그리운 친구에게'

by 작은노래


진정한 의미에서 나의 대학 시절은 학보사(대학 신문사)와 함께 시작된 것 같다. 만일 학보사 기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해서 뭔가 인정받는 그럴싸한 직업을 갖는 일, 평범하고 세속적인 연애나 결혼, 진부한 신앙심 등에 관심을 쏟으며 살았을 지도 모른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학보사 기자가 되지 않았더라도 사회에 대해 고민하며 살았을 지도 모르지만 그 치열함의 정도는 한참 낮았을 것 같다.


학보사 기자 생활은 인생을 두고 잊지 못할 경험들을 주었을 뿐 아니라 잊을 수 없는 친구들을 만나게 해주었다.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대학 신문 기자가 되었다는 은근한 자부심을 안고 처음 만난 학보사 동기들. 그 여덟 명은 그 이후 많은 날들을 함께 했다. 함께 고민하고, 함께 공부하고, 함께 일하고, 함께 역사의 현장을 지켜봤다.


우리 기 친구들은 2,3학년 선배들에 비해 조금은 평범한 듯 했다. 물론 우리 기 친구들도 이런 저런 면에서 빼어난 면을 갖고 있었지만 대부분 그리 튀는 성격이 아니었다.

우리보다 두 기 앞선 선배들은 지적인 면에서 상당히 빼어났다. 우리가 학보사 수습기자로 들어갔을 때 3학년으로 편집장, 부장 등을 맡고 있던 선배들은 대부분 부유했고, 전공 성적도 우수했다. 성격도 조금 유순했던 것 같다.

바로 위 선배들은 조용한 3학년 선배들과는 달리 기가 좀 셌다. 거침없고, 상당히 진보적이고, 당당했다. 그 모습이 후배인 우리에겐 독선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아무튼 우리 기 친구들은 바로 위 선배들이 조금 어려웠고, 친근감을 느끼기가 힘들었다.


우린 선배들이 엮어준 팀에 들어가 사회 과학 공부도 하고, 우리끼리 모여 책을 읽고 토론하는 이른바 '세미나'를 계속했다. 가끔 연습 삼아 기사를 써서 제출했다가 자존심이 조각나는 기분을 느끼며 선배들의 비판을 듣기도 했다.

암울한 시대 상황을 함께 고민하기도 했지만 학보사 기자들의 성격이 그러하듯ㅠ(일반 기자들도 마찬기지만) 운동권과는 조금 달랐다. 이른바 양심 세력 정도였다고나 할까.


대학 들어가서 내가 처음 데모라는 걸 했던 날도 이 친구들과 함께였다.

인문대 잔디밭에 시위대가 모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혼자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흔들리지 않게 우리 단결해."라는 노래가 울리며 학생들이 경사진 잔디밭으로 모이고 있었다. 나는 처음 겪는 일이라 잠시 당황해서 우왕좌왕했다. 그때 내 눈에 H가 보였다. 조금 의외였다. 물론 H가 거기 끼지 않아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런데 상당히 적극적으로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거였다.


학교의 기대감이 싫고, 부담스러워 성적이 넘치면서도 우리 대학을 선택했던 친구다. 첫 미팅 친구를 계속 만나 사귀다가 결혼한 언니를 이상형처럼 말하기도 하고, 귀족적인(?)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고, 상당히 세련된 옷차림과 말씨 등으로 촌닭 같은 나를 놀라게 했던 H가 아닌가.

H는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잠시 망연자실 서있던 나는 원병을 만난 듯한 기분으로 H옆에 가 앉았다. 그리고 이어 N도 왔다.


우리는 조금은 경쟁심을 갖고 서로의 기사를 저울질해보기도 하고, "어디로 모여."라는 선배의 귀뜀이 있을 때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곳을 얼쩡거리다가 시위대에 머리 하나 보태기도 하고, 우리의 여린 정신을 단련시키는 책들을 읽고 약간은 자기 것이 되지 못한 말들을 대사처럼 읊어대기도 했다.


학보사 친구들 중 나는 N과 가장 친했다. 거침없고, 뭔가 카리스마를 지닌 N의 그 솔직함, 뜨거운 열정…. 역시 나는 '차가운 이성보다는 뜨거운 감정이 앞서는 과'에 속하는 인간이었던 것 같다. N에게서 나는 따뜻한 가슴을 느꼈다. 물론 N이 이성이 약하거나 지성적이지 못한 그런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똑똑했고, 재주가 뛰어났다. 그러나 그에 앞서 인간을 느끼게 해 준 것이다.


아무튼 나의 대학 1,2학년은 그 친구들과 '더불어' 지나갔다. 긴 휴교를 함께 겪고, 함께 모여 선배 욕도 하고, 함께 미팅도 하고, 함께 공부도 했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5월 17일 저녁 무렵에도 우리는 함께였다.


그날, 2학년이던 우리는 3학년 선배들과 '지하신문'이란 걸 만들고 있었다. 손으로 일일이 써서 만든 필사본 신문이었다. 정상적인 학보에는 민주화 시위의 열기를 제대로 담아낼 수 없었다. 학보에 실린 학생 기자들의 기사는 끄떡하면 문제를 일으켜 '배포중지'라는 황당한 일을 맞아야 했었다.

오랜만에 감정까지 다 실어가며 기사를 써대는 우리는 가끔씩 우스개소리도 주고받았다. 필사본 신문을 만들어 배포한 뒤 우리에게 닥칠 지도 모를 온갖 시련(?) 은 별로 심각하지도 않았다.


그때 창밖으로 이상한 그림자가 비쳤다. 학보사 앞의 건물 유리에 비친 사람들의 모습이 학보사 유리창을 통해 보인 것이다. 군화였다. 군인들이었다. 군인들이 학교에…. 그리고 학생들이 여기 저기 모여 울먹이는 모습도 보였다.

누가 먼저 그것을 보았는지 모르겠다. 그날의 그 숨막힘, 경악….

"빨리 숨겨."

방석 커버를 벗기고 그 안에 쓰던 기사들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


그날 우리 학교에서는 전국의 대학 학생회 회장단 회의가 있었다. 민주화의 열망이 드높던, 그래서 어찌 보면 불안과 혼란을 느낄 수도 있는 시기에 군인들이 대학 안으로 들어온다? 계엄령?! 그건 민주화의 흐름을 역류시키는 무서운 사건이었다.


숨어있던 우리는 경비 아저씨를 앞세운 군인들에게 끌려나왔다. 학생회장들을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학교에 남아 있던 학생들 중 몇 사람이 차에 실렸고, 또 한 무리는 놀라움과 분노로 울먹이며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학보사 선배 두 명인가도 실려 갔고, 모여 있던 학생들은 해산을 당했다.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마음을 졸이던 우리는 선배 두 명이 풀려났다는 이야기만 듣고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야 했다.


긴 여름을 보낸 뒤 우리 기는 총사퇴를 했다. 시청으로 조판된 신문기사를 들고 가서 검열을 받고, 우리가 쓴 기사가 뭉텅뭉텅 들려나가는 일을 계속 겪을 수는 없었다.


개강 얼마 전 우리는 선배들과 엠티를 가서 '해야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할 바에는 사퇴하기로 하자'는 결단 비슷한 약속을 했었다. 그러나 사퇴는 우리 기 친구들만 했다. 의아했다. 왜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인지? 그 상황에서 신문을 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지? 서슬 퍼런 5공 시절에 무슨 대학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것인지? 굽으려면 차라리 부러지지. 그때 나나 내 친구들의 생각은 그랬던 것 같다.

아. 그때 H의 모습이 난 좋았다. 단호하게 "우리가 여기 남아서 뭘 할 수가 있냐?"고 말하던 그의 모습. 그의 강경한 태도에 미련도 조금 갖고,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품고 망설이던 친구들도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물론 그 이후 우리가 더 의미 있는 어떤 일들을 한 것도 아니다. 총사퇴가 뭔가 기여했다거나 의미를 크게 남긴 것도 아니다. 살면서 우리가 택해야하는 대의명분이라는 게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남아 있던 선배들이 틀렸다고 말할 자신도 없다.)


우린 그렇게 학보에 사퇴 기자의 이름을 남기고, 학보사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약간의 소문을 남기고 흩어졌다.

그 이후에도 우리는 가끔 모였다. 함께 했던 시간과 함께 했던 선택이 우리를 이어주었다. 조금 시대를 아파하는 대학생으로 남은 대학 시절을 보냈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삶은 어찌 보면 진부하다….

학보사 기자 출신 모임 때 저녁밥 지을 걱정을 하며 일찍 자리를 뜨던 대선배를 보며 눈이 휘둥그래졌던 우리들. 이름을 드날리던 기자나, 사회운동가, 존경받는 학자…. 뭔가 그럴듯한 이름으로 사는 선배들만이 제대로 된 학보사 기자 출신이라는 생각을 했던 어린 우리들….


전체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 H는 1학년 때 미팅으로 만나 줄곧 사귀던 의대생과 결혼했다. 군의관 남편 근무지 따라 옮겨 다니다가 대학 강사도 그만두었다. 잡지사 기자로 잘나가던 N도 1년 만에 갑작스레 결혼하고 전업주부로 살기 시작했다. 활동적인 N이 살림만 하며 잘 살 수 있을까? 잘 살았다…. 물론 임신 6개월의 몸을 이끌고 남편 회사의 노조 농성장을 찾아 사장 면담을 외치던 열정, 참교육 학부모회 지역 회장을 맡아하던 참여 정신…. 여전히 그의 가슴에는 뜨거운 것이 넘실거렸고, 그의 재주 역시 녹슬지는 않았으나, 그 칼을 그냥 품고, 품고 살다가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며칠 전 N이 문자를 했다.

우리 부조리한 상황이 담긴 다큐 영화 한 편을 보았다고, 자기 과 친구들이 모인 단톡방에 ‘열불난다’ 올렸다고, 아무 대답 없이 썰렁했다고, 세월이 흘러 잘나가는 그 그룹 친구들은 고급공무원에 친정부 인사 등등 이름 짜한 사람이 되었거나 그 부인이 되었다고. 그냥 성향이 다름을 인정해야겠노라고.


그리운 N! 여전한 너, 가족들과 먼 곳에서 크고 작은 세파를 겪으면서도 지치지 않는 너. 내 친구!

오늘 나는 몇 년간 만나지 못한 친구들의 이름을 자꾸 불러보며 그 시절, 그 얘기를 되새긴다. 어쩜 나나 친구들은 세상을 향해 퍼져나갈 노래의 길을 찾지 못했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 시절의 뜨거운 정신이 그저 가슴 속 추억으로만 잠겨 있다고 생각하며,


양희은 '그리운 친구에게' -오래 전 양희은 님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있어 링크해 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A3mAr8HLM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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