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목에서 만난 노래 - 김종찬 '산다는 것은'
예전에 길을 걷다 보면 따라오며 이야기좀 하자는 사람이 가끔 있었다. 거리를 걷다 보면 만나곤 하는 도 닦는 사람들(?).
바쁘다며 그냥 걷는데 자꾸만 말을 건다.
"얼굴을 보니 삶의 짐이 많은 분이네요."
대답 없이 그냥 피식 웃으며 걸음을 재촉하면 그들도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삶의 짐. 그들이 던진 말이 가슴에 남는다. 우연히도 요즘 내가 쓰려던 글이 삶의 무게, 삶의 짐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중얼거렸다. 그래요. 삶의 짐이 많아요. 무거워요. 그러나 누군들 그 짐을 안 지고 살까요. 사람들에겐 누구나 삶의 짐이 있고 육중하게 다가오는 삶의 무게가 있지요.
세상에 대해 자신감이 넘치던 이십대. 여자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던 그 시절 우리 어머니를 보며 다짐하곤 했다.
'난, 절대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어린 내가 보기에 엄마는 너무나 힘겨워 보였다. 대가족의 맏며느리. 시집 와서 수십 년 동안 시누이 시동생 뒤치닥거리, 끊일 새 없는 군식구…. 안정된 직장을 박차고 가업을 잇겠다고 나선 아버지의 뒤치닥거리는 또 어땠는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네 남매를 데리고 힘겹게 헤쳐 온 세월은 또 어땠는가.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난 삶의 짐을 그렇게 무겁게 매달고 살지 않을 거야.
그러나, 감히 어머니에게 비교할 수 없지만 나 역시 삶의 무게를 느끼며 살았고, 살고 있다. 하늘은 내게도 짐을 주셨다. 엄마가 졌던 짐에 비해 한없이 가볍지만 내겐 역시 무게를 느끼게 하는 삶의 짐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나의 형제(4남매)들. 다 개성이 강하며 각기 다른 인생관을 지녔고 사는 방식도 다르지만 모두에게 삶의 짐이 있다.
겉으로 보면 별 걱정거리 없이 잘 살아가는 듯 보였던 언니. 안정된 직장과 윤택한 살림살이. 단출한 가족. 그러나 교사였기에 맞벌이를 하며 두 아이를 키우느라 학교와 집 사이를 개미 쳇바퀴 돌듯 왔다 갔다 했다. 형부가 지방 발령을 받아 근무했던 몇 년간 생활의 무게가 힘겨웠던지 몸이 심하게 아픈 적도 있었다.
“이제는 여행하고 좀 쉬면서 여유롭게 살아야겠어.”
아이들도 다 자라고 형부도 퇴직을 한 다음 언니는 멋진 인생 후반부를 꿈꾸며 조금 빠른 퇴직을 했다. 그리고 유럽 여행을 한 차례 다녀왔다.
그런데 인생엔 왜 그리 예측하지 못하는 함정이 있는 걸가. 퇴직 몇 개월 뒤, 단 4개월 뒤 형부가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어느 정도 회복하기까지의 몇 년. 병원이 자기 집이었다가, 집처럼 드나들었다가, 정기적으로 통원하는 생활로 이어졌다.
“내가 웃을 수 있는 날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어. 지난 몇 년 동안. 물론 지금도 내가 형부 챙겨줘야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정말 가벼워졌지.”
보름 간의 외국 여행도 몇 년째 망설여야 하지만 그래도 한숨 돌렸다고 말하는 언니.
신학도로 예민한 양심을 지닌 막내 동생. 공장 노동자 생활을 거쳐 뒤늦은 복학. 민중교회 목회자가 가야할 청빈한 삶. 농촌에서 땅을 일구며 농부의 삶도 겸해 산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늘 감사하며 살지만 가끔씩 그에게 다가오는 삶의 무게가 가볍지만은 않을 것이다.
대기업의 유능한 사원을 거쳐 외국 회사의 이사로 승승장구, 빠른 출세길을 달리던 큰동생. 예전엔 솔직하고 거침없는 성격, 자신만만한 태도 때문에 낯선 사람들은 그를 거만한 사람으로 느끼기도 했었다. 어릴 때부터 그 동생은 나의 '강적'이었다. 예닐곱 살 즈음부터 나보다 키가 커진 동생은 무척 개궂었다. 나 역시 내 맘에 안 맞는 것은 못참아서 말로 다다다닥 따지다 보면 말이 막힌 동생은 주먹으로 나를 쿵쿵 때리고 도망가곤 했다. 조금 철이 들고 나서는 깍듯이 누나 대접을 해줬지만 곰살맞은 동생은 아니었다.
그러나 큰동생 역시 내면의 부드러움을 가진 사람이다. 동생이 중1때인가. 내가 편지 한 장을 건네준 적이 있다. 뭔가 충돌이 있던 다음이었으리라. 뭔가 누나로서 당부하고 우애를 다지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 편지에 대해 아무런 말도 없기에 읽고 아무데나 뒀으려니, 혹은 버렸으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한참 뒤에 교복 안주머니에 곱게 간직한 그 편지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아무튼 자신만만하게 살아가던 동생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크고 작은 시련이 많았겠지만 내가 본 그의 첫 시련은 초년 회사원 시절에 일어났다.
식품공학을 전공하여 식품 회사 연구실에 근무하던 시절 동생이 사고를 당했다. 기계에 손가락이 빨려 들어가 끝 부분이 절단된 것이다. 실의에 빠져 돌아온 동생을 보며 왜 그렇게 가슴이 아리던지. 나는 그날 '삶의 무게가 버겁기는 화이트칼라나 블루칼라나 똑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난 그때 대학 시절에 불렀던 노래(프레스에 손가락이 잘린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를 떠올렸다.
동생의 두 번째 시련은 이른 나이의 퇴직이었다. "이제 사장만 되면 돼."라고 웃던 동생이 회사를 그만두게 된 것이다.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그 외국 회사는 영업 실적의 책임을 물어 동생을 물러나게 만들었다. 오랜 절치부심 끝에 그는 작은 회사를 탄탄하게 운영해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힘겨웠을까?
그는 집안의 장손이다. 그는 무형, 유형의 책임감을 느끼며 살았을 것이다. '잘 나가는 회사원'의 길을 택한 것은 그의 성격 탓도 있겠지만 장남으로서의 책임감도 일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어머니를 오랜 세월 모시고 살았고, 지금도 어머니 수발을 위해 엄청나게 애쓰고 있다. 외화 환율이 오르는데 요즘 사업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잘 버텨 봐야지.”
요즘 괜챦나고 묻자 그렇게 대답한다.
문득 고등학교 시절 문학 참고서에 읽었던 '배'라는 시가 떠오른다.
<배> 지셴(紀弦)
저 배 바다를 산보하고
난 여기 파도 흉용(洶慂)한 육지를 항행(航行)한다.
내 파이프 자욱이 연기를 뿜으면
나직한 뱃고동, 남저음(男低音) 목청.
배는 화물과 여객을 싣고
나의 적재 단위는
`인생'이란 중량.
우리 형제들에겐 모두 묵직한 삶의 무게가 있다. 그들의 삶에 깊은 사랑과 우애를 느낀다. 그들이 지고 있는 삶의 무게에 또한 공감한다. 피를 나눈 형제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삶의 무게를 느끼며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흐르는 '연대감'일까?
갑자기 큰동생의 손가락을 보고 싶다. 조금 기형이긴 하지만 많이 아물어, 놀랍게도 손톱까지 나온 것을 본 적이 언제더라. 그 손가락은 삶의 짐과 희망을 동시에 말해주는 지도 몰라.
내 삶의 짐? 무거워. 하지만 잘 지고 갈 거야. 이 짐이 곧 삶인 걸.
“내 어깨 위로 짊어진 삶이 너무 무거워
지쳤다는 말조차 하기 힘들 때 다시 나의 창을 두드리는
그대가 있고 어둠을 가를 빛과 같았어“
노래 한 구절이 맴맴 돈다.
김종찬 ‘산다는 것은’
https://www.youtube.com/watch?v=Rd0vyGFJAK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