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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나무 May 25. 2024

뭐든 때가 있다니까요!

50년 만에 고사리 꺾기

“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 아쉬움이 쌓이는 소리,

내 마음 무거워지는 소리….”

무겁게 가라앉는 일요일 밤과 월요병을 앓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쩌면 이렇게 잘 담았을까?

들을 때마다 감탄한다.

    

3월부터 나의 월요일 아침의 풍경이 달라졌다. 깔끔한 옷차림과 출근 가방 대신 기능성 산행 복장과 등산 가방으로 필수 아이템이 바뀌었다. 주말에 늦게까지 일하고 월, 화요일에 쉬는 남편과 산으로 들로 떠난다. 평일 여행은 주말여행과 전혀 다른 분위기와 색채를 띠고 있다. 어디를 가든지 한적하고 여유롭다. 산이나 섬 전체를 우리가 전세 내거나 독점한 것 같다.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산이나 해변에 가면 몇 명이나 만날지 남편과 내기할 정도로 마주치는 여행객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어떨 때는 극장이나 영화관 전체를 전세 내어 프러포즈하는 연인들처럼 우리만의 호젓함에 취하기도 한다. 넓은 자연을 한적하게 오롯이 누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4월 중순, 우리 여행지는 부드러운 소나무 숲길이 인상적인 태안 지역이다. 해변 트래킹은 내가 좋아하는 코스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기분 좋게 바다와 흙길을 걸을 수 있다. 오늘은 날이 흐리고 비가 자잘 자잘 내린다. 해변 트래킹은 이런 날도 무리 없이 걸을 수 있어 좋다. 바다 내음 가득한 해수욕장이나 모래사장을 만나면 신발과 양말을 벗는다. 지구 어머니와 가장 친근하게 만나는 맨발 걷기를 즐긴다. 4월의 모래는 조금 쌉싸름하고 시원한 느낌이다. 발바닥을 통해 온몸으로 전해오는 은근하고 조금 거친 느낌이 참 좋다. 짭조름한 바다 내음, 은은한 솔향에 취해 걷는 길, 아, 그곳에서 뜻밖의 선물을 받을 줄이야.

간조로 물이 빠진 바닷가 거친 바윗길을 탐사하듯 한 바퀴 돌고 나서 산 코스로 올라 내려가는 길이다. 새싹과 어린잎들이 새로 돋아나 있어 산 전체가 봄으로 꽉 찬 느낌이었다. 풀이 우거진 길가에 누렇게 말라 있는 고사리 무더기가 보인다. ‘혹시?’ 하며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수줍게 올라온 어린 고사리가 눈에 띈다. 주변을 더 두리번거리면서 포동포동한 고사리를 하나둘 찾아낸다. 깊은 산속에서 헤매지 않고도 내려가는 길목 군데군데에 작고 어린 고사리가 올라와 있었다. 기쁨에 차서 눈을 반짝이며 하나씩 꺾으니 한 끼 반찬 정도가 된다.

와, 이런 횡재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오래 못 본 친구를 만난 듯 기뻤다. 거의 50년 만에 어린 시절의 기억을 소환한 건 덤이다.     


어린 날, 젊은 엄마랑 고사리를 꺾으러 갔다. 비가 많이 내린 뒤끝이라 산은 부드럽고 조금 축축한 느낌이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 이것 좀 보세요. 고사리가 엄청나게 통통해요.”

“고사리 장마가 온 거여. 살살 조심조심 다녀.”

야무진 줄기를 올려 여기저기 쏙 쏙 올라온 고사리가 제법 보인다. 그리 높지 않은 산등성이는 오동통하게 물이 오른 고사리 밭이다. 고사리 줄기 아랫부분을 꺾으면 툭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잘리는 그 느낌이 참 좋았다. 신이 난 나는 강아지처럼 뛰어다니며 고사리를 뚝뚝 꺾었다. 엄마는 찬찬히 한 곳에서 진득하게 머물렀다. 발견하는 재미, 꺾는 재미가 솔솔 했다. 바구니에 가득 찬 튼실한 고사리를 보니 아주 부자가 된 듯했다.

어린 시절 기억은 별로 남아있지 않는데, 엄마와 고사리 꺾으러 간 날의 기억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엄마, 다음에 또 가요.”

“다 때가 있는 법이여. 아무 때나 간다고 고사리를 찾을 수 없는 법이지. 세상일이 다 그려.”

 엄마의 그 대답을 이제는 알 것 같다. 시장에서 생고사리를 보거나, 말린 고사리나물을 먹을 때면 그 기억 속으로 들어가 마음 한구석이 아련하게 젖곤 한다.     


남도의 깊은 산골에서 자란 나에게 산은 무척 친숙한 공간이다. 부지런을 내어 새싹이 돋아나는 봄에 산에 가면 산나물들이 참 많다. 자연 속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수렵 채취인의 유전자가 더 강하게 발동하는 듯하다. 때를 따라 저절로 자라나는 자연물을 찾아 먹는 재미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아는 사람 눈에만 보인다. 나도 먹을 수 있는 산 열매나 산나물을 조금 알고 있는 편이다. 다른 산나물에 비해서 고사리는 나에게 특별한 추억과 그리움이 담겨있다. "고사리는 아홉 형제다."라는 재미있는 말이 있다. 고사리 포자가 떨어진 곳에서 봄철에 아홉 번이나 다시 돋아난다고 해서 나온 말이다. 고사리가 많이 나는 제주도 사투리다. 고사리는 한번 자란 곳에서 계속 돋아나기 때문에 그 장소를 잘 아는 사람들은 해마다 그곳을 찾는다.     


고사리는 처음 가는 길에서 아무 때나 만날 수 없다. 사람들이 붐비는 주말이라면 더욱 엄두도 못 낸다. 고사리가 돋아나는 4월 중순, 인적이 드문 평일이었기에 50년 만에 고사리를 꺾은 횡재를 한 거다. 심지도 않고 가꾸지도 않은, 자연이 키운 선물을 받았다.

‘그래,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다.’

한적한 숲길에서 고사리 꺾기는 퇴사 후 첫 봄에 가장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고사리@여행하는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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