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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Nov 22. 2024

촌사람의 호박 파티

향수?

의외다.

새삼스럽다.

뜬금없이 호박지가 다 생각나다니...

육십 년도 훨씬 넘은 아주 오래전 기억이다.

 혀끝에 남은 미각들이 추억 속에서 홀연 깨어난다.

불현듯 어릴 적 겨울철에 먹었던 호박지가  먹고 싶어졌다.

이게 바로 나이인가 보다.

청승맞다 타박하며 외면했던 뽕짝이 슬슬 땡기는 이게 아마도 나이렷다.


​황해도 식 막김치라지만 호박지는 중부지방 특히 해안가에 접해 사는 충청도 음식이다.

집집마다 이 김치를 넉넉히 담가 항아리 째 땅에 묻어 놓았다.

겨울 동안 매 끼니때마다 꺼내 보글보글

화로나 아궁이 숯불에 김치찌개를 끓여 먹었다.

그렇듯 식구끼리 두레반에 둘러앉아 부산히 숟가락질해 대기에 알맞은 찌개류랄까.

점잖은 상차림에는 어울리지 않는 일반 서민음식인 셈이다.


여늬 김치찌개와는 달리 맛이 구수하면서도 달큰 짭짤하여 국물을 떠먹으면 아주 맛깔스럽다.

특히 갯가 동네인 외가 쪽에선 게국지처럼 밴댕이나 황새기(황석어) 생새우도 듬뿍 넣었다.

게다가 온갖 해물, 이를테면 큼직하게 토막 낸 동태라든가 황발이(농게)나 주꾸미 등속을 넣어 담그므로 영양가 끝내주고 무엇보다 깊은 맛이 결결에 스며들어 있다.


만드는 법은 우선 호박 껍질을 벗겨 먹기 좋게 약간 도톰히 썬 다음에 보통은 김장하고 남은 여줄가리 배춧잎이나 무청을 거둬서 쓰므로 모양새는 제각각 비정형.

거기에다 젓갈과 해물을 넣고는 김장 양념 치대듯 골고루 버무려 항아리에 담아서 꼭꼭 누질러 두었다.

눈 소복 내린 겨울철, 쌓인 눈 쓱쓱 헤짚어 단지 뚜껑 열면 오! 해맑은 얼굴 드러내는 호박지.

사락사락 눈 쌓인 저녁, 잘 익은 호박지를 꺼내서 찌개를 해 먹었다.

겨우내 무시로~ 수시로~ㅎ


호박지는 밥반찬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찐 고구마와 궁합이 잘 맞는다.

고구마와 짝꿍이라면 동치미도 빼놓을 수 없긴 하나 뜨거운 호박지와도 완벽히 조화를 이룬다.

그 생각만으로도 절로 입맛이 다셔지는가 하면 입안에 슬슬 침이 고인다.

수수하고 질박하다 못해 진짜 무지 촌스럽고도 희한한 내 식성이다.

좋게는 향토색이 짙다 할까, 토속적 취향이 강하달까.

미국살이 십수 년째임에도 일편단심 전혀 요지부동인 내 식성.

동절기에 접어들어 날씨가 싼들해질수록 점차 그 맛이 아쉽게 그리워지던 차.

비슷한 맛이래도 좋으니 일단 도전해 보기로 작정한다.


뒤뜰에 조선호박을 심어 여름내 애호박도 따먹고 연한 호박잎 쌈도 즐겼더랬다.

늦가을 호박덩굴을 거두고 보니 구석진 곳에 쌍둥이처럼 나란히, 참하게 늙은 호박이 기다리고 있었다.

핼러윈이 든 시월엔 내동 등황색 장식용 서양호박 대신

 대문 앞에서 보초병 노릇을 하던 청둥호박 두 자매다.

예전에 이런 호박의 용처는 호박죽을 끓인다든지 호박지를 담거나 호박고지 떡을 할 때나 쓰일 뿐.

거개가 툭툭 썰어져서는 한겨울 소 여물통에 들어가기 일쑤였다.

요즘 들어  웰빙식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전에는 푸대접이 여간 아니었으니 이 또한 격세지감.


호박은 늙을수록 당질의 함량이 높아진다고 한다.

호박의 당분은 소화 흡수가 잘 되면서도 당뇨나 비만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으므로
당뇨환자나 일반 환자의 회복식으로 좋고 위점막을 보호하는 기능도 있어서 위장이 약한 사람에게도 좋다고.

비타민A, B2, C가 듬뿍 들어 있으므로 감기 예방에 도움이 되고 특히 겨울 감기에 특효란다.

늙은 호박에는 예민한 신경줄을 다스려주는 작용을 하는 비타민B12가 들어 있어서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

호박씨에는 간을 보호해 주는 양질의 단백질이 들어 있으며 기침이 심할 때 호박씨를 구워서 꿀과 섞어 먹으면 효과가 있다고.

게다가 신경완화 작용을 해 불면증을 예방하며 노폐물의 배출을 촉진시킨단다.

또한 노화 방지에 효과적인 비타민E와 카로틴이 풍부해서 고운 피부를 만드는데도 일조를 한다는 생각사록 대견하고 기특한 호박이다.

단 고혈압이나 간질환으로 이뇨제를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좋지가 않다니 요주의!


마침 둥실하고도 미끈한 청둥호박을 두 덩이나 수확해 놓았겠다, 한번 일을 벌여보기로 했다.

하나는 호박지를 담고 한 덩이는 호박 중탕을 하기로 작정하였다.

이 역시도 난생처음 시도해 보는 일이다.

한 사흘 연달아 내리던  겨울비도 멎고 별로 춥도 않은 날씨라 아침부터 팔을 걷어붙이고 설쳐댔다.


먼저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정보를 모은 다음 부재료를 준비하였다.

산후에 호박탕을 먹어본 바도 없고 만드는 법을 뒷전에서나마 구경한 적도 전무.

그냥 인터넷 검색 결과 참조하며  전통식이니 대충 감으로 만들면 되지 싶었다.

집에 있는 대추, 생강, 감초, 마른 도라지, 꿀을 호박 안에 넣을 요량으로 정히 씻어 물기를 거둬두었다.


호박 중탕은 껍질을 안 벗기니 김치보다는 일이 수월하였다.

베레모처럼 꼭지 부분을 뚜껑 삼아 빙 도려내고 호박 속 정리부터 해줬다.

알뜰하게 씨를 빼내서 말리려고 종이 위에다 펴놓은 후 호박 안에다 부재료를 뒤섞어 넣었다.


큼직한 찜통에 속을 채운 호박을 바로 세워 앉치고 약간의 물을 붓고는 중탕에 들어갔다.

  약한 불에 올려 끓이기 시작한 지 벌써 네 시간째다.

푹푹 김이 오르며 풍기는 냄새가 한약재라도 달이듯 그럴싸하다.


호박 중탕이 완성되면 넉넉히 덜어서 보내줄 벗이 있다.

교우 중에 온종일 서서 일을 해서인지 신장이 안 좋은지 오후녘이면 늘 발등이 도도록이 붓는 호노리나.

반은 그녀 몫이다.

나? 마치 보약 같으니 이거 먹고 호박처럼 둥실둥실 살이나 쪄볼까~



어제 다섯 시간 여 중불에 뭉근히 다린 호박탕을 밤새 식혀 오늘 아침에야 즙을 분리시켰다.

1갤런짜리 통에 두 개, 각기 칠 홉쯤 채워진다

사이좋게 하나는 친구꺼, 하나는 내 몫 ^^


양손으로 싸안아야 할 정도의 아주 커다란 호박이었는데 삼베 보자기로 한약 짜듯이 야물딱지게 짜고 나니 주먹만 한 세 덩어리의 찌꺼기만 남긴다.

위스키 색 아니, 질 좋은 상품의 호박 보석 색깔이다.

약제 맛이 좀 진한 편으로 아주 달큼하니 마실만 하다.

차게 마시는 것보다는 따뜻이 덥혀 먹으면 한방 겨울차로 안성맞춤이겠다.


호박중탕하고 남은 찌꺼기는 거름이 될 거 같아 눈 쌓인 뒤란 텃밭에다 뿌렸다.

내년 봄 서부로 이사 가니 내가 농사를 짓지는 않더라도 얼마쯤 지력을 키워줄 것 같아서..

호박 찌꺼기가 마치, 까치밥으로 남겨둔 홍시 몇 개 눈밭에 철퍼덕 떨어져 앉은 듯하다.

눈은 지금도 흐벅지게 내리고 있다.    

-2013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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