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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 수도 쿠스코, 포도에 반하다

by 무량화


오래전, 이탈리아에서다.


담황색 기와지붕과 반들반들 닳은 네모난 돌 고르게 박힌 포도(鋪道)에 반했었다.

유구한 일월 응축된 플로렌스와 피렌체의 돌길에 무릎 꿇고 엎드려 교황처럼 입 맞추고 싶었으며, 오체투지 경배하고도 싶었다.

그때의 감흥은 수십 년 지난 지금도 가슴 벅차다.



잉카의 수도 쿠스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행기가 서서히 고도를 낮추자 저 아래 질펀하게 엎드린 온유한 황톳빛 지붕들 정겨이 안겨들었다.

호텔에 체크인 후 짐을 두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길바닥마다 단단히 박힌 네모난 돌 편편이 뭉클한 감동으로 반겼다.

좁고도 긴 골목길을 여기저기 걸어 다녔다.

아르마스 광장에 둘러선 쿠스코 대성당과 헤수스 교회와 시청사 건물도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으로 내게 눈인사 청했다.

객지 떠돌다 뒤늦게 돌아온 고향처럼 쿠스코 하늘과 산, 집과 사람들까지 다들 반색을 했다.

낯설지 않은 푸근함이며 묘한 데자뷔 느낌은 그래서 들었던가.

마치 모성의 품 안에 안긴 듯 내 시원의 탯자리에 찾아든 기분이었다.

마주치는 눈길 눈길마다 따스하고 정겨웠다.

그 모두와 마음으로 일일이 진한 허그 나눴다.



여기서의 내 몫은 이러하다.

손자와 동행했기에 골목골목 걸어 다니며 페루에 대해 아는 척은 실컷 한 터.

여기서는 다시 쿠스코의 영광 찬란했던 태양 제국 역사나 정복자들에게 어이없이 침탈당한 오욕의 수난사 늘어놓지를 않겠다.

이미 훤하게 다들 꿰고 있는 잉카 유적지 자상스레 거론하며 어설픈 문화해설사 역도 맡지 않겠다.

저 돌들 어디서 와 여기 박히게 됐는지, 옛 옛적 관등성명 무엇인지 알아 무엇하리.

고개 숙인 잉카의 후예들에 어설픈 연민 대신 무심하게, 귀농한 은퇴자처럼 뒷짐 쥐고 그저 조용히 스쳐 지나려 한다.

그리고 무의미하게 다가왔다 유의미하게 멀어지는 풍경들 심상에 아로새겨두려 한다.

오래 묵은 흙 내음과 고전의 묵직한 바람결과 비를 품은 안데스의 눅눅한 공기 깊이깊이 호흡해 보려 한다.

더러는 지그시 눈을 감고 투명하면서도 애조 띤 싼뽀니아 선율 영혼의 귀로 누려보려 한다.

세월에 마모된 매끄러운 돌길의 느낌, 사진에 담아 오래오래 추억하고자 한다.

그뿐이다.

쿠스코에 허락된 일주일 동안 세간사 말갛게 지우고 평화로이 걷고 또 걸어보겠다.

쿠스코 길 위에 서서 포도를 바라보노라면 근원 아스라한 소회랄까 회포가 스며들며 따스해지는 이 행복감.


쿠스코 길 위에 서서 포도를 이윽이 그리고 깊이 응시하기.

영원으로 이어질 듯 아득한 길 길 그 길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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