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색이 좋아졌어요!
오래전, 최불암 씨의 어떤 광고에 대충 그런 대사가 등장한 적이 있다.
아직 젊었던 그땐 속으로 웃었다.
그 아재 늙긴 늙었구먼~ 빨간색이 좋아진 걸 보니...
헌데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내 옷장 안에 빨간색이 끼어들기 시작했다.
사주에 불이 많다며 붉은색을 가까이하지 말라던 주의를 들어서라기보다, 있는 듯 없는 듯 매사 담담한 성격대로 옷도 마찬가지였다.
해서 평범하고 무난하니 튀지 않는 색상의 옷을 즐겼던 터.
자기주장이 확실한 빨간색, 어쩌면 용감무쌍 강렬한 그 색을 소화해 낼 자신도 없었다.
미국 할머니들은 빨간 옷을 즐겨 입는다.
대충 입어도 세련되게 잘 어울린다.
곧 자연스럽더라는 얘기다.
하얀 피부가 받쳐주는 때문인지 화려하다기보다 품격있게까지 보였다.
그들과 섞여 산 세월이 길어서 일까, 전염이라도 됐는지 이젠 내가 그런 색상의 옷을 별 망설임 없이 고른다.
전에 없던 일이다.
채도 강한 원색 옷을 입어도 전혀 불편한 줄을 모르겠다.
오히려 침침한 색보다는 노랑이나 빨강, 심지어 핫핑크 같은 밝은 색이 땡김은 그렇게라도 자신을 포장해야 할 나이란 의미일지도.
어쩔수없이 나이를 의식하게 되는, 즉 나이 든 자각인가 싶긴 하지만...
오스카 시상식에서 윤여정 씨가 입었던 암청색 의상이 세간의 화제에 올랐던 적이 있다.
무대에 설 때야 당연히 스타일리스트가 따르긴 했겠지만 평소에도 그녀는 옷 잘 입기로 알려졌다고 한다.
소문난 패셔니 스타인 그녀란 얘기다.
기품 있고 세련된 패션 감각은 물론 캐주얼한 젊은 스타일도 센스 있게 소화해 내는 등 남다른 그녀란다.
실제 그녀는 우아 떨며 고상틱하기 그지없는 귀부인 배역도 척척이다.
한편 돈주머니가 달린 앞치마 두른 시장판 억척 아줌마 역을 능청스럽게 해낸다.
직설적이라 쿨한 데다 내숭 떨지 않고 솔직한 그녀의 화법은 한마디로 담박하다.
연예인답게 자유로웠지만 책임감 강한 그녀의 성격대로 자식들 뒷바라지에 최선 다해 임했다.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배역 가리지 않고 바쁘게 일을 한 그녀.
가장으로 돈을 벌어야 했던 덕에 연기의 폭을 넓힐 수 있었던 그녀다.
새옹지마의 고사대로 그렇게 연기자로서의 깊이를 더해 마침내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쥔다.
시상식 날, 그녀는 심플한 맥시 드레스 차림이었다.
그녀가 그때 착용했던 다이아몬드 이어링과 팔찌, 사파이어 링이 불티나게 팔린다는 기사를 봤다.
무려 16억에 해당되는 고가품임에도 불구하고.
이는 고도의 마케팅 전략에 따른 광고술의 일종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이미테이션에 몰리는 건지 내막을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보통사람들 대다수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따라쟁이들인 게 맞고 전반적으로 숫자도 많더라는 이 사회.
에머슨의 저서 <자기 신뢰>에 '부러움은 무지에서 나온다'라고 쓰여있다.
나 자신의 생각을 믿어 의심치 않아 주관대로 굳건히 밀어붙이지 못하고 어영부영 남 뒤를 쫓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란다.
소위 메이커 제품에 약하고 명품에 사족 못 쓰는 이들의 내면은 글쎄?
따라쟁이 기질 다분해 유명인이 소지한 물건이나 옷, 하다못해 어느 연예인이 들린 곳이 금방 핫해진다는 건 부끄러운 일 아닌가.
오죽하면 어떤 방송인이 먹었대서 소떡인가 핫도그인가를 너도나도 먹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수준이라면 어쩐지 공허하다.
김일성이 방문했기에 북의 무슨 산이 명소가 되듯 어느 명사가 산대서 어떤 장소가 그 지역 명소가 되는가 하면 어떤 연예인이 들렀대서 뜨는 식당이 되는 웃기는 나라.
남을 따라 하려는 심리의 저변엔 분위기에 휩쓸려서라거나 시대 조류에 뒤처질까 불안한 요소 때문이라 한다.
집단주의 문화의 결과이기도 한 아바타 기꺼이 돼보기, 결국은 의존적이거나 정체성 결여에서 나오는 행동이라는 분석이다.
C, D 로고가 부각된 제품에 열광하던 세대가 있었는가 하면 이제 로고를 감추려는 시대가 왔다고 한다.
근자 중국인들이 눈에 띄게 명품 브랜드에 집착하는 행태에 우리는 은연중 경멸을 보냈다.
고성장에 따른 소비 트랜드의 당연한 변화였다.
중산층이 확장되던 한 때 우리도 비슷한 패턴을 보였듯이.
요즘은 경기가 침체되면서 소비심리도 가라앉았다.
자연히 명품 소비 트랜드도 변했다.
MZ세대들이 가성비 트랜드를 선호하면서 듀프 열풍이 불며 슬슬 추세가 바뀌고 있다.
거품이 빠진 실용성 면에서 나쁘지 않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만족하기보다 그간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며 내면의 욕망인 유행을 줏대 없이 좇았던 우리.
단순한 모방심리나 투사 심리도 작용하겠지만 이는 대개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사람들의 특성이라고 학자들은 파악한다.
윤여정 씨 따라 하기는 양호한 편으로, 범죄자가 들었던 지갑조차 유명세를 타 실시간 검색어 1위 되는 사회는 왠지 영 뜹뜰하다.
아무튼 그날 단아한 그녀 옷차림에 자극받아서인가.
문득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옷차림은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사적이든지 공적이든지 T.P.O(time, place, occasion)는 옷차림의 기본에 속한다.
자리에 맞는 매무새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으면 보수적으로 입는 게 무난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뒷전으로 물러난 은퇴자의 삶에 대외적으로 중요한 모임이 잦은 것도 아니다.
물론 대인관계 시 외형부터 대면하기에 절로 눈이 가닿는 게 상대방의 외면이다.
하지만 정확히는 타인의 외적 치장에 거의 관심없는 사람도 상당수인데 더러는 제 잣대로만 유추해 보는 게 문제다.
화려한 보여주기식 SNS에 과도하게 몰입하다 보면 자신만 초라하게 느껴져 짐짓 의기소침에 빠지는 경향도 없잖은 현 세태다.
제각기 바쁜 세상, 저마다 자기 일하며 자신 돌보기만도 바쁘거늘 누군가가 내 외양을 주시할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고 오버다.
삶은 자신을 위한 것이지 남에게 그럴싸하게 보여주기 위한 쇼가 아니므로 허세 부릴 까닭이 없다.
시간과 장소, 상황에 따라 옷을 가려 입을 줄 알아야 한다면서도 어느새 편안한 차림새에 길들여졌다.
남을 의식하지 않는 편인 데다 옷차림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소탈한 성격이라 주로 편한 옷을 선호한다.
염색이나 파마를 안 하니 미장원 갈 일도 없는 터, 적당히 자른 생머리 질끈 묶어 옷에 맞는 모자를 골라 쓰고 다닌다.
공적인 자리에 참석할 때도 모자는 당연히 필수. 이젠 트레이드 마크처럼 굳었다.
단지 성당에서만은 모자 대신 미사보를 쓴다.
비 오는 날 외에는 거의 집에 붙어있질 않으니 매일 외출하는 셈이다.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는 사람답게 옷장도 풍성할 리가 없다.
날씨만 좋으면 여유 즐기며 걷는 게 취미인지라 청바지나 신축성 있는 옷이면 다 오케이다.
미국인들은 나이 들어도 아무렇지 않게 입는 진이건만 한국에서는 나이에 걸맞는 점잖은 옷차림을 은근 요구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 눈치 볼 거 없이 나 편한 대로 입고 다니는데, 사실 산에 가며 걷기 편한 차림이면 그만 아닌가.
하긴 한국인 특유의 비교 심리 때문인지 산행인들조차 고가 등산복을 착용해 마치 아웃도어룩 경연장 같은 산길이더라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