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이 지닌 기운이 왕성한 양기라 하므로 힌번씩 좋은 기운을 받으러 가는 성산일출봉이다.
특히 딸내미가 제주에 잠시 다니러 왔을 때 두 번이나 함께 올랐던 곳이기도 해, 날씨와 먼 거리 상관없이 걸핏하면 오게 된다.
내가 매달 한두 번은 성산일출봉을 찾는 이유라면 이유다.
성산일출봉 정상, 초록물감 쏟아부은 듯한 분화구는 오월에나 만날 수 있지만 삼월 초는 어떨지 보고 싶었다.
천연보호구역인 성산 일출봉은 널리 알려진 바대로 아름다운 경관과 지질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자연유산 및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된 곳이다.
그 언저리에는 봄의 전령사 유채꽃이 여기저기 양탄자처럼 널직 널직 깔려있었다.
산행로 주변엔 으름 꽃이 필락 말랑, 봉오리가 버블 껌처럼 부풀어 있었다.
날씨도 맑지만 대기질 지수 좋음인 데다 가시거리 무제한이어서 아마도 그러하리라.
발치에 있는 성산항 방파제까지 윤곽 그린 듯 또렷했다.
가까운 식산봉 선명하고 바다 건너 우도 역시 확실하게 보였으며 한라산은 아슴하나 우련하게 드러났다.
이처럼 한번씩 뒤돌아 발아래 풍광들 조망해 보며 쉬멍 놀멍 층계를 올라갔다.
높이 182 미터라도 경사도가 있어 약간 숨이 찰 정도라, 시간 셈할 필요 없다 보니 시나브로 올랐다.
드디어 도착한 산정, 사방에서 몰려드는 해풍 어찌나 거센지 날아갈 지경이라 난간을 꼭 잡았다.
눈앞에 빙 둘러 펼쳐진 바다는 청보석처럼 물빛 고왔다.
운두 높은 접시처럼 둥글넓적한 화구 가장자리 돌아가며 솟구친 바위들로 이 빠진 그릇 같은 굼부리.
예상했던 대로 아직은 묵은 풀이 많아 굼부리 색감은 선명하지가 않았다.
푸르른 새 풀잎 윤기 더해질 즈음 다시 와보기로 하고 한달음에 산을 내려왔다.
오후 시간이 널널하게 남기에 오조리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마침 썰물 때라 내수면의 바닷물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제대로 성산 오조 지질 트레일을 걸어볼 만하겠다.
제주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이다.
각 지역의 독특한 지질 자원과 이를 품은 마을이 지닌 역사 및 문화자원을 접목시켜 조성한 지오 트레일(Jeju GEO trail)이 있다.
수월봉 지질 트레일을 비롯 김녕·월정 지질트레일, 산방산·용머리 지질트레일, 성산·오조 지질트레일 코스 등.
이날 성산 일출봉과 오조리, 터진목 등 8.3킬로를 연계해서 만들어진 성산·오조 지질트레일을 걸었다.
한도교라는 성산항과 이어진 수문 다리를 지나 호수처럼 생긴 내수면을 끼고서 오조리에 이르면 조개잡이 쉼터가 열려있다.
썰물 때면 주민들과 관광객이 조개바당으로 바지락을 캐러 모여든다.
그 뒤로 해발 64미터의 작은 오름인 식산봉이 기다린다.
상록활엽수림에 싸인 정상에서 마주 보는 성산일출봉 단정한 모습이 일품이라 발품 마다하지 않고 오르곤 한다.
식산봉 주변에는 염생식물에 가까운 희귀식물인 황근이 서식하는 국내 최대 자생군락지가 펼쳐졌다.
칠월이면 노란 무궁화란 이름대로 노란색 꽃이 아주 산뜻하다.
내수면 위로는 너르게 제방이 나있어서 양편에 바다 거느리고 물 위를 걷는 듯한 운치 맛볼 수 있는 산책로다.
나무 데크길도 이리저리 연결돼 있다.
여기서 북쪽으로 펼쳐져 있는 장방형 양어장이야말로 낯설고도 독특한 풍광이 기다린다.
1961년 오조리 청년들과 부녀회에서 돌을 나르며 마을공동소득을 위해 문자 그대로 피땀 흘려 만들었다는 제방둑이 나온다.
자조·자립·협동을 기치로 한 잘살기 운동이 막 전개되던 시점이었다.
이에 주민들이 나서서 자발적으로 노력봉사 통해 양어장을 만들어 뱀장어 숭어 우럭을 길렀다.
따라서 먹거리가 풍부한 이곳은 차츰 철새 도래지로 유명세를 더했다.
철새만이 아니라 사철, 왜가리 고니 등이 물길에서 먹잇감 기다리는 풍경 흔하게 접한다.
양어장 제방길을 나오자마자 모란 동백을 쓴 이제하 시인의 화실 Z가 마중 나온다.
해풍 거센 물가에 서있는 조그맣고 초라한 두어 칸짜리 돌집이다.
코로나 시국엔 항상 문이 닫혀있다가 겨우 문을 열었지만 원주민들의 요구에 따라 건물을 비워주자 무슨 영화인가 찍으며 촬영지로도 쓰였다.
여길 지나면 튜물러스 지역이 나타난다.
화산섬 제주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튜물러스는 제주말로 빌레에 해당한다.
걸쭉한 용암이 흘러내릴 때 겉은 식어도 내부 용암은 계속 흘러가며 만든 용암 덩어리 표면이 부풀어 올라 검은 곰보빵 같다.
이어서 띄엄띄엄 촌락이 나타나는데 인적 드문 길은 좀 후미지다.
돌담 두른 밭에는 그래도 완두콩 또는 감자가 심어져 하얀 꽃 나부낀다.
터진목으로 가는 도중, 제방둑에 제법 시설 규모 큰 오조리 레저파크가 생겼다.
파크 앞에는 포토존이라는 달빛 정거장이 하수아비처럼 하품을 하고 서있다.
달빛 전망대를 만들어 달밤에도 카약과 보트를 탈 수 있다는데 주소지를 보니 고성리다.
썰물 진 내수면은 점점 바닥 드러내고 갯고랑이 만든 유연한 물길은 추상화를 그린다.
무채색 대형 화면에 취해 걸음걸이 한없이 더뎌진다.
그러나 이제 곧 광치기 해변 터진목과 만나게 된다.
4·3 비극의 현장인 터진목 일별하고 수마포로 직진해 진지동굴을 둘러보면 지질 트레일 코스 완주다.
쉬엄쉬엄 세월없이 걸어서인지 서너 시간 좋이 걸렸다.
어느 결에 해거름이 되며 내가 끌고 온 그림자 거인처럼 길쭉해졌다.
차에 오를 즈음, 바다에 금빛 노을이 눈부신 윤슬 을 길게 펼쳐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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