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번 걸음 끝에 하논에서 드디어 자운영꽃을 만났어요.
하마나 하면서 그간 하논분화구를 뻔질나게 들랑거렸더랬는데 지난주까지도 아무 기척이 없었거든요.
농무 자욱하게 낀 아침.
부연 운무로 시야는 갑갑했지만 낮 기온이 25도에 이르자 화신 얼마큼이나 가까워졌나 궁금해 외출을 했지요.
우선 가까운 하논부터 찾았어요.
한 시간 여만 돌아도 충분한 하논 마르(maar)는 제주도에서 유일하게 논농사를 짓는 곳인데요.
동서로 약 1.8km, 남북으로 약 1.3km 너비의 타원형 수성화산활동의 산물인 곳으로, 분화구 바닥이 지표면 보다 깊게 파였어요.
분화구를 한바퀴 도는 동안 발길 자꾸 지체시킨 건 논두렁 예서제서 보물 발굴하듯 분홍빛 자운영꽃이 나타나서였지요.
논바닥에 푹신한 카펫 깔아놓은 듯하던 옛날 같은 풍성함이야 어림없지만요.
이쯤으로도 감지덕지 함은, 충청도 쪽에선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자운영인 까닭이지요.
서귀포에서 맞은 첫봄, 하논에 와 몇 십년만에 자운영꽃과 조우하던 날의 감격이라니.
그간 하논을 자꾸 찾았던 이유도 고향의 봄을 회억하게 하는 자운영꽃을 만나기 위함이었거든요.
동시에 여러 풀꽃을 사진에 담아 가며 이름 검색도 다시금 해봤구요.
하논엔 놀랍게도 육지에선 거의 사라진 자연산 우렁이도 흔하고요, 모내기철엔 거머리도 보였어요.
그만큼 오염되지 않은 환경이란 반증 아니겠어요.
수로 깊은 물속에 숨어있으면 무탈하련만 논고랑에 터를 잡은 우렁이는 대개 왜가리나 백로의 먹잇감, 그래서 빈 껍질만 말라가더군요.
하논은 벼이삭을 양식 삼은 철새들의 도래지이기도 하거든요.
특히 하논 습지는 부들과 수초 무성해서인지 꿩의 서식처, 갑자기 바로 옆에서 푸드덕 날아오르는 바람에 놀라기도 한다니까요.
그처럼 하논은 뭇새 지저귐과 꿩의 꺽꺽대는 소리에다 농가에서 들려오는 나른한 닭울음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걸음 자주 멈추게 되더라구요.
하논은 그래서 유년의 추억 속으로 떠나는 여정이 되어주는 셈이지요.
아삼삼하게 떠오르는 사무치게 그리운 어린 시절 회억할 수 있는 하논이라 봄마다 자운영꽃 핑계 삼아 걸핏하면 찾아오는지도.
겨자색으로 물오르는 버드나무와 낙엽송 줄지어 선 농지는 아마도 어느 독림가가 일부러 묘목 가꾸는 곳 같았어요.
반지꽃 민들레꽃 봄까지꽃 점나도나물꽃 별꽃 광대풀꽃 자주현호색 냉이꽃 살갈퀴꽃 금창초 돌단풍꽃 ....그밖에 외래종 씀바귀 등등.
봄들판에 키 낮은 봄꽃 지천으로 깔렸구요.
새잎 피어난 버들가지며 찔레 새순 힘차게 허공으로 튕겨 오르는 저만치, 눈을 인 한라산 신전처럼 성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