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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lighter Jan 13. 2022

쥐뿔도 없으면서 눈만 드럽게 높은 지원자

ep5. 귀하의 우수한 역량에도 불구하고 너를 안 뽑은 이유는

귀하의 우수한 역량에도 불구하고 너를 안 뽑은 이유는


귀하의 우수한 역량에도 불구하고... 어쩌고 저쩌고...
귀사는 서류 전형에서 불합격하셨습니다.
그간 보여주신 열의와 관심에 감사드리며
귀하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대기업 스무 군데 서류전형 ALL 불합격"


일본 대기업에 다니다가 귀국 후 한국 취업시장에 뛰어든 나는 서류를 넣은 모든 대기업 서류전형에서 ALL 광탈했다.

대기업 취업을 뽀개 보려고 호기롭게 덤벼들었지만

뽀개진 건 나였다.


(자세한 후기는 전편 참조 : 일본 대기업 퇴사자의 한국 대기업 취뽀기)




#1. 스펙보다 '자소서'를 중시한다는 말



비록 일본 회사이긴 하지만 짧게나마 대기업에서 직장생활을 경험해본 나는

대기업 취업에 성공한다고 해서 인생이 행복해지는 건 아니란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국 대기업 취업에 도전해보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단 하나다.

돈을 많이 벌고 싶었기 때문이다.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스스로 벌어서 충분히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월급을 넉넉히 주는 직장에 들어가고 싶었다.

밤낮없이 일하느라 고생하시는 부모님께 용돈도 챙겨 드리고 싶었다.


당시 나는 한국에서 돈을 많이 주는 직장은 대기업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한국 대기업에 들어가기에 내 스펙과 학점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타이밍이 절묘하게도 2016년 당시 한국 취업시장에서 '스펙 초월 채용'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실제로 당시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학점과 영어점수, 스펙, 어학연수, 인턴 경험 등의 스펙보다는 인성을 중시하겠다며 자소서 비중을 높이겠다고 앞다퉈 발표해댔다.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다.

스펙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던 나는

자소서에 사활을 걸기로 결심했다.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진실되게 자소서를 작성하라'는 말만 철썩 같이 믿고,

정말 꾸밈없이 진솔하게 대학 시절 열심히 했던 검도부 활동과 알바 경험을 자소서에 녹여냈다.


지원하는 회사의 채용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기업이념, 미션과 비전, 인재상, 현직자 인터뷰, 현재 전개 중인 사업 등을 샅샅이 뒤졌다.

기업과 관련된 기사도 꾸준히 찾아보며 스크랩했고, 회사에 대한 관심과 절실함이 묻어나는 지원동기를 작성했다.


자소서 잘 쓰는 법에 대한 인강도 찾아 듣고, 정부에서 지원하는 '취업 성공 패키지'사업까지 신청해서 자소서 컨설팅도 받았다. 지원하는 회사에 따라 내용을 달리해서 기업 맞춤형 '온디맨드' 자소서를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작성했다. 주변에 대기업에 다니는 지인들에게 첨삭도 부탁했다.


그렇게 한 기업 당 몇 천자씩 되는 분량의 자소서를 총 스무 군데 가까이 되는 기업에 제출했다.



그런데...



귀하의 우수한 역량에도 불구하고... 어쩌고 저쩌고...
귀사는 서류 전형에서 불합격하셨습니다.



서류전형 ALL 광탈.

지피지기 20전 20패였다.

나를 알고

상대방을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지원 기업 정보를 나름 철저히 조사했으니)

처참하게 깨졌다.


일본에서 취업 준비를 할 때는

서류전형에서 탈락한 적은 거의 없었기에 너무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못해도 스무 군데 중에 두세 군데는 붙겠거니 생각했는데 ALL 탈락이라니...

아니.. 선생님들 이건 너무 하잖아요..


주머니 사정도 안 좋은 와중에 10만 원 넘게 들여서 최신 인적성 문제집까지 다 사놨는데

최소한 인적성 시험만이라도 보게 해 주지..


이 정도면 내 자소서를 보지도 않고 휴지통에 버린 게 아닌가 합리적인 의심이 들 정도였다.


스펙보다 '인성'이나 '자소서'를 중시한다는

대기업 채용 담당자들의 말은 겉치레 말에 불과했던 것일까.




#2. 귀하의 우수한 역량에도 불구하고 너를 안 뽑은 이유



처음에는 자소서에 들인 내 시간과 정성이 너무 아까워 억울하고 화나기도 했다.


'귀하의 우수한 역량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할 거면 뽑으면 되지 왜 떨어뜨린 걸까?

확실한 건 내가 지원한 대기업에서는 나를 원하지 않았다는 거다.



속이 쓰라리긴 했지만 내가 대기업 서류전형에서 ALL 광탈한 이유에 대해 냉정하게 분석해보기로 했다. (눈물이 앞을 가리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자기 객관화가 중요하다.)






1. 학벌


공기업은 몰라도 이익을 추구하는 사기업이라면 어느 정도 학벌을 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자소서, 필기시험과 몇 번의 면접만으로 지원자의 역량을 전부 파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제한된 시간 안에 회사에 기여할 만한 인재를 뽑으려다 보니 아무래도 학벌이 좋은 지원자에게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명문대 출신 = 업무 역량이 뛰어나다'의 공식이 반드시 성립하는 건 아니지만, 대기업은 대체로 좋은 대학을 나온 지원자가 더 성실하고 일을 잘할 확률이 높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마트에서 물건을 하나 살 때도 이름 모를 회사의 제품보다 대기업 브랜드 제품에 더 손이 가듯이

취업시장에서도 소위 말하는 지잡대 출신 지원자보다는 명문대를 나온 지원자를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일본 도쿄 변두리에 위치한 국립대학을 나왔다.

일본에선 나름 인지도도 있고 괜찮은 대학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에서는 학교명을 말하면 사람들이 오코노미야키 위에 올라가는 '가쓰오부시' 대학으로 잘못 알아들을 정도로 인지도가 낮다.


무슨 대학인지도 모르는데 그게 좋은 대학인지 안 좋은 대학인지 알게 뭔가.

한국 대기업이 봤을 때 나는 그냥 이름 모를 듣보잡 대학 출신인 거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 나는 학벌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2. 학점


한국 대기업에서는 대학교 학점을 지원자의 '성실함'을 판단하는 중요한 척도로 여긴다.

'스펙 초월'이니 '인성 중시'니 떠들어대도 여전히 대기업은 지원자의 학점을 중시하는 것 같았다.

학점은 기본 중의 기본 조건이었다.

학벌에 자신이 없으면 학점으로라도 커버를 해야 한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대학 시절 학점 관리를 아주 개판으로 했다. 

졸업할 때 학점이 4.0점 만점에 환산했을 때 2점 초반대였으니 말 다했다.

(내 인생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다.)


구차한 변명을 하자면.. 일본 대기업에서는 지원자의 학점을 아예 안 본다.

내 기대와 달리 대학교 수업은 따분하거나 지루한 경우가 대다수였기 때문에,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동아리 활동과 아르바이트를 하며 보냈다.  

 

내 생각엔 대기업 서류전형에서 ALL 광탈하는데

쓰레기 같은 학점이 가장 큰 일조를 했지 않나 싶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름 모를 듣보 해외 대학 출신에, 학점까지 쓰레기인 지원자를 잠재력과 가능성만 믿고 뽑는 건 한국 대기업 입장에서도 도박이나 다름없었을 것 같다.


대기업의 최첨단 인공지능 채용 로봇이 내 자소서를 필터링해서

휴지통에 바로 떨구지 않았을까 싶다.



3. 어학 점수


문과라면 전공 지식으로 내세울만한 게 거의 없기 때문에(문송합니다..주륵..)

어학점수라도 잘 따놓는 것이 중요할 거라고 생각했다.

특히 대기업 해외영업, 무역 상사 등 해외와 관련된 직무라면 높은 어학성적은 필수로 여겨진다.

문과생이라면 어학점수는 '고고익선'이다.


학벌과 학점 둘 다 쥐뿔도 없는 내가 그나마 자신 있는 게 어학 성적이었다.

물론 어학 점수마저도 없어서 일본에서 귀국 후 급하게 만든 점수긴 하지만,

토익 940점, 토익 스피킹 레벨 7(180점), 일본어 능력시험 N1 만점 정도면

나름 괜찮은 점수라고 생각했다.

이 정도 점수면 어학 능력을 중시하는 대기업에서 좋게 봐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이 또한 내 기대를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알고 보니 한국 대기업 취업전쟁에 참전하는 문과 취준생 중에는 고학력·고학점에 높은 어학 점수까지 갖춘 고스펙 지원자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토익점수를 만점 가까이 받는 사람도 많다 보니 내 점수가 메리트가 되진 못했다.

(역시 갓 K-취준생 클라쓰....)


유일한 스펙이었던 어학 성적조차

한국 취업시장에서는 아무런 빛을 발휘하지 못했다.



4. 대외 활동(직무 관련 경험)


한국 대기업은 직무 관련 경험을 정말 너무너무 중시한다.


대학에 들어간 목적이 오로지 대기업에서 바라는 '직무 관련 경험'을 쌓기 위해서는 아닐 텐데,

마치 회사의 특정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대학 때부터 오랜 기간 준비해온 것처럼 필사적으로 어필해야 하는 현실이 서글펐다.


3년간의 암울한 고등학교 수험생활을 벗어나 대학에 들어간 나는

대학 4년 동안은 내가 좋아하는 것에 온전히 몰두하며 청춘을 만끽하고 싶었다.

4년 동안 공부가 아닌 새로운 것에 내 시간과 열정을 갈아 넣어 미친 듯이 올인해보고 싶었고, 나한테는 그 대상이 검도부 활동이었다.

싫든 좋든 4년 동안 나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면서 체력과 정신력은 물론, 팀워크 정신, 상대방을 존중하는 자세와 배려심 등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들을 많이 배웠다.  


덧붙여서 대학시절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학기 중 방학 할 것 없이 4년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며 다양한 접객 경험을 쌓았다. 카페 알바, 레스토랑 서빙, 초밥집 설거지, 우동집 서빙, 대형마트 판촉, 드럭스토어 알바 등 웬만한 접객 알바는 경험해본 것 같다.

일본에서는 아르바이트생이라고 해도 접객 교육을 철저하게 시키는 편이기 때문에, 알바 경험을 통해 고객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과 서비스 마인드를 배울 수 있었다.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나면서 맷집이 길러진 덕분에 사람을 대하는 일에도 거리낌이 없어졌다.


그런데 이 모든 경험들이 한국 취업시장에서는

정말이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모두 직무에 '직접' 연관된 경험이 아니라는 게 그 이유다.



#3. 쥐뿔도 없으면서 눈만 높은 지원자



그나마 내세울 수 있는 게

어학 성적과 대외활동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어학 성적은 쟁쟁한 문과 취준생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없었고,

내가 대외활동 경험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대외활동으로 취급받지도 못했다.


내 유일한 무기라고 생각했던 것들마저

한국 대기업 취업시장에선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한국의 취업시장에서 나는

형편없는 스펙을 가진 지원자에 불과했다.


유명한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학점이 좋은 것도 아니며

직무 관련 경험이랄 것도 없고

그렇다고 그 모든 걸 커버할 정도로

특출한 재능이나 어마 무시한 능력도 없는

별 볼일 없는 지원자.

쥐뿔도 없으면서 눈만 드럽게 높은 지원자.


그게 바로 나였다.


한국의 일반적인 대기업

특출한 재능이나 직무 관련 경험, 수상경력 등 대단한 경험이 없는 이상

눈에 보이는 객관적인 지표(성과)가 부족한 인재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일본 기업는 직원을 한 번 뽑으면 평생 안고 간다는 '종신고용'의 문화가 아직까지 꽤 남아 있는 편이다. 그래서 일본 대기업은 지원자의 당장의 스펙보다는 가능성과 잠재력에 중점을 둔다.

토익, 학점과 같은 계량적인 스펙보다 면접을 훨씬 중시한다.

(심한 곳은 10번 넘게 면접을 보는 곳도 있다.)

가능성이 있는 신입을 뽑아서 잘 키우자는 마인드다.


한국 대기업 물론 지원자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중시하겠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스펙을 어느 정도 갖춘 지원자라는 전제가 깔려야 다음 스텝으로 갈 수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마치 이성을 사귈 때 겉으로 보이는 외모가 예선 통과의 전제 조건인 것처럼,

한국 취업시장에서는 학벌, 학점, 어학점수, 직무경험 등 눈에 보이는 스펙이 예선 통과를 위한 기본 전제 조건이었다.


한국 대기업은 일본에 비해 입사 경쟁률이 너무 치열하기 때문에 기업 입장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내가 한국의 대기업 채용 담당자였어도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나 같은 지원자는 서류 단계에서 충분히 거를 수 있을 것 같다.(이럴 땐 쓸데없이 이성적이다.)


내가 내 뼈를 너무 때렸더니

순살치킨이 되버릴 것 같다..


자, 여기까지 이성적으로 나 자신을 냉정하게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자기 객관화 타임은 여기서 끝.



#4. 감성 타임 시작



이제 감성적으로 가겠다.


솔직히 말해서 처음에는 너무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살아온 인생 자체를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좀 지나고 나니 화가 났다.

자기네들이 뭐라고 내 인생을 평가하는 거지?

나도 내 나름대로 20대 때 치열하게 살아왔고,

좋아하고 관심 있는 분야에 미친 듯이 몰두하며

나 스스로의 한계를 깨기 위해 노력해본 경험도 있다.

학점 관리를 개판으로 한 것만 빼면

내가 그동안 살아온 방식에 대해 후회하진 않는다.  


한국에 회사가 대기업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굳이 나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 곳에 계속 목매며

제발 날 좀 뽑아달라고 애걸복걸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어차피 대기업에 들어간다고 해도

일반 회사에 비해 월급 조금 더 주는 거 빼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8시간 이상(아마도 그 이상) 회사에 내 시간과 노동력을 바쳐야 하는 건 매한가지 아닌가.


나를 서류전형에서 떨어뜨린 대기업과 내가 맞지 않았을 뿐, 내가 부족한 게 아니다.

단지 한국 대기업에서 원하는 인재가 아니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대기업 취업을 위해  

내 소중한 시간과 노력을 더 이상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요구하는 까다로운 조건에 나를 끼워 맞출 수도 없을뿐더러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투입하는 노력 대비 아웃풋이 너무나도 불확실한 게임을 계속하며 스스로를 희망 고문하고 싶진 않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대기업 스무군데 서류전형에서 모두 탈락한 후

깔끔하게 대기업 취업을 접었다.



그리고 이때의 결정을 후회한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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